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남에게 미루기
  • 환경과조경 2014년 12월

그림47.png

 

도대체 누가 한 거야?

영민이네 작품 봤어? 정말 모델은 전문 회사에서 만들었다고 해도 믿길 정도로 훌륭하더라. 그런데 그 모델, 전부 후배들이 만들었대. 방학 때부터 애들 매일 밥 사주고 술 사줘서 돈으로 도우미 섭외한 거나 마찬가지지. 정작 자기는 모델에 손 하나도 대지 않고 지시만 내렸다고 하더라고. 그래픽도 완전 멋있지. 그런데 그 팀 애들 중에 복수 전공하는 미대생 있잖아. 걔가 아는 대학원생 오빠들이 다 해준 거래. 3D 프로그램으로 동영상 만드는 사람들이 해주는 그래픽을 어떻게 당해내겠냐? 솔직히 나는 그 작품이 걔네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봐. 모델도 그렇고, 그래픽도 그렇고, 직접 한 게 거의 없잖아. 솔직히 그 디자인도 본인의 아이디어인지 의심스러워. 비슷한 디자인을 무슨 공모전에서 본 것 같기도 하거든. 아니면 말고.


작가의 죽음

68혁명이 일어나기 한 해 전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작가의 죽음The Death of the Author’을 선언한다.1 바르트는 작가란 근대에 들어와서야 나타난 개념이라고 말한다. 중세가 끝날 무렵, 근대 철학과 종교 혁명을 통해 ‘개인’이라는 관념이 탄생한다. 여기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까지 더해지면서 개인적 주체인 작가는 모든 텍스트의 주인이 된다. 문자의 제국에 군림하는 작가는 작품에 대해 아버지의 권위를 넘어 종교적인 신성마저 갖는다. 하지만 실상 그 어떠한 작품도 작가가 만들어낸 새로운 창조물이 될 수 없다. 알고 보면 모든 텍스트는 이전에 존재했던 수많은 원문의 인용의 재인용이며 무한한 모방일 뿐이다. 작가가 부여한 작품의 원본성은 실제로는 완벽한 허상이다. 오늘날 작가의 자리는 서술자scriptor가 물려받는다. 서술자는 거대한 텍스트의 사전에서 단어들을 끌어내 다른 누군가의 언어로 부연하는 자다. 작품에 선행하는 작가와 달리 서술자는 텍스트와 동시에 태어난다. 글쓰기는 더 이상 특정한 기록, 표현, 묘사가 아니다. 이제 언어 그 자체 이외에 텍스트는 그 어떠한 기원도 갖지 않는다. 텍스트에는 작가의 인생도, 열정도, 고뇌도 없다. 작가의 죽음과 함께 텍스트에 내포된 신화도, 작가의 존재에 기대어오던 문학의 비평도 전복된다.

작가의 죽음은 비단 문학에서만 나타난 사건이 아니었다. 20세기 들어서 예술의 전 분야에서 작가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진다. 1940년대 중반, 셰페르Pierre Schaeffer는 연주자를 위한 음악이 아닌 소리 그 자체를 위한 음악을 시도한다. 그는 이미 연주된 악기나 음악, 심지어는 사람들의 대화나 자연의 소음에서 음악을 만들어낸다. 이집트에서 할림엘-답Halim El-Dabh은 고대 종교 의식을 테이프에 녹음하고 그 소리를 조작하여 만든 음악을 선보인다. 이들이 개발한 샘플링sampling이라는 기법은 작곡가의 악보나 음악가의 연주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에서 음악이 만들어진다. 그들에게 음악은 창작이 아니라 발견과 조합이었다. 작가의 죽음이 없었다면 이들의 실험에 영향을 받은 오늘날의 일렉트로닉이나 힙합과 같은 대중음악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술계에서 작가의 죽음은 이미 20세기 초에 예견되었다. 1917년 뒤샹Marcel Duchamp은 상점에서 사온 변기를 전시회에 출품하면서 화장실 용품 제조업자의 이름 ‘R. Mutt’를 새겼다.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의 변기는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작품이 된다. 1919년 뒤샹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모나리자의 복제품을 사와 콧수염을 그리고 ‘L.H.O.O.Q’라는 제목을 붙인다(그림1, 2).2 뒤샹 이후로 미술계에서 작가는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한다.

뒤샹의 개념을 이어받아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전성기를 연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작업 이후 작가의 권위에 기대는 ‘숭고sublime 미학’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대신 허상과 복제가 지배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 미학’의 시대가 도래한다. 더 이상 예술을 만드는 주체는 없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창작의 역할을 타자에게 전가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제 바르트가 선언한 작가의 죽음은 충격적인 도발이 아니라 진부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작가 없는 정원

졸업 후 일을 시작한 지 2년 정도 된 마사 슈왈츠Martha Schwartz는 1979년 어느 날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깜짝 파티를 해주기 위해 자신이 살던 아파트 앞마당에 작은 정원을 만든다.3 정작 조경가였던 남편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이 정원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젊은 슈왈츠는 조경계의 화려한 주목을 받게 된다. 몇 평 되지도 않는 정원이 그토록 화제가 되었던 이유는 슈왈츠가 선택한 ‘재료’에서 찾을 수 있다. ‘베이글 가든’이라는 이름처럼 정원 가장자리의 보라색 자갈 위에 80여 개의 베이글이 깔려있다. 이 베이글들은 작가가 방수처리를 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가게에서 파는 베이글 그대로다. 슈왈츠는 60년 전 뒤샹이 그랬던 것처럼 대량 생산되어 판매되는 베이글로 정원을 만듦으로써 설계가의 권위를 파괴한다(그림3).

1988년, 슈왈츠는 ‘베이글 가든’에서 선보인 팝아트적인 시도를 확장한다. 슈왈츠는 한 쇼핑센터의 조경 설계를 맡게 된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제안한 설계의 초점은 공간적 구성이나 이용보다도 350마리의 황금 개구리에 맞추어져 있다.4 모든 맥락을 무시하고 그리드 형태로 균일하게 배치되어 공간을 지배하는 개구리들은 슈왈츠가 직접 만들지도 형태를 고안하지도 않았다. 공장에서 생산되어 쇼핑센터로 운반된 뒤 배치되었을 뿐이다. 10년 전의 작은 정원의 베이글의 역할을 쇼핑몰의 개구리가 수행한다(그림4).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뒤 슈왈츠는 베이글 가든과 리오 쇼핑센터에서 보여주었던 레디메이드의 전략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그녀는 개념 미술conceptual art의 아이디어를 빌어 그때까지 설계가가 맡아오던 역할에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뒤샹이 예술의 고전적인 가치를 파괴한 이후로 예술은 스스로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만 했다. 그 고민 끝에 제시된 한 가지 해답이 개념 미술이다. 1960년대에 등장한 미니멀리스트들은 레디메이드의 개념을 극단적으로 추구하여 실제 사물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작품을 선보인다. 미니멀리스트였던 버긴Victor Burgin은 작품이 다른 요소들과 다를 바가 없다면 왜 굳이 작품을 쓰는지 반문한다.5 예술의 본질은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이 아니라 오히려 작품에 대한 생각이 아닐까? 1963년 키엔홀츠Edward Kienholz는 ‘개념 타블로Concept Tableaux’ 라는 작품을 통해 예술이 개념 상태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1966년 보크너Mel Bochner는 작품이 아니라 여러 작가들의 드로잉과 구상을 복사한 노트를 전시했다. 전시된 대상은 완성된 예술이 아니라 예술의 개념들이었다. 1968년 솔 르윗Sol LeWitt은 월 드로잉Wall Drawing 연작을 구상한다. 솔 르윗은 월 드로잉을 그리기 위한 개념적 가이드라인과 다이어그램을 제시하였을 뿐 작품을 직접 그리지 않았다. 작품은 인부들이 완성한다. 월 드로잉에서 작가는 더 이상 작품의 유일한 창작자가 아니다. 작품에 대한 개념과 구상의 주인일 뿐이다(그림5, 6).

슈왈츠는 2009년 벨기에에서 열린 정원 축제에서 ‘가든 게임Garden Game’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6 그녀는 정원을 구상하면서 그 어떤 도면도, 스케치도 그리지 않았다. 단지 정원을 만드는 규칙을 이메일에 써서 벨기에로 보냈을 뿐이다. 슈왈츠가 보내준 규칙대로 주사위를 던져 만든 생울타리 미로가 완성된다. 그리고 무용수들이 주사위, 돌림판, 끈, 말뚝으로 또 다른 게임을 진행하며 35개의 화단의 위치를 결정한다. 그 후에 시공 인부들이 다시 주사위와 돌림판을 사용하여 무용수들이 정한 위치에 놓인 화단을 채워나간다. 슈왈츠는 개념 예술가들이 사용했던 방식을 통해 정원을 완성한다. 이 때 슈왈츠는 고전적 의미의 설계를 하지 않았다. 규칙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작품의 주체는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규칙을 제시한 슈왈츠에서, 화단의 위치를 정한 무용수로, 그리고 정원을 마무리한 인부들로(그림7).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월간 환경과조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