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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오늘도 그린다, 지겹거나 즐겁거나
  • 환경과조경 2015년 4월
그림 1-2.jpg
국내 공동 주택 프로젝트에 사용했던 개념으로, 외부의 잔디 마당을 우리의 거실처럼 편하게 썼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오형석

 

0 언제인지 가물가물한 기억이 있다

그림(작업, 디자인, 플랜) 그리면서 “난 왜 이렇게 매일매일 그림만 그려야 하고, 지겹게 계속 수정과 보완에 이런 소모적인 삶을 살아야 하나”라는 불평을 넋두리처럼 늘어놓으면서, 그러니까 무지 지겨워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지나가던 ‘어린이(대리 미만의 직원부터 학부생을 이르는 매우 주관적인 용어)’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게 직업이니까요.”

 

아… 맞다. 이게 직업이니까 내가 이러고 있구나. 직업이라는 것. 설계라는 것.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었는지 부끄럽기도 했다. 그 직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일에 임하는지 조금 정리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면서 거칠게 드러내 보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의 관용이 필요한 순간이다.


1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앞으로 서술할 무척이나 주관적인 내용의 이해를 돕고자 나의 배경을 소개한다.

– 직원들과 함께 먹고 살 것을 걱정하는 조경설계사무소의 생계형 디자이너이자 소장이다: 돈이 필요함.

– 주된 클라이언트는 대형 건축설계사무소들, 회장님들, 친구들밖에 없다: 클라이언트 폭이 참 좁음. 

– 대형 공원 프로젝트 경험이 거의 없다: 조경계의 아웃사이더임.

– 공원보다 공동 주택과 인테리어 경험이 훨씬 많다: 건축하는 친구들 덕분임.

– 조경 설계를 위한 답사나 책보단 각종 취미 생활과 역사에 관심이 많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취미와 일이 접목되면 좋겠음.


2 일은 벨소리와 함께 온다

휴대전화 벨소리와 함께 일이 시작된다.

일의 개요, 기간, 설계 비용 등이 결정되고 드디어 출발선에 선다. 이번 프로젝트는 “기념적인”, “최근 가장 이슈가 되는”, “조경이 할 일이 아주 많은”, “소장님이 꼭 하셔야 하는” 등의 이런 저런 얘기가 잡다하게 언급된다. 다 좋은데, 생계형 디자이너인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래서 얼마짜리 프로젝트인가’이다. 웃으며 욕할지 모르겠지만 디자인에 대한 ‘욕정’은 입금과 함께 피어난다(6월호에 보완하여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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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내 모든 옥상이 녹화되어 입체적인 녹색 단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제시한 개념이다.

 

 

3 컨셉은 이름표 같은 것이다

컨셉(concept, 개념, 제목, 설득할 어휘), 소위 의미없는 말장난 같다고 비판받고 있는 이것에 나는 집중한다. 아주 많이.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은 이렇게도 얘기한다. 국적 불명의 언어, 빛 좋은 개살구,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디자이너만의 혼란스러운 텍스트, 너무 어려운 어휘가 아닌가, 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컨셉에 집중한다. 한때는 설계공모나 턴키 프로젝트에서 컨셉을 (엄밀히 말하면 발주처에서 심사위원이나 조합원을 쉽게 설득할 수 있도록 만든 쉽고 간편한 제목을) 요구해서 많이 만들어 본 경험이 있다. 플랜이나 디자인보다 이 컨셉을 만들어내는 데 50% 이상의 에너지를 쏟은 적도 있다. 분양 카탈로그에서 시집까지, 영어에서 라틴어 어원까지, 소스가 될 만한 건 모두 살펴 본 적도 있다. 그 당시에는 너무 힘들고 짜증나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 작가인가 싶기도 했다.

설계가는 그림으로 얘기하고 디테일에서 승부를 걸어야지 이게 도대체가 뭔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지금 생각해 보면, 놀랍게도 컨셉에 집중했던 그런 시간이 지금의 설계 작업에서 흔들리지 않는 기둥 같은 힘을 주고 있다고 확신한다.

아직 디자이너의 머릿속에서 맴도는 얼토당토않은 순간의 아이디어들은 컨셉이라는 그릇 안에 조심스럽게 담겨진다. 그릇이라는 틀 안에서 아이디어가 제자리를 찾게 된다. 셰프들이 얘기하는 요리의 플레이팅이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컨셉이 명확하다면 앞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해 나가면서 힘 있는 하나의 원칙으로,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틀로 작동하리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수많은 의견, 클라이언트의 요구 사항, 관공서 인허가 문제, 심의위원 의견, 예산 문제, 주변 민원 문제, 현장 문제 등을 헤쳐나가야 할 때마다 말장난에 의미 없다고 했던 컨셉은 나에게 많은 가이드를 제공한다. 그러한 가이드를 제공했던 컨셉은 구체화, 상세화, 실현을 통해 클라이언트에게 그리고 나와 클라이언트가 함께 상상해서 만들었던 장소에 하나의 이름표로 되살아난다.

내가 클라이언트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도록 이름표를 붙였고 그 이름이 실현된 결과물과 일체감을 갖는다면, 그래서 클라이언트와 내가 같은 것을 상상하고 같은 것을 실현해 냈다면, “이것은 하나의 완성품이다”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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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의 주변에는 처음에 생각했었던 컨셉과 부분적인 단면 디테일 등이 적혀 있다. 이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램프도 생기고 필로티도 확정되고 엘리베이터와 같이 레벨을 극복하는 장치도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나무도 심고. 중요한 수종명도 적는 단계가 된다. 이제 작업한 결과물을 들고 클라이언트를 만나게 된다.

 

4 이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컨셉이 3분의 2정도 익었다 싶을 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초기 평면 위주로 시작을 하게 되는데, 다음 네 가지 고려 사항을 뒤죽박죽 섞어 그리기 시작한다.

 

– 컨셉의 반영(이름표를 붙일 만한가)

– 클라이언트와의 교감(클라이언트의 요구 사항을 제대로 소화했는가)

– 오버 디자인의 지양(예산 범위 내에 들어오는가)

– 드로잉을 통한 기능과 평면 비례의 추구(평면이 비전문가가 보기에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렇게 몇 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평면은 다른 여러 기능과 역할보다 일단 미적으로 아름답게 완결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클라이언트뿐 아니라 디자이너가 보기에도 어느 정도마음에 들어야 (앞으로 계속 봐야하는 평면도를) 상세화하며 쉽게 발전시킬 수 있다. 평면에서 오차가 적어야 한다. 그래야 상세화 과정에서 구조물과 시설물의 위치 조정으로 인해 평면이 변경되는 횟수를 줄일 수 있다.

나는 ‘색연필-빨간 사인펜-검은 플러스펜-색연필’을 순서대로 사용하며 그림을 그려 나간다. 색연필은 점점 진한 색으로 변화되면서 아이디어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한다. 빨간 사인펜은 아이디어가 기능과 접목되는지 검토하는 레이어로 기능한다. 모든 것이 결정될 때 비로소 검은색을 사용하게 되고, 이때 컨셉과 일치하는가를 검증하는 레이어로 마감한다. 검은색 평면에 색연필로 색을 입히면서 녹지와 공간을 (다음 작업을 감안하여) 마무리하는 첫 단추를 꿰게 된다. 

우리의 작업은 고맙게도 주로 오래된 대형 건축 회사나 친구인 클라이언트와 함께 진행되어 본의 아니게 건축에 제안도 많이 하고 건축도 우리의 의견을 많이 수용하는 편이다. 건축법 이외의 건축 디자인과 관련해서도, 이를테면 건축 매스, 입면, 파사드, 컬러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며 진행한다. 따라서 오래 같이 작업한 클라이언트들은 우리가 건축물을 포함한 일체형 디자인을 제안해 주길 바라며, 우리는 때에 따라 건축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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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이 온통 녹색이라 이 정원은 손님과 야외에서 만찬을 즐길 수 있는 방의 개념으로 작업했는데, 본의 아니게 포장으로 다 처리했다. 주변에 기존 수목들도 많고 관리 문제도 있어 포장 정원이 완성되었다. 깔끔하다고 자평한다.

 

5 클라이언트로 변신할 순간이다

이름표가 달린 아름다운 평면(컨셉을 담은 공간 구성 1차 안)이 어느 정도 구성되면 클라이언트와 약속을 잡게 된다. 효율적인 시간 배분과 성격 급한 클라이언트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평면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더라도 가능한 빠른 시간에 미팅 날짜를 잡는다.

이제부터 클라이언트와 지난한 설득과 협의와 후속 작업(도면, 보고서, 보고, 예산서, 감리 계획)이 시작된다. 앞선 프로세스가 ‘생계형 디자이너 모드’였다면, 이제는 ‘클라이언트 모드’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할 단계다.

나는 이 프로세스에 진입하면 클라이언트와 수많은 화제(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신변잡기 등)에 대해 얘기하고 서로를 많이 알고자 한다. 가능한 기호(선택의 기준, 좋고 싫음, 디자인풍)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나눈다. 그래서 ‘클라이언트와 하나의 뇌와 눈을 갖고자’ 애쓴다. 클라이언트의 눈으로 대상을 다시 보고 검증 하고자 한다.

클라이언트는 지금 상황에서, 내가 돈을 쓴 이 공간이 돈 값을 할 것인가? 내가 선택한 이 디자이너가 사기꾼 아닌가? 내가 지인들에게 자랑스러워 할 정원과 공간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마구 얘기한 것들이 전문가가 보기에 쓰레기 같은 의견인가? 내가 상상했던 것이 나올 것인가?

내가 한 상상이 맞기는 한 걸까? 라는 생각을 하며 혼란스러운 상태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클라이언트로 변신하려는 시도를 통해 위의 걱정들을 해결해 나가고자 한다.

데니스 레스던(Denys Lasdun)이라는 디자이너의 말로 이 단락을 마무리한다. “우리의 직업은 클라이언트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라기보다, 그가 원한다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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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색연필, 그리고 포토샵의 크로스오버 스케치로, 실사 이미지를 바탕으로 강조할 공간과 프로그램에 대해 디자이너의 의도대로 표현하는 데 유용하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만큼 끌어들이는 힘이 좋으며 깊이가 느껴진다.

 

6 산이 없는 12월이었다

그런 설계 방법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조직이 필요했다. 전 직장에서 퇴사하고 하늘과 땅이 붙어있는 이국의 어느 곳에서 사무실 개소를 고민했다. 지평선만 보이는, 즉 ‘산이 없는 곳’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사무실 개소에 대한 플랜을 구체화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국제 설계공모에 참가해보기로 했다. 거칠게 손발을 맞춰보면서, ‘사무실을 열어도 뭐 죽진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쉽게 쉽게 했다. 설계공모 팀 등록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이제 팀명을 정해야 한다. 깔끔하게 팀원들 성의 이니셜을 조합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L: 故이광빈

L: 이강훈

O: 오형석

S: 손방

Y: 유선근

K: 김아연

 

이렇게 ‘L2OSYK’가 설계공모 등록 아이디가 됐고, 손발은 잘 맞췄고, 당선은 안됐고, 로직은 탄생했다. 이렇게 디자인로직(LOSYK)이 2005년 5월에 시작됐다. 이강훈은 현재 인테리어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다음 호에는 프로젝트 별로 발생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다

 

오형석은 새로운 조경 문화를 고민하던 젊은 조경가 7인과 의기투합하여 만든 프로젝트 그룹을 기반으로, 2005년도에 디자인로직을 설립하였다. 만 10년 동안 디자인로직을 이끌며 새로운 외부 환경에 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으며, 또 다른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디자인을 갈구하고 있다.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 후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환경조경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서인조경과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LH 조경 부문 자문위원, 인천시 도시디자인 자문위원, 코레일 조경 심의위원을 역임하였고, 한국도로공사 사옥, 한남더힐 설계공모전에서 당선되었으며, 세종문화회관 예술 정원, 호텔 롯데 제주, 용현 SK VIEW 등을 설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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