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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풍경화식 정원 퍼가기
  • 환경과조경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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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날레토(Canaletto)가 1750년경에 그린 템스 강변의 정경. 멀리 보이는 돔이 바로 세인트 폴 대성당이며 그 뒤쪽으로 워번 농장이 위치하고 있다. 그림은 로얄 컬렉션(Royal Collection)의 일부 ⓒGoogle Art Project

 

#42

그린 핑거스Green Fingers

 

드높은 정치적 이상과 각종 세련된 건축물에도 불구하고 나무가 없으면 풍경화식 정원은 성립되지 않는다. 하하ha-ha를 조성하여 전원 풍경을 시각적으로 끌어들인 결정적인 동기는 바로 그곳에 나무가 자연스럽게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심은 나무가 제대로 효과를 내려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이백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랜슬롯 브라운이 심었던 나무들이 진가를 발휘한다”1라는 말이 물론 과장되긴 했어도 전혀 사실무근이 아님은 누구나 알고 있다. 풍경화식 정원이 만들어지면서 식물 수집과 재배 사업에도 가속이 붙었다. 식물 수집가들이 식민지에서 새로운 식물을 부지런히 실어 날랐으며 식물학과 식물 재배 기술이 성큼 도약한시기이기도 하다. 새로운 식재 기법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에 가장 앞장 선 인물 중 하나가 제8대 페트르 남작Robert James Petre, 8th Baron Petre(1713~1742)이었다.

1712년, 런던 사교계를 발칵 뒤집은 스캔들이 하나 있었다. 당시 썩 괜찮은 신랑감으로 제7대 페트르 남작이 꼽혔는 데, 어느 날 그가 사교계의 여왕, 방년 16세의 아리따운 아라벨라 페르모어Arabella Permor(1696~1737)2 양의 머리카락을 한 줌 자른 사건이었다. 그것도 사교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가면무도회에서 많은 증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다. 아라벨라 양은 그때 연회장 한쪽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페트르 남작이 다가가서는 그녀의 어깨에 우아하게 드리운 머리카락을 한 줌 쥐고 가위를 꺼내 싹둑 잘랐다. 그 전에 두 선남선녀 사이에 무슨 사연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라는 설과 청년들이 짓궂은 내기를 한 것이라는 설이 있었다. 둘 사이의 염문이 있었더라도 그 사건을 계기로 끝장이 난 건 물론이다. 아라벨라는 대노했고 두 가문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무도회에 참석했던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가 이 사건을 목격했다는데 ―정말이지 그는 끼지 않는 곳이 없었다― ‘두 가문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그 일화를 장편 풍자 서사시로 써서 발표했다. ‘머리카락 강탈 사건’3이라는 제목의 이 장시는 하루아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두 가문을 화해시키겠다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포프의 걸작이 한 편 탄생했다.

페트르 남작은 같은 해에 부유한 웜슬레이 가문의 상속녀와 혼인했으며 이듬해에 천연두에 걸려 유복자를 남기고 죽었다. 이 아들이 커서 8대 페트르 남작이 되었는데 그 역시 아버지처럼 서른 살 생일을 맞기도 전에 천연두에 걸려 유복자를 남기고 죽었다. 아버지와는 달리 아들은 여인의 머리카락 대신 식물을 수집했고 정원 조성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소질을 보였다. 이 8대 페트르 남작은 나중에 식물학의 대부라고 칭송받는 인물이 된다. 그의 업적을 들여다보면 그 짧은 생애 동안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장난감보다 식물을 더 좋아했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는 1742년, 29세로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손던 홀Thorndon Hall 장원을 수목원으로 재편성해 약 700종의 식물을 길렀으며, 4만 주가 넘는 미국 수목을 도입하여 심고, 여러 채의 대형 온실을 만들어 까다로운 남부 수목을 재배했고, 지인들의 장원 여덟 개를 풍경화식으로 바꾸어주었다. 그 역시 남들처럼 유럽 대륙으로 그랜드 투어를 다녀왔지만 돌아올 때 식물 관련 서적만 배에 가득 싣고 왔다. 이런 방식으로 페트르 주니어는 풍경화식 정원에 다양한 식물을 제공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식물학자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아 미성년자로서 이미 왕립학회Royal Society의 회원으로 추대된 특이한 경우였다.

그러나 그의 최고 주특기는 ‘마치 살아 있는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듯한’ 4 식물 배치법이었다고 전해진다. 수목을 S자 띠형으로 심고 상록성 참나무와 낙우송, 은빛 전나무와 키 작은 주목을 서로 조화시켰으며 호랑가시나무와 회양목을 대비시켰다. 이런 식재법은 “켄트의 조잡한 식재법에 비해 백배나 근사한 효과를 주었다”5는 평을 받게 했다. 그의 나이가 어렸음에도 그를 스승으로 본 젠틀맨들이 꽤 많았는데, 그중에 필립 사우스코트Philip Southcote(1698~1758)라는 인물도 있었다. 필립 사우스코트는 워번 농장Woburn Farm의 주인이었다. 워번 농장은 레저스 농장과 함께 영국의 장식 농장 중 쌍벽을 이루었던 곳이다.6

템스 강 남부 평야의 가장자리에 있는 워번 농장은 그 자체로는 크게 매력 있는 풍경이 아니지만 멀리 아름다운 월튼 브리지가 바라다보이고 동쪽으로 세인트 폴 대성당이 우뚝 서 있으며 북쪽 경계를 따라 번이라는 작은 하천이 흐르는 곳이다. 번 하천은 농장 전체를 적시고 저택 가까이에 와서 호수로 흘러들어 간다. 필립 사우스코트는 이런 주변 환경을 시각적으로 이용함과 동시에 “예술의 힘을 이용하여 평범한 농경지를 장식 농장으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7 물론 이렇게 역사에 남을 작품을 만들기 위해 그가 들인 공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산책로 루트를 정하기 위해 수백 가지의 서로 다른 경로를 걸어보았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8 경로에 따라 보이는 장면이 시시각각 달라지기 때문에 풍경화식 정원의 관건 중 하나는 최적의 산책 경로를 정하는 것이다. 그 전통이 워번 농장에서 탄생했다.

사우스코트 자신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동시대의 증인들이 쓴 방문기가 여러 편 전해진다. 그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아마도 토머스 훼이틀리Thomas Whately의 평론서 『고찰Observation』9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워번 농장을 소개하며 “정원의 경계 속에 농촌의 요소를 포함한다는 아이디어가 여러 번 실천에 옮겨졌지만 워번 농장처럼 완벽하게 구현된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10 워번 농장의 3분의 2는 목초지로 소와 양을 쳤고 나머지는 경작지였다. 사실 정원을 별도로 조성할 수 있는 면적이 없었으므로 사우스코트는 순환 산책로circuit walk를 고안했고 이를 정원으로 응용했다. 즉, 산책로 변에 넓은 폭으로 식물 벨트를 조성한 뒤 이것을 정원이라 하였다. 순환로를 설정한 것은 레저스 농장도 마찬가지였지만 레저스의 경우 농장 그 자체를 목가 정원으로 해석했으므로 정원에 대한 개념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워번의 식물 벨트에는 당시 보기 힘들었던 각종 진귀한 꽃과 관목이 자랐다. 당시 심었던 식물의 목록이 전해지는데 그 중에는 패모11 등 생소하고 진기한 식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대적 개념으로 본다면 지역 생태계에 어긋나는 식재법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겠으나 당대 사람들은 무척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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