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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종의 기원
  • 환경과조경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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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 은행나무 | 2016

 

악惡은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악에 대한 사람의 호기심은 왜 이다지도 강렬할까. ‘희대의 살인마’, ‘인면수심의 악마’, ‘사이코패스’ 등 점점 자극적인 수식어를 달고 TV나 신문에 큼지막하게 등장하는 범죄자의 무심한 시선을 볼 때면, 얼굴을 가린 마스크를 슬며시 내리고 그 뒤에 숨은 표정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범죄자의 얼굴을 확인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한 색다른 정보를 읽어 내거나 보복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도. 이 싸구려 궁금증을 당장 채우지 못하는 답답함에 ‘범죄자의 인권을 보호해줄 필요가 있나? 우리나라는 범죄자에게 너무 관대해’라며 가볍게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다. 우리와 닮은 평범한 얼굴일 범죄자의 표정과 인상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은 범죄에 대한 분노일까, 혐오일까,

아니면 원초적인 호기심일까? 우리는 범죄자의 얼굴에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정유정의 소설은 악에 대한 우리의 원초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준다는 점에서 독자를 단숨에 휘어잡는다. 그동안 우리 문단에서 ‘범죄’라는 소재와 반전을 거듭하는 극적인 이야기 구조는 장르물의 영역으로만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정유정은 장르물적인 소재와 스토리텔링 방식을 따르면서 한국 문학 판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정유정은 요즘 국내 소설가 중 가장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최근작들만 놓고 보았을 때, 정유정만큼 화제작을 연달아 내놓는 작가는 드물다. 물론 올해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몇 달째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문학평론가 노태훈은 대담하고 유머러스한 필치로 『릿터』 창간호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최근에 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읽었을까? 만약 읽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하자. 그 책은 당신이 읽기에 조금 어렵다.”

 

오랫동안 ‘악’의 문제를 탐구해온 정유정은 최근작 『종의 기원』에서 순수한 ‘악’에 가장 가까운 캐릭터를 창조했다. “등단작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에서는 정아의 아버지로, 『내 심장을 쏴라』에선 점박이로, 『7년의 밤』에서는 오영제로, 『28』에서는 박동해로. 매번 다른 악인을 등장시키고 형상화시켰으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목이 마르고 답답했다.” 정유정은 『종의 기원』에서 악인을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내면의 본성적인 악의 기원에 깊이 침잠한다. 소설의 주인공 한유진이 피투성이 상태로 깨어나는 첫 장면에서 독자는 이미 범인과 결말을 예측하게 되지만 이야기 전개는 전혀 지루하지 않다. 1인칭 시점으로 사건의 전말을 더듬어 가는 주인공 내면의 일렁이는 파도가 시시각각 독자를 덮쳐오기 때문이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자기 합리화로 일관하며 쾌락을 느끼기까지 하는 유진의 범죄 장면에서 왜 우리는 눈을 뗄 수 없을까. 소름끼치도록 황량하고 공허한 유진의 독백에도 연민과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다. 알아야 했다. 단서들을 조합한 추리 같은 건 의미가 없었다. 오로지 나 자신에게 들어야 했다. 내 안에 나라고 믿는 나 말고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지, 그 ‘누군가’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모르고는 세상 속에서 살아갈 길이 없었다. 아는 순간, 지옥문이 활짝 열린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 내 인생이 송두리째 엎어진다 해도.” 유진은 도망가고 싶고 회피하고 싶은 진실의 문 앞에서 후퇴 대신 전진을 선택한다. 비록 용서할 수 없는 악인이지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끌고 나가고자 하는 끈질긴 삶의 의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느껴진다.

 

소설의 배경과 캐릭터 설정을 디테일하고 섬세하게 그려내는 정유정은 이번에는 소설의 배경으로 ‘군도’라는 신도시를 창조했다. 『여성중앙』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시화호를 소설의 모델로 삼고 아주 초창기 송도신도시의 모습을 입혔다”고 말했다. 소설에서 군도신도시는 입주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입주가 절반도 채 이루어지지 않은 도시다. 상권이나 교통, 공공시설 등의 생활 인프라도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외딴 베드타운이다. 공허하고 메마른 주인공의 내면처럼 도시도 텅 빈 황량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어머니에 대한 분노, 친구 해진에 대한 질투와 애정, 이모에 대한 혐오로 뒤섞인 주인공의 내면만큼이나 도시는 우후죽순 들어선 빌딩으로 인해 어수선한 풍경이다. 신도시를 배경으로 새로운 종의 악인이 탄생하는 알레고리가 흥미롭다. 새로운 ‘종’으로 태어난 유진이 강렬한 의지로 삶의 첫 걸음을 내딛는 것처럼, 여러 가지 도시 문제를 껴안고 세워진 우리의 신도시들은 도시로서 기능하기 위해 치열한 의지와 노력을 들이고 있을까. 덧붙이자면, 『환경과조경』의 다음 달 특집은 ‘광교신도시’(가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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