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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비평(가)의 자리
  • 환경과조경 2015년 4월

추위도 잠시 주춤하고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던 3월 중순, 이종건 교수를 만났다. 새 봄에 『건축평단』이 세상에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꽤 오래 전부터 비평지 창간을 준비한다는 소식은 들어왔지만, 솔직히 녹록치 않은 일이라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비평가 개인이 비평집을 내는 일이야 상대적으로 손쉽겠지만 (물론 이 역시 요즘과 같은 출판 시장의 불황 앞에서는 쉽지 않지만), 지속성을 담보로 해야 하는 정기간행물은 의외였다. 잡지가 유지되려면 필자와 독자, 그리고 책을 출간하고 배포하는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는 자본(가)이 필요하다.

이런저런 우려를 담아 이종건 교수에게 점점 더 짧고 쉬운, 이미지 위주의 지면을 (아니 화면을) 원하는 시대에 비평 전문지의 독자는 어디에 있겠느냐, 비평가들은 어떻게 모였으며, 또 앞으로 어떻게 이 잡지를 유지할 것인지 등등을 물었다. 그는 단호하게 가장 기본적인 건축적 문제를 다룰 것이며, 이러한 핵심 과제를 간과한다면 건축이라는 분야와 건축가라는 직능은 바로서기 어렵다고 일갈한다. 독자의 많고 적음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는 이 책이 ‘주인 없는 책’임을 강조했다. 모든 자금은 책을 만드는 데 쓰여야 하며 (그래서 원고료가 없는 것 같다) 이 책의 존재 가치와 운영 방식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참여한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세상은 주인(자본가)의 입맛에 맞게 재단되지 않는 비평이 자리 잡은 사회다. 주인은 없지만 후원자는 있다. 아무 조건 없이 비평서의 존재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후원금을 보내고 구독을 약속한 것이다.

자본과 독자는 둘째 치더라도, 또 글을 쓰는 비평가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너무 자조적인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예전 건축 잡지사에 다니던 시절, 잡지에 게재될 작품의 비평가를 찾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주로 교수님들이) “저는 비평가가 아닙니다” 혹은 (대개 설계를 시작한 교수님들이) “저는 이제 비평을 하지 않습니다” 혹은 심지어 “건축계에는 발언하지 않을 생각입니다”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는데, 겸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전문 분야 내에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지 못한 비평의 위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따라서 매체에서는 젊은 건축가를 발굴하는 것 만큼 새로운 비평가를 발굴하는 일도 항상 지난했다. 한편으로는 작품을 게재하기로 한 건축가가 비판적인 비평 원고가 실릴 예정이란 이야기에, 작품을 싣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간신히 설득해 원고를 내보낸 일도 있었다. 반대로 비평가의 날선 (혹은 독단적) 비평에, 편집부에서 필자에게 수위 조절을 요청하는 씁쓸한 일도 있었다. 그만큼 비평의 영역은 마이너한 것이었고, 비평 문화는 좀처럼 성숙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건축계에서 『건축평단』의 탄생 배경이 짐작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최근 건축 동네에는 오래된 매체 몇몇이 저물어간 대신, 지난 몇 년간 기존의 매체와 차별화된 몇 가지 매체가 등장했다. 2008년 창간된 격월간 『와이드 AR』은 ‘심원건축학술상’과 ‘건축비평상’ 등을 운영하며 비평과 연구를 독려하고 있으며, 젊은 비평가와 필자, 건축가의 발굴에 힘쓰는 잡지다. 건축을 통한 사회 공동체 활성화를 꿈꾸는 정림건축문화재단에서 발행하고 있는 「건축신문」은 2012년 창간(연 4회 발행)하여 참신한 기획으로 건축과 다양한 문화예술을 가로지르고 있다. 김용관 건축 사진작가가 이끄는 아키라이프에서 발행하는 『다큐멘텀』은 건축 과정을 이미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록하는 건축 전문지로 2014년에 창간되었다.

건축 잡지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 중반까지 건축계에서는 월간지 형식의 10여 종의 잡지들이 비슷비슷한 콘텐츠로 잡지를 만들었다면, 최근 새로 만들어진 대안적 성격의 잡지들은 그 형태나 발행 횟수, 콘텐츠의 방향 등을 다양화하며 (형편껏) 꾸려가고 있다. 이 매체들이 모두 비평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매체 성격의 다변화는 문화의 다양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분야의 여러 사람들의 활동 무대가 되어 풍요로운 토양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건축 이론과 역사 관련 모임의 활동도 눈여겨 볼만하다. 2012년에는 목천건축아카이브와 한국 현대 건축 연구를 위한 학술모임인 현대건축연구회가 함께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이란 이름의 포럼으로 연구 성과를 공유하기도 했다. 매주 토요일 모여 건축 이론서를 강독하는 토요건축강독 역시 젊은 연구자들이 여럿 참여하며 몇 년째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건축평단』에 참여한 비평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러한 매체나 모임에서 활동하는 젊은 이론가·비평가들을 꽤 알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젊은 이론가·비평가들의 건축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활동이 『건축평단』의 탄생에 동력이 되었을 것이고, 미래의 가능성도 꿈꾸게 했을 것이다.

이종건 교수와의 자리가 파할 무렵, 조경 비평의 미래를 위해 한 말씀 부탁했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이지만, 건강하고 비판적인 지식인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반동·저항·이질적 분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토양을 분야의 원로와 주전 멤버들이 만들어 주어야 한다. 우리 바깥에서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우리의 생각도 바깥에 알려야 한다. ‘생각하는 조경가’가 나오도록, 생각할 수 있는 자극을 주어야 한다. 왜 조경이 필요한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하고, 우리 고유의 조경·정원 문화·외부 공간을 고민하고 끊임없이 역사와 대화하는 그런 긴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 이 글을 마무리할 무렵 『건축평단』의 강권정예 편집장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다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은, 『건축평단』 정기구독자들의 95%는 건축 관련자들이지만, 그 나머지는 고등학교 교감 선생님, 교육 공무원, 미술 선생님, 카페 운영자 등 ‘일반인’이라고 한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항상 궁금해 하는 ‘독자의 실체’를 엿보고 잠시 놀랐다. 이를 두고 여전히 책은 힘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너무 낭만적인 자기합리화일까. 강권정예 편집장은 한때 건축 기자로 활동했으며, 최근 건축 전문 출판사 정예씨(JEONGYE publishing Company)를 열었다. 대표적 책으로 열정적 건축 저널리스트였던 고 최연숙 편집장의 유고집 『사람의 가치』, 『부산 홍티문화공원 공공예술 프로젝트』 등이 있다. 미리 홍보하자면 부산의 홍티문화공원은 『환경과조경』 5월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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