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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 환경과조경 2024년 2월

나무쟁이. 친구가 조경학과에 입학한 나를 핸드폰에 저렇게 저장해 두었었다. 대학생이 됐다는 사실 그 자체에 기뻤기에 그냥 웃고 말았다. 꼬인 구석 없던 신입생 시절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새싹튼 열등감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조경학이 조리경영학의 준말이냐고 진지한 얼굴로 묻고 장난스럽게 길에 선 모든 나무의 이름을 물어볼 때, 친척이 요새는 무슨 나무를 심어야 비싸게 팔 수 있냐고 추천을 해달라 할 때마다. 특히 화분에 심은 식물이 왜 죽는지 물어올 때면 짜증이 났다. 내가 다루는 세계가 광활한 도시 시스템과 공원에서 한 그루의 나무로, 마침내는 화분에 심긴 작은 식물로 작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찌됐건 좋아하는 식물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계수나무를 예뻐하게 됐다. 학생회관 앞 가로수로 심긴 계수나무는 쭉쭉 뻗은 수형과 달리 아기자기한 구석이 있다. 그 귀여운 면모를 보려면 가지에서 막 초록빛이 보이기 시작할 때 까치발을 들어야 한다. 동전만 한 작은 잎은 한 쪽이 조금 뾰족한 동그라미인데, 하트보다는 심장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 그 모양 그대로 점점 커져 손바닥만치 자란다. 노랗게 단풍이 들면 잎에서 향기가 난다. 꽃을 보는 재미는 덜하다. 꽃이 다 피어도 꼭 꽃봉오리를 다 열지 못한 모양이라 가지 끝에 보얗고 말간 분홍 물감을 흐리게 발라놓은 것 같다. 형태보다 색으로 느껴지는 신기한 꽃이었다.

 

조경학과 학생이라면 무릇 (졸업을 하고 싶다면) 수목학 수업을 들어야 했다. 학생 대부분이 나무를 모르는 초짜라 그에 걸맞은 과제가 주어졌다. 나무 열 그루를 정해서 수목 관찰 일기 쓰기.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성실하기가 가장 힘들다는 걸 알게 됐다. 밀린 방학 숙제를 울며 하던 초등학생 시절의 나를 또 다시 만났다.

 

수목학 시험은 우리를 다른 학과생의 구경거리로 만들었는데, 독특한 시험 방식 때문이었다. 조교가 교내의 나무 중 스무 그루를 선정해 번호표를 붙여놓으면, 줄지어 서 답안지에 1번부터 20번까지의 나무 이름, 학명, 음수와 양수를 구분해 적었다. 커닝을 방지하기 위해 조교들은 학생끼리 일정 간격을 두도록 관리했다. 30여 명이 개미처럼 느리게 한 줄로 움직이니 꽤 볼만한 구경거리였을 거다. 잔혹한 점은 이 시험이 겨울(잎이 없다!)에 치러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치 수목학’과 ‘잎 줍기’ 스킬을 개발했다. 위치 수목학은 말 그대로 나무의 특징 대신 위치를 기억하는 거다. “제1공학관 모퉁이에는 병꽃나무 다섯 그루, 그 옆에 큰 나무는 수수꽃다리” 같은 식으로. 이렇게 시험을 쳐서 뭐가 남나 싶었지만 돌아보니 어떤 나무를 무슨 용도로 심는지, 어디에서 자라나는지, 어떤 나무와 이웃해야 서로 해를 끼치지 않는지를 알게 된 것 같다. 잎 줍기는 잎 없이 맨둥맨둥한 나무 앞에 섰을 때 당황하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잎을 줍는 기술이다. 잎만으로 나무를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수피나 가지가 자라난 모양 만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나는 잎이 없는 참나무 앞에서 잣나무 잎을 주웠고, 활엽수랑 침엽수도 구분 못하는 바보가 됐다.

 

입학할 당시만 해도 식물에 별 관심 없던 동기들은 어느 날부터 회양목에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을 보면 화를 냈다. 골프를 치러 다니는 친구 이야기를 들을 때면, 죽으면 구름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골프 즐기는 제자의 머리에 번개를 꽂아주겠다던 한 교수님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식물을 좋아(사랑까진 아닌 것 같다)하게 되며 옅어지는가 싶던 열등감은 도시과학대학 공동작품전에서 건물 외부에 거대한 공원을 설계한 건축학과의 작품을 보고 불안감으로 변했다. 그래서 식물을 계속 생각해야 하는 것 같다. 설계 스튜디오에서 식물 없이 설계를 해보고 싶다는 동기의 말에 교수는 이곳에 식물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납득시킬 수 있다면 해도 좋다고 했다. 교수를 설득하라니, 당시에는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렸지만 지금은 그 공간을 조경가가 설계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라는이야기로 느껴진다. 식물이 필요한 이유를 알아야 식물이 없어도 되는 이유도 알 수 있을 테니까. 이성복 시인은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42쪽)고 말했지만, 주어진 대상지에 식물이 필요한지 아닌지 고민하는 조경가의 고통은 분명 지구 어딘가를 푸르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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