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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서재] 책과 헤어지지 않기3
번역과 세계와 당신
  • 환경과조경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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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도저한 사랑에 관한 절절한 중단편을 하나 꼽으라면 거의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작품이 있지요. 김연수의 소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입니다.1 늦가을에는 꼭 이 소설을 읽어야 합니다. 이제 한 달이 지나면 이 세계도 온통 하얗게 뒤덮일 테니. “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이젠 기억조차 까마득하군요.”2 내 기억이 옳다면 찬바람에 낙엽들이 포도鋪道 위로 산산이 흩어지던 이 무렵이었을 겁니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김연수의 소설에서는 번역을 하고 주석을 다는 이야기가 첫머리부터 등장합니다. 화자인 ‘나’는 총 227행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풀어 쓴 번역가입니다. “다시 121행의 포蒱자로 돌아가면 이다음에 올 글자는 도桃자나 도陶자가 거의 확실하다. 포도라는 단어는 라틴어‘botrus’를 음사해서 만들었다.”3 ‘포도葡萄’의 유래입니다. 서아시아가 원산지인 포도는 페르시아에서 로마로 가기도 하고, 저 멀리 설산을 넘어 중국으로 왔다가 고려 때 우리 땅에도 들어옵니다. 음차音借도 번역입니다. 족히 천 년은 걸렸을 긴 여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군요.

한편 주인공인 ‘그’는 아무 연락도 없이 갑자기 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여자 친구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후회는 없어’로 끝나는 짧은 유서만 남겼지요. 여러 연애 소설을 탐독하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둘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지만 여전히 알 수 없지요. 찾은 건단 한 가지. 여자 친구가 죽기 전에 ‘나’가 번역한 『왕오천축국전』을 도서관에서 빌렸다는 사실이지요. 안타깝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사이를 원래 그대로 틈으로 남겨두고 살아가는 일뿐”4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즐겨 적던 릴케Rainer Maria Rilke의 글귀를 따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다. 아주 기이하고도 독특하고 불가해한 것들을 마주할 용기.”5 『왕오천축국전』의 ‘소발률’, 동서양 모두 ‘세계의 끝’이라 불렀던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라는 대설산으로 향하지요. 이젠 목숨까지 걸고 해석해보려 합니다. 작중 화자인 ‘나’가 글로 번역을 했다면, 설산을 오르는 ‘그’는 온몸으로 번역을 한 셈이지요. 글쎄요, 끝내 뭔가를 봤을 겁니다. 현실과 환각이 만나는 ‘세계의 끝’의 미혹 또는 매혹. 목숨을 건 번역 이야기는 고혹적입니다.


철저한 독서의 오래된 역사

간만에 사사키 아타루입니다. “번역이란 철저한 독서입니다. 한 자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벌거벗은 ‘읽기’의 노정입니다.”6 도서관에 관한 책을 읽다가 이 철저한 독서의 역사가 생각보다 오래된 것임을 깨달았어요. 현재 확인된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인들이 점토판에 새긴 것이지요. 그런데 이후 수메르인을 정복한 아카드인 등 여러 민족이 모두 수메르인의 설형 문자를 그대로 씁니다. 훗날 로마가 멸망한 후에도 유럽인들이 굳이 라틴어를 사용한 이유와 흡사하지요. “결과적으로 그 지역 필경사들은 자신들의 언어뿐만 아니라 수메르인이 사용하던 다양한 설형 문자의 가치를 알아야 했다.”7 그래요. 최초의 번역가는 필경사이며, 번역은 문자처럼 역사가 유장합니다.

1980년 시리아에서 고대 도서관의 원형을 발굴했지요. 점토판이 가득한 이 문서 보관실을 기원전 2300년경에 지었답니다. “60여개의 점토판에는 수메르어로…(중략)… 새겨져 있었고, 28개의 점토판에는 수메르어가 에블라어로 번역되어 있었다”8고 합니다. 번역 자체가 수천 년 문명의 오랜 흔적이지요. 철저한 독서가 켜켜이 쌓여 있어요.

 

 

허대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1999년부터 16년째 조경설계사무소를 다니고 있다. 4년 전부터는 개인 주택 정원, 어린이집과 학교의 외부 공간, 농장 조경계획, 공장 외부환경 개선사업, 아파트 조경 가이드라인 등 하나하나 성격이 다른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나중에 그 공간에서 머무는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일하는 조경설계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현재 스튜디오테라(STUDIOS terra)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공저로 『철새협동鳥합』이 있고, 제프 마노가 쓴 『빌딩 블로그』를 번역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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