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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자전거 탄 풍경
  • 환경과조경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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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입니다. 봄의 절정인 4월 특집으로 자전거를 올린 건 온화한 기운을 열망하는 마음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도시·환경 전문지의 편집을 맡고 있으니 자전거 하면 녹색 도시, 지속가능한 환경과 에너지, 대안적 교통 같은 묵직한 주제를 이야기해야 마땅하겠지만, 왜 그런지 사랑, 추억, 동경 같은 낭만적인 낱말이 먼저 연상됩니다. 자전거는 이미 19세기에 발명되었지만 속도와 효율을 먹고 사는 우리 도시의 현실에서는 아직, 아니 여전히, 일상적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자전거가 등장하는 영화 속 장면들이 머리를 스쳐갑니다. 어릴 적 KBS ‘주말의 명화’에서 봤던 ‘내일을 향해 쏴라’의 자전거 신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혹시 기억나시나요? 폴 뉴먼이 로버트 레드포드의 연인 캐서린 로스를 몰래 자전거 핸들 위에 태우고 아침의 목장을 가로지르는 풍경 말입니다. 자전거 위에서 사과를 따 함께 먹는 이 장면엔 지금 들어도 경쾌한 팝송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가 흐릅니다. 피비린내 나는 서부 활극을 낭만으로 전환시킨 이 명장면은 여러 광고에서 패러디되기도 했습니다.


너무 옛날 영화인가요? 그럼 3040세대의 추억 ‘ET’는 어떤가요. ET 최고의 명장면을 하나만 꼽는다면 영화 후반부의 ‘공중 부양’ 신일 겁니다. 자동차를 타고 쫓아오는 어른들에게 잡힐 듯한 찰나, ET의 초능력으로 아이들의 자전거가 훌쩍 날아오릅니다. 이 장면에 전 세계의 수많은 아이들이 발 구르고 손뼉 치며 환호했습니다. 주인공이 자전거에 ET를 태운 채 달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이 컷은 다양한 장난감과 퍼즐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자전거가 아니라 자동차였다면 그만큼 매력을 주지 못했을 겁니다.


15초, 30초짜리 광고에서도 자전거는 꿈과 사랑의 메신저로 등장하는 단골손님입니다.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1990년대 초를 강타했던 빈폴의 광고 카피, 아마 많은 분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할 겁니다. 이 땅의 뭇 남성들을 설레게 했던 포카리스웨트 광고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내일을 향해 쏴라’의 캐서린 로스보다 훨씬 예쁜 손예진이 디테일 없는 순백의 원피스를 입고 자전거를 타며 지중해 산토리니의 새파란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도시를 달립니다. 자전거가 음악과 모델과 배경을 하나로 엮는 고리 역할을 합니다. 당대의 역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자전거는 여유와 낭만을 아름답게 매개하지만, 현실의 도시인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환상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전거에 대한 로망은 있지만 막상 실제로 타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서울 같은 자본주의 도시에서 속도를 포기한다는 건 아주 두려운 일입니다. 속도보다 더 큰 이유는 무섭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자전거로 동네 여행을 하다 움푹 파인 노면에 자전거가 뒤집혔고 브레이크 핸들이 목에 꽂혔습니다. 다행히 동맥을 피해갔지만 아직도 목에는 커다란 흉터가 남아있습니다. 대학교 때는 다섯 시간짜리 지루한 드로잉 시간을 견디다 못해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가 오픈 트렌치에 자전거와 함께 빠졌습니다. 얼굴 전체가 피범벅이 되어 교실로 귀환한 저를 교수님은 바로 응급실로 보내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캠퍼스 전체의 트렌치에 철제 덮개가 설치됐습니다. 이런 트라우마 때문인지 저에게 자전거는 로망과판타지일 뿐, 현실의 세계에선 불안과 위험의 상징입니다. 딸아이가 하도 졸라대기에 어린이날 선물로 자전거를 사준 날, 제발 그 자전거가 베란다에서 먼지 쌓인 고물로 변해가길 기도했을 정도니까요.


이번 호 지면을 넘기다 보면 김정은 팀장의 원고에서 『사이클 시크Cycle Chic』라는 근사한 책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덴마크의 영화감독이자 사진작가인 미카엘 콜빌레-안데르센Mikael Colville-Andersen의 역작입니다. 그가 말하는 ‘사이클 시크’는 자전거 타기와 도시적 스타일링을 함께 담은, “자전거와 함께하는 ‘패셔너블한’ 일상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얼핏 보면 스트리트 패션 화보집 같지만 찬찬히 다시 보면 자전거 타기가 환상이 아니라 일상인 도시 코펜하겐의 힘이 읽힙니다. 그의 말처럼 “치마를 입고 힐을 신고 자전거로 도심을 유유히 누비는 여자, 더블 재킷에 로퍼를 신고 자전거로 출근하는 남자”가 도시의 평범한 풍경이 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다면, 저에게도 자전거가 낭만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현실의 일상으로 다가오겠지요.


사실 이번 특집은 몇 달 전 조한결 기자가 낸 기획서에서 시작됐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자전거 전문가와 연구자들이 필자로 동참해주셨지만, 가장 눈여겨봐주셨으면 하는 꼭지는 조 기자의 ‘서울 자전거 출근기’입니다. 기획을 한 원죄로 조 기자는 홍대 근처의 집에서부터 방배동 사무실까지 자전거 타기를 감행하며 환상과 일상의 경계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두 차례의 예행 연습과 실전에서 페달을 밟은 그녀에게, 또 자전거로 동행하며 사진 취재를 맡은 이형주 기자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심정은 제 아이가 자전거로 아파트 단지를 처음 돌던 날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속도의 도시 서울에서 자전거 출퇴근이 일회성 탐험이 아닌 시크한 일상이 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우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책과 설계의 과제를 챙겨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로 꼭 3주째인 환절기 독감을 떨치고 내일은 자전거 두 바퀴로 서울의 봄을 ‘시크’하게 가로지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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