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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땅에 쓰는 시
    2024년 봄은 1941년생 여성 조경가, 정영선(조경설계 서안)의 계절이다. 지난 4월 5일, 그가 직조해온 수많은 경관의 설계 도면과 모형, 사진과 영상, 기록과 자료를 한자리에 모은 전시회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24년 9월 22일까지)가 개최됐다. 4월 17일에는 그의 조경 인생과 대표작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감독 정다운)가 전국 주요 극장에서 개봉됐다. “선유도공원, 양재천, 예술의전당 등 내 인생의 중요한 공간들이 정영선 선생님의 손길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운명과도 같았다.” 전작 ‘이타미 준의 바다’(2019)와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2020)를 통해 건축 다큐멘터리스트로 자리매김한 정다운 감독은, “자연의 생명력을 전하고 지키기 위해 줄곧 노력해온 조경가 정영선의 철학”에 큰 감명을 받아 영화를 통해 “자연의 복원과 치유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영화의 주연 역할을 하는 장소는 정영선 조경의 정점인 선유도공원이다. 영화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다시 봄으로 계절을 순환하며 선유도공원의 공간감과 시간성을 포착한다. 영화는 선유도공원을 플랫폼 삼아 계절마다 들고나며 정영선의 다른 작업들, 이를테면 호암미술관 희원, 서울 아산병원, 여의도샛강생태공원, 경춘선숲길,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에 펼쳐진 경관 미학을 재구성한다. 선유도공원은 폐기된 정수장의 구조와 기억을 살린 ‘발견의 디자인’으로 한국 공원 설계의 새 지평을 열었다. 선유도공원에서 우리는 한숨에 다가오는 한강의 풍경과 냄새, 살갗에 와 닿는 서걱한 강바람, 울퉁불퉁한 시멘트 기둥의 생살과 지워지지 않는 물 얼룩의 물성, 옛 시간의 흔적과 새로운 녹색 생명체가 동거하며 빚어내는 경이의 미감을 마주한다. 역동하는 선유도공원의 정동을 담아내면서 영화 ‘땅에 쓰는 시’는 대지에 얽힌 이야기를 읽고 경관의 맥락을 엮는 정영선 특유의 작업 태도에 주목한다. 관객의 시선을 붙드는 또 다른 주연 공간은 정영선의 검박한 들풀 마당이다. 영화는 그에게 위로를 건네는 내밀한 정원이자 야생 풀꽃의 성장을 돌보고 가꾸는 개인 실험실이기도 한 양평 집 마당을 계절별로 관찰한다. 자신의 시그니처 식물 소재인 미나리아재비, 병아리꽃나무, 쑥부쟁이와 대화하는 할머니 조경가의 일상. 이 영화가 아니라면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나는 ‘연결사’라고 보면 돼.” 양평 집 처마 밑 탁자에서 식재 디자인 개념을 파스텔로 스케치하면서 그가 던지는 이 짧은 문장은 자신의 조경론을 요약하는 표현이자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다. “조경가는 연결사”라는 간명한 정의에는 ‘지사(地史)’와의 관계, 시공간적 맥락과의 관계, 주변 경관과의 관계, 도시 조건과의 관계를 연결하는데 남다른 가치를 두는 그의 태도가 압축되어 있다. 연결의 태도는 생각이나 말에 머무르지 않는다. 지형과 식물을 매개로 현실의 경관에 실천된다. 영화 제목으로 쓰인 ‘땅에 쓰는 시’는 관계와 맥락을 읽고 잇는 ‘연결의 조경’의 다른 표현일 테다. 자칫 낭만적으로 해석될 법한 이 표현은 조경가가 젊은 시절 시인을 꿈꾸었다거나 감성적 디자인을 지향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음에 인용하는 정영선의 글 몇 구절에서 우리는 그의 조경이 ‘땅에 쓰는 시’인 까닭을 헤아릴 수 있다. “[경관은] 글자의 선택과 배열, 호흡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시’처럼 세심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환경과조경』 137호, 131쪽).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듯, 우리가 섬세히 손질하고 쓰다듬고 가꾸는 정원들이 모든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치유와 회복의 순간이 되길 바랍니다”(『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 107쪽). 『환경과조경』은 한국조경가협회와 함께 오는 7월 3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조경가 정영선의 삶과 작업을 통해 한국 조경 50년의 성과를 조회하는 심포지엄,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를 연다. 발제문과 토론은 8월호 지면에 담을 예정이다.
  • [풍경감각] 소란한 스크린
    한적할 것 같은 오후 버스에 의외로 사람들이 꽤 있다.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 맨 뒷좌석에 올라 앉는다. 곧바로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켜 친구와 만날 장소로 가는 경로를 비교한다. 지하철로 환승해 빨리 도착할 수 있는 루트와 지금 이 버스를 타고 쭉 가는 느린 방법이 있다. 지하철 배차 시간을 확인한다. 열차를 놓치면 오히려 더 늦을 것 같아 버스에 남기로 한다. 친구에게 도착 예정 시간을 알려준다. 이제야 고개를 들고 버스 안을 찬찬히 살핀다. 바닥에는 햇살이 나른히 내려앉고 라디오 DJ의 웃음이 엔진 소리에 섞여 든다. 승객들은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에 눈을 고정하고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폰을 본다. 알록달록한 게임이 뿅뿅거리고 카카오톡의 노란 말풍선과 인스타그램의 빨간 하트가 오간다. 유튜브 썸네일 속 굵은 글씨들이 손가락을 따라 쭉쭉 미끄러진다. 액정 위로 창밖 풍경이 비친다. 어느새 무성해진 가로수의 녹색 그림자가, 파란 하늘과 하얀 양털 구름이 소란한 스크린 위를 스쳐간다. 예쁜 계절이 와 있었구나. 친구에게 산책을 하자고 톡을 해야지. 다시 휴대폰을 꺼내든다. 노란 말풍선을 보낸 뒤, 습관처럼 인스타그램 피드를 살피고 트위터에 답 멘션을 달고 새로 올라온 웹툰을 본다. 아차, 내릴 정류장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 음성이 들린다. 내 휴대폰 위로 어떤 풍경이 스쳐갔을까. 궁금하지만 나를 향해 달려들던 풍경들은 등 뒤로 질주해버린 다음이다. 하차벨을 누르자 빨간 불이 들어온다. 버스가 멈춰 선다. 계단을 내려간다.
  • 정영선, 땅에 귀 기울여온 그 작업의 궤적
    한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은 국토개발기술사(조경)를 취득한 최초의 여성 기술사다. 1970년대 대학원생시절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조경 활동을 펼쳐온 그는 대통령국민포장, 세계조경가협회상, 미국조경가협회상, 한국건축가협회상, 김수근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지난해에는 제59차 세계조경가대회에서 2023 제프리 젤리코 상(IFLA Sir Geoffrey Jellicoe Award 2023)을 수상하기도 했다. 심사위원단과 IFLA 의장은 “정영선은 조경 분야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탁월한 업적을 이룬 전문가이며 서양에서 유래된 낯선 개념의 조경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번역해냈다. 또한 청계천 복원, 선유도공원 등의 프로젝트를 통해 자연과 도시의 조화를 추구하고, 건조 환경에 자연의 과정을 통합하며, 과거 산업 유산을 지우기보다 새로운 디자인의 일부로 만드는 세계적 트렌드를 예측해 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러한 작업에서 오늘날 조경 분야의 주요 관심사인 회복탄력성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읽어낼 수 있다. 정영선의 작품은 세계적 영향을 끼쳤고 조경 직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평했다. 정영선은 땅과 자연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바탕으로 다채로운 작업을 해왔다. “‘어떤 시를 여기에다 놓으면 좋을까?’라는 정영선의 말처럼 그녀의 조경 작업은 그에 어울리는 이름과 운율과 이야기를 되찾아주는 일이기도 하다”(배주연 서울독립영화제 2023 예심위원, ‘땅에 쓰는 시’ 프로그램 노트 중). 정영선의 설계 능력과 시적 감성, 50여 년간 쌓아온 전문성을 엿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4월 5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가 개최됐다. 정영선의 반세기에 걸친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개인전으로, 대표작을 비롯해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다수의 아카이브를 포함하고 있다. 4월 17일에는 정영선 조경가를 다룬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영화사 진진, 정다운 감독, 김종신 프로듀서 제작)가 개봉했다. 제20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고, 제49회 서울독립영화제 장편 쇼케이스 부문에 공식 초청되는 등 작품성을 이미 인정받은 영화다. 정영선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전시와 영화를 지면에 중계한다. 정리 김모아, 금민수 디자인 팽선민 자료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영화사 진진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주최 국립현대미술관 후원 까르띠에, 소전문화재단 작가 정영선 작품수 500여 점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7전시실, 전시마당, 종친부마당 기간 2024. 4. 5. ~ 9. 22. 땅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4월 5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조경가 정영선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정영선: 이 땅에 숨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이 개최됐다. 파스텔, 연필, 수채화 그림, 청사진, 설계 도면, 모형, 사진, 영상 등 정영선의 60여 개 프로젝트에 대한 500여 점의 각종 기록 자료가 한 자리에 모였다.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어 보기 힘들었던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최초로 공개되는 아카이브가 다수 포함되어 있어 큰 관심을 모았다. 그 기대를 보여주듯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관람객이 개막식을 찾았다. 정영선은 많은 이의 축하에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도 조경이 발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불어 땅을 돌보는 방법을 잊어버리는 것은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인사말을 전했다.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는 정영선이 좋아하는 신경림의 시에서 착안한 제목이다.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위하여 / 더불어 숨 쉬고 사는 모든 것을 위하여 / 내 터를 아름답게 만들겠다 죽어간 것을 위하여 …… 산과 더불어 바다와 더불어 강과 더불어 / 나무와 풀과 꽃과 바위와 더불어 / 짐승과 새와 벌 나비와 더불어”와 같은 시 구절에서 땅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정영선의 태도를 느낄 수 있다. 그에게 조경은 미생물부터 우주까지 생동하는 모든 것을 재료로 삼는 종합 과학 예술이다.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정영선은 늘 우리 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고유 자생종의 생물 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지사적 맥락, 일곱 개 묶음 정영선이 폭넓은 작품 세계를 펼쳐온 만큼 분류와 정돈이 필요했다. 전시를 기획한 이지회 학예연구사(국립현대미술관)는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디자인해온 정영선이 반세기에 걸쳐 낳은 수많은 유형의 작업 중 자료가 충분하고 관객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60여 개의 프로젝트를 엄선했다. 조경설계 서안 사무실 지하에서 발굴한 자료부터 각종 협력사가 제공해준 자료, 또 새로 제작한 자료까지 총 517점의 전시품을 마련했다. 이지회는 “조경이라는 살아 있는 움직이는 대상을전시로 담는 과정은 대단히 도전적이었다. 하지만 정영선 작가의 ‘최선을 다하면 살 길이 있다’는 말에 용기를 내고 미술관 디자이너 등 전문가와 방대한 자료를 짜임새 있게 구성하는 방법을 정리했다”고 밝혔다. 이지회는 먼저 계절에 따라 매순간 변화하는 공원과 정원의 시간성을 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전시장 상부에 정다운·김종신 감독(기린그림)의 파노라마 영상을 흘려 움직이는 시간을 보여주었다. 관객의 시선이 머무르는 벽에는 정지현, 양해남, 김용관, 김종오, 유청오 사진가의 앵글에 담긴 절경이 펼쳐진다. 한국 전통 정원의 방지에서 영감을 받은 바닥장과 테이블장에는 각 프로젝트의 설계 과정과 세부 내용을 엿볼 수 있는 기록 자료를 담았다. 바닥장은 땅을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정영선의 작업처럼 관람객도 땅 가까이 몸을 낮추어 작품을 감상하도록 유도한다. 전시는 국가 주도의 공공 프로젝트, 민간 기업이 의뢰한 정원과 리조트, 역사 쓰기의 방법론으로써 기념비적 조경, 식물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수목원과 식물원 등 주제와 성격에 따라 작업을 분류했다. 일반적인 연대기적 서술 방식을 택하지 않았는데, 이는 경제 부흥과 민주화 과정이 동시적으로 발현된 한국 현대사의 특징과 맥을 같이한다. 또 수많은 유형의 작업이 공통적으로 정영선이 강조하는 ‘지사地史적 맥락’, 즉 땅의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시는 크게 일곱 개 묶음으로 구성된다. 정영선의 조경처럼 경계가 느슨한 최소한의 구획만 두어 관람객이 스스로 프로젝트의 맥락을 읽어 내기를 유도했다.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없는 주제들을 우연히 마주치고 그 주제들이 포개지는 순간을 목격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전시장을정원 산책하듯이 거닐며 정영선이 도시 속 자연적 환경을 설계한 맥락과 그 과정에서의 고민, 그의 예술적 노력을 발견할 수 있다. 더불어 이러한 사유와 철학을 조경 직능을 넘어 자연과 더불어사는 삶을 추구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환원하고자 했다. 일곱 개 묶음이 담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첫 번째 묶음 패러다임의 전환, 지속가능한 역사 쓰기 땅의 기억과 역사를 기념하는 장소 만들기의 현장이 된 작업을 소개한다. 건물과 주변 환경을 연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법론으로서 조경의 역할이 드러나는 프로젝트들이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채움에서 비움으로 인식의 전환을 시도한 사례들을 만나볼 수 있다. 국가적 상징성을 강조한 작업에서는 기념비적 축을 활용해 공간 위계를 세운 사례가 돋보인다. 대부분 중심축이 강한 공간 구성을 짰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맥락에 따라 구체적 제안에 차이가 드러난다. 독립기념관 명소화(1994~1996) 계획안에서 기존 공간의 경직성을 완화하기 위해 경관적 볼거리를 여러 차원의 규모로 제시했다면, 탑골공원(2001) 재정비에서는 슬럼화되어가는 문화 유적지에 틀을 세우고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광화문광장(2009)에서 역사의 켜가 쌓인 육조거리의 정신을 이어 사람 중심의 비움의 미를 선사했다면, 실현되지 않은 용산공원(2011) 공모안은 한 세기 동안 잃었던 땅을 회복하고 그간 쌓인 공간의 흔적을 자생적 방법으로 살리는 방식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유일하게 조선인의 자본으로 건설된 철길을 공원화한 경춘선숲길(2015~2017)은 역사를 기념하고 이웃 공동체와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조경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 작업이다. 설계의 핵심은 철길을 대하는 태도였다. 지역 사회와 도시적 맥락에서 경춘선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풀어나갔다. 철길, 철교 등 남겨진 근대 산업 시설은 물론 주변 녹지까지 보존을 원칙으로 삼고, 공원은 지역 주민의 일상 공원으로 환원하고자 했다. 마을의 뜰을 주제로 한 정원, 산책로, 공동체 정원을 주제로 한 과실수와 텃밭, 화랑대 역사를 문화재로 보존한 철도역 공원 등이 조성됐다. 다양한 변화를 겪은 경춘선숲길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많은 방문자가 찾는 명소가 되었으며, 선유도공원(1999~2001)과 함께 산업 시설을 공원화해 조경설계가 도시재생과 지역 활성화를 촉진한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두 번째 묶음 세계화 시대, 한국의 도시 경관 서울아시안게임, 서울올림픽대회, 대전엑스포 1993 같은 메가 이벤트는 늘 우리의 도시 경관을 바꾸어 놓았다. 한국을 찾는 세계인에게 선진국의 인상을 주기 위해 도시 경관 재정비 프로젝트가 동원됐기 때문이다. 대형 국가 주도 프로젝트에서 조경가는 도시의 비전을 제시하고 인공적인 개발 사업에 땅의 논리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프로젝트를 계기로 교직에 있던 정영선이 본격적으로 조경설계 현장에 뛰어들었고 조경설계 서안(이하 서안)을 창설(1987)한다. 서울아시안게임은 2년 뒤 이어 열릴 서울올림픽대회의 개최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국가적 심혈을 기울였던 행사다. 정영선은 아시아선수촌 아파트·아시아공원(1986), 올림픽선수촌아파트(1988)의 조경을 맡아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주거 환경을 제시했다.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5,540세대를 위한 주거 시설과 부대시설을 포함한 상가동으로 구성되며, 방사형 선수촌 건물이 계단식 스카이라인으로 연결돼 독특한 경관을 이룬다. 대회가 끝난 뒤 아파트를 대단위 주거 단지로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두어, 기념성과 상징성을 갖춘 축제의 장으로 만들되 주거 단지로서 쾌적한생활 환경을 갖추는 데 집중했다. 특히 서안은 성내천과 탄천이 합류하는 곳을 복개, 재정비하고 교량을 설치해 수변 경관을 갖춘 중앙공원으로 조성했다. 한국종합무역센터(1987)와 대전엑스포 1993 박람회장(1993), 인천국제공항(2001) 같이 국가의경제 발전, 무역 진흥, 국제 교류, 기술 도약 등 과제를 위한 대규모 복합 시설의 옥외 공간에는한국적 색채가 드러나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대전엑스포 1993은 21세기 국가의 비전과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하는 박람회였다.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축제 분위기를 만들면서도 한국의 전통적 요소와 과학 발전의 면모를 조화롭게 선보여야 했다. 서안은 첨단 시설과 인공물 위주의 엑스포 옥외 공간과 어울리는 숲과 꽃을 살려 휴식 장소를 조성하고 안압지 형태의 수공원, 무궁화 동산 등을 마련했다. 소나무, 느티나무를 비롯해 한국 향토 수종인 87종의 교목과 관목 28만 8천 주, 초화류 64만 본을 심고, 1만 8천 평의 잔디밭을 조성했다. 행사 이후 엑스포를 위해 건립한 한빛탑 전면부를 개선하는 사업을 맡아 탑을 도시의 상징적 보행축과 연결했는데, 기존 공간 구도를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시설물에 꽃, 나무, 물, 조명, 음악을 채워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세 번째 묶음 자연과 예술, 그리고 여가 생활 1980년대, 경제 성장에 따른 생활 방식의 변화로 여가 장소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자연환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생기며 도시 외곽에 예술, 교육, 체육, 관광을 아우르는 문화 기관과 레저 시설이 계획됐다. 정영선은 이러한 공간의 조경을 맡아 기능과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한국 고유의 지향과 땅의 맥락을 읽는 작업을 진행했다.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하는 것은 물론 자연의 자생적 힘을 북돋는 생태적 복원을 시도했다. 충청북도 자연학습원(1981)과 어린이대공원 환경공원(1998)이 미래 세대의 환경 교육을 위한 야외 학습 장소의 성격이라면, 예술의전당(1988)과 국립중앙박물관(2005)은 예술과 문화 증진을 위한 국가적 상징성을 가진 곳이다. 정영선과 서안은 건축과 대지의 관계를 면밀히 디자인해 옥외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예술의전당에서는 남쪽의 우면산으로부터 내려오는 경사진 땅의 높낮이를 활용해 기능적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전체 단지 계획은 공원 개념에서 출발한다. 외부 공간의 명확한 특성을 규정하고 보행 위주의 동선 체계가 적용됐다. 덕분에 내외부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옥외 공간은 축제와 행사가 열리는 장이 되었다. 도투락월드(1990), 휘닉스파크(1995), 마우나오션리조트(1999)는 스포츠 시설과 접목된 산악형 리조트다. 한국 국토의 80%가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지형적 특성을 고려한 설계를 선보였다. 네 번째 묶음 정원의 재발견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온 한국 고유의 식재, 경관, 공간 구성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정원을 소개한다. 정영선의 정원은 땅의 생김새와 성격에 부합하는 바라봄의 경험, 경치를 조망해가는 수행적 요소에 가치를 둔다. 나무나 꽃을 식재할 때도 관상적 가치를 넘어 생태적 특성과 형태,식물이 내재한 의미를 고려한다. 더불어 한국의 들과 산에 자생하는 야생화와 수목을 주로 심어자연스럽게 자라난 정원을 추구해왔다. 전통 정원의 대표격인 호암미술관 희원(1997)은 정영선이 전통 정원의 요소를 본격적으로 구사한 작업이다. 조경가 개인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지만, 희원은 한국 정원에 담긴 전통의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고 조경의 담론으로 올려놓는 계기가 됐다. 넓은 대지 위에 조성된 희원은 자연에 순응하며 내재된 원리를 읽어낸 선조의 미의식을 담고 있다. 담 안의 풍광에 머물지 않는 아름다움, 담 안과 밖의 조망을 잇는 전통 정원 조형미의 근원인 차경의 원리를 바탕으로 옛 지형을 복원했다. “전통 정원의 내적 원리를 재현”한 점진적 경관의 전개는 해동경기원(2006)과 로스앤젤레스 한국정원(2008)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해동경기원은 한국 별서 정원의 시적 운치가 살아 있는 정원으로 불리운다. 이 정원은 약간의 경사와 작은 계곡을 배경으로 두고 있는데, 서안은 이역동적 지형에 어울리는 한국 별서 정원 양식을 적용하며 집과 자연, 일상과 이상, 풍류와 철학 사이의 관계를 맺는 정원을 제안했다. 노후화된 시설을 걷어내고 왜곡된 지형을 본래의 자연 지형으로 회복했으며, 땅의 높이 차이와 전통 건축, 숲에 의해 정원이 감춰졌다 드러나도록 했다.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연속되는 풍경은 공간의 깊이를 더하고 자연과 소통을 끌어내며 정점인 고지에서는 주변의 풍광을 끌어안는다. 또한 현대중공업 영빈관 정원(2010)과 포항 별서 정원(2008)은 바다를 면한 한국 고유의 지형과 해송 숲의 경관을 그대로 담으려 한 사례다. 다섯 번째 묶음 조경과 건축의 대화 조경가와 건축가의 유기적 협업을 통해 탄생한 작업을 다룬다. 한강 상류의 수려한 경관을 담은조안리 정원(2007)은 전통 건축과 한옥에서 영감을 받은 현대식 목조 건축을 품은 정원이다. 오설록 티뮤지엄·이니스프리 제주(2011, 2023)는 녹차밭을 배경으로 둔 공간이다. 네 개 건축물 사이 제주 특유의 오름 지형과 곶자왈 숲을 조성했다. 제주도 경관 및 관리계획(2009)에서는 제주 경관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도민의 삶의 질 향상과 존엄성을 고양하는 경관 관리 방안을 마련했다. 다수의 건축가, 조경가, 도시공학자가 참여했는데, 이들은 도시를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하며 제주 특유의 해민정신을 바탕으로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공존과 평화의 윤리를 추구했다. 남해를 조망하는 언덕에 지어진 골프장 ‘남해 사우스케이프’는 큰 암반과 암석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건축가가 설계한 스파 & 스위트 사이의 암각 동산을 다듬어 바다를 향한 경관을 열고, 돌 틈 사이사이에 풀을 심어 마치 원래 그러했던 것 같은 자연을 연출했다. 도시부터 개인 주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의 작업을 통해 대지와 사람의 관계를 치열하게 고민한 설계자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여섯 번째 묶음 하천 풍경과 생태의 회복 강이 흐르는 곳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습지를 보호하고 도심 속 물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작업을들여다본다. 정영선은 한강 상류의 두물머리부터 하류에서 바다와 만나는 곳까지 다수의 프로젝트를 통해 하천 환경 개선에 힘썼다. 빌딩 숲 사이 야생적인 숲과 습지를 경험할 수 있는 여의도샛강생태공원(1997, 2007)은 서안의손길이 두 차례 닿은 국내 최초의 생태공원이다. 비행장 건립과 한강 개발 계획에 의해 인공 하천으로 전락한 샛강의 생태 환경을 1997년 한강수와 지하철 용수를 활용해 복원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남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는 여의도샛강생태공원 현상공모를 추진했고, 서안은 육상화가 진행 중인 샛강 습지부를 물을 머금을 수 있는 땅으로 전환하는 스펀지 효과를 제시했다. 이를 통해 샛강은 한강과 자연 유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은 도심 내 한강변 중 가장 자연성이 강한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선유도공원(2001)은 정수장을 자연 정화의 장소로 재탄생시킨 작업으로, 국내 최초의 재활용 생태공원이다. 서안은 정수장의 본래 시설이 만든 공간과 땅의 모양을 이해하고, 기존 구조의 틀을 활용해 환경과 교육의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시간에 따라 변화할 공간의 경관을 예측하는 것이 설계의 핵심이었다. 철근 콘크리트의 잔재가 녹음으로 뒤덮일 미래를 상상하며 옹벽으로 둘러싸인 선유도의 하부 둔치를 한강 특유의 생태 환경으로 복원하고자 했다. 정수장은 현재 수생 생물을 활용해 한강물을 생태적이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정화하고 있다. 이는 도시 산업화의 흔적을 자연의 힘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동시대 도시 환경 계획의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이외에도 고속도로 건설로 폐천 부지가 됐던 습지를 활성화한 파주출판도시 경관 계획(2007, 2012, 2014) 등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 기반 시설에 수공간을 주입해 생기를 불어넣은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일곱 번째 묶음 식물, 삶의 토양 정영선은 평생에 걸친 작품 활동을 통해 식물을 가까이하고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삶을 강조해 왔다. 마지막 묶음에서는 다양한 식생을 수집하고 연구하며 교육하는 수목원과 식물원, 자연의치유적 속성이 드러나는 명상과 사색의 장소들을 소개한다. 광릉수목원으로 불리던 국립수목원(1987)은 한국 최초의 산림 생물종 연구 기관으로, 정영선이 설계한 광장은 지금까지도 수목원의 중심이 되는 관상수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남해의 독특한 기후대의 식생을 갖춘 완도식물원(1991)과 화장품의 원료가 되는 식물로 구성한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2019), 성서에 등장하는 식물로 꾸민 왕창교회 작은 정원(2023)은 명확한 주제를 통해 식물의 다양한 면면을 보여준다. 환자와 그의 가족을 위한 서울아산병원의 녹지 공간(2007)과 종교 시설인 원다르마센터(2011)는 마음을 위로하고 몸을 수양하게 만드는 자연의 힘을 보여준다. 명상과 수련이 이루어지는 원다르마센터에는 소박하면서도 영성을 북돋는 성스러운 공간, 위로와 안식을 구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듬어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정영선은 방대한 땅의 흐름을 읽고 수련원의 자리와 자연에 최소한으로 개입하는 길의 형태를 구상했다. 지역에 자생하는 식생을 존중하는 정영선의 태도는 자연의 가치를 해치지 않으려는 한국 전통 정원의 태도와 맥을 같이한다. 전시마당과 종친부마당 정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야외 종친부마당과 전시마당에는 새로운 정원이 조성됐다. 전시마당의 정원은 멀리 보이는 인왕산의 아름다움을 끌어들인다. 돌로 이뤄진 인왕산의 거칠고 힘찬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해 언덕과 자연석을 배치했다. 이로써 화이트큐브에 둘러싸인 추상적인 정원이 미술관 밖의 장소와 연결된다. 양치식물과 내음성이 강한 야생화 등 한국 고유의 자생식물을심었다. 미술관의 뒷마당인 종친부마당은 보물 제2151호인 종친부의 경근당과 옥첩당의 앞마당이자, 공중 보행로로 연결되어 여러 경계가 만나는 곳이다. 이러한 고유한 공간 특성을 드러내고 주변의 경관과 어울리는 정원을 만드는 데 초점을 두었다. 마당 전면부를 낮은 기단으로 정리해 인왕산을 향한 탁 트인 조망을 확보하고, 미술관의 마감과 유사한 석재를 사용하되 관목으로 전통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기존 보행로의 판석도 새로운 패턴으로 다시 배치해 정원을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게 했다. 정리 김모아 땅에 쓰는 시 기획 및 제작 기린그림 배급 및 투자 영화사 진진 감독 정다운 프로듀서 김종신 출연 정영선 장르 다큐멘터리 개봉일 2024. 4. 17.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오기 때문이다.”(각주 1)이처럼 한 사람의 삶을 읽는다는 건 하나의 일생, 즉 하나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세계가 하나의 역사가 된다면 어떨까. 반세기 한국 조경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인물 사전을 만든다고 했을 때 반드시 들어갈 이름을 하나 꼽자면 바로정영선일 것이다. 그의 삶의 궤적을 읽는다는 건 한국 조경의 태동과 도약, 질곡을 살피는 일이라 해도 무방하다. 조경계의 언니로 불리던 늦깎이 대학원생이 세계조경가협회 제프리 젤리코 상을 받기까지의 여정은 두툼한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4월 17일에 개봉한 정다운 감독의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는 그 두툼한 책의 초록抄錄이라고 볼 수 있다. ‘이타미 준의 바다’ 등 건축 다큐멘터리 장르를 개척해 온 정 감독은 여러 작업을 거치면서 건축과 도시 그리고 자연을 연결하는 ‘조경’의 중요성을 인지하게 됐고, 자연의 생명력을 지키는 일에 앞장섰던 정영선의 조경 철학과 작품에 감명을 받았다. 정 감독은 정영선의 삶과 작품을 조명하는 영화로 자연의 복원과 치유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영화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까지 이어지는 사계의 순간을 포착한다. 야생화가 만개한 정영선의 집 앞마당부터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는 대규모 공원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개인 정원 등 다양한 장소를 종횡무진 누비며 각 계절이 지닌 고유한 경치를 온전히 담아낸다. 정 감독은 “조경가는 삶 속에서 자연의 요소와 사람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에 자연의 계절적 변화라는 기본 특질을 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부분이었다”라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한국적 경관과 관계의 미학 샘과 백합이 어우러진 할아버지의 과수원을 평생 그리워하며 한때는 시인을 꿈꾸던 순수한 문학소녀는 어쩌다 땅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을까. 영화는 이에 대한 답으로 정영선의 손길이 닿은 공간과 인연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공간이 간직한 특성과 이용자 그리고 그 주변의 환경까지 고려하는 그의 작품관은 공원의 개념을 확장시키며 더욱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생태학자를 초빙하고 김수영 시인의 ‘풀’을 낭독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여의도샛강생태공원(1997), 왕성한 생명력으로 환자와 마음이 힘든 가족들 그리고 의료진까지 품어주는 서울 아산병원(2007) 등 그간 조성한 다양한 공간을 들여다보면 단어 하나, 쉼표 하나 허투루 쓰지 않는 시인처럼 경관과 도시, 나아가 사람을 보살피고 매만진 흔적이 돋보인다. 그의 작품을 읽는 두 가지 키워드를 꼽자면 ‘한국적 경관’과 ‘관계의 미학’이 될 것이다. 스스로 ‘연결사’를 자처하며 땅이 가진 시공간적 맥락을 읽고 조경을 통해 전통과 현대, 자연과 도시, 인간과 자연 사이를 긴밀하게 직조했다. 영화는 미나리아재비, 개쑥부쟁이 등 한국 국토의 매력을 즐길 수 있는 각양각색의 야생화와 제주를 비롯한 전국의 금수강산을 포착하며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한국적 경관의 현대적 완성이 빚어내는 자연스럽고도 감각적인 풍경들을 담아낸다. 삼국유사 속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말처럼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미학에 뿌리를 둔 그만의 설계는 땅이 간직한 고유의 맥락을 읽어 시를 그리듯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loci)은 정영선의 작품 특징에 대해 “대상지가 가진 고유한 맥락을 읽고 조경을 통해 복잡한 도시 공간 속 건축과 자연, 도시 간의 알맞은 관계를 설정하고 연결한다”라고 말했다. 미래 세대를 위하여 조경은 특정한 순간이 아닌 거시적 관점의 미래를 바라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더욱 가치 있고 매력적이다. 정영선은 동시대 조경가의 역할에 대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기존의 것을 더욱 아름답게 번영시켜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언제나 더 큰 맥락과 앞으로의 미래를 고려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영화는 우리 땅을 즐기고 가꾸는 아이들의 모습을 처음과 끝에 배치하는 연출을 통해 미래를 항상 생각하는 그의 가치관을 담아냈다. 그 땅이 겪은 모든 시간을 머금은 채로 건강하고 아름답게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 영화는 사계의 여정을 통해 조경가이자 한 명의 어른으로서 ‘정영선’이 오랜 시간 소망해 온 이 마지막 과제를 향해 접근해 나간다. 그는 정원을 만드는 것이 단순히 꽃을 심고 나무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의 장이자 자연을 보살피고 서로 소통하는 장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양한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그는 터의 특성과 정신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공간, 사람, 자연의 관계를 잘 읽어내는 데 집중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자연과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 한국적 경관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완성해왔다. 영화는 정영선의 삶과 철학을 조명하는 동시에 벌과 나비가 점차 사라져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미래 세대를 위한 땅의 모습을 함께 고민하게 만든다. “바다는 바다대로, 산은 산대로, 숲은 숲대로, 도심은 도심대로”라는 그의 말처럼 자연의 순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 줄 아는 태도에 대해 역설한다. 이러한 철학은 그를 존경하는 젊은 조경가들과 미래 세대에 의해 이어질 것이며, 결국 우리의 국토는 모두가 같이 가꾸고 매만져야 하는 하나의 거대한 정원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글 금민수 각주 1. 정호승, “방문객”, 『광휘의 속삭임』, 문학과지성사, 2008.
    • / 2024년05월 / 433
  • [제도가 만든 도시] 도시의 자연
    때마침 온갖 봄꽃이 해사하게 만발한 탓에 우리 도시의 자연에 대해 불만인 점이 뭔가 저절로 너그러워진다. 전봇대와 어지러이 이어진 전선 사이에서 볼품없이 몽둥가리 당한 가지일망정 하늘하늘한 분홍빛 꽃과 고슬고슬한 연한 초록의 새순이 달린 나무 한 그루에서도 도시를 찾아온 봄과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도시 안에서 녹색의 존재는 기본 가치가 높은 자원이다. 요즘은 공세권이니 숲세권이니 하는 말이 통용되고, 경의선숲길이 지나는 연남동처럼 새로 공원이 조성되면서 그 주변이 소위 ‘뜨는’ 동네가 되는 현상이 기사에서 빈번하게 다뤄지기도 한다. 도시 안에서 녹색 공간이 발휘하는 현실적인 힘을 더 많은 사람이 이해하게 됐다는 뜻이다. 덕분에 설계공모를 통해 계획된 훌륭한 대형 공원도 여럿 갖게 되었고, 도시 내 공원을 만들기 위한 땅을 확보하기 위해 도로와 철도를 지하화 하는 엄청난 토목 사업도 사회적 동의를 얻는다(그림 2). 또한, 조성 후에도 촘촘한 운영과 관리를 해야 공원의 가치가 더욱 높아진다는 정책적 인식도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우리의 일상 공간 아주 가까이에 있는 도시의 자연,(각주 1) 건물 한편의 조경 공간, 도로변의 가로수와 녹지, 동네의 오래된 작은 공원은 존재만으로 ‘기본은 하는’ 녹색의 가치를 다 발휘하고 있을까? 도시의 자연이라는 표현이 모호하고 넓지만, 이번 글에서는 산이나 하천, 대규모 공원이 아닌 일상 도시 공간의 작은 자연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일녹다역, 도시의 자연 도시의 환경오염과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위협이 점점 가시화되면서 도시 안 자연이 지닌 가치가 더 다양한 측면에서 증명되고 있다. 도시의 건조물과 대비해 ‘자연’이라 셈할 조건은 외기에 노출되어 날씨의 영향을 받는 식생과 토양일 것이다. 녹색의 식생은 벌레와 새의 서식처가 되어 도시 생태계를 구성하고, 그 시각적 가치가 심리적, 문화적 가치라는 2차 가치를 생산한다. 또한 대기와 땅속 물과 공기의 흐름에 닿아 있어 우수와 미세 먼지를 흡수해 홍수, 지하수 고갈, 공기 오염 문제를 완화한다. 광합성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직접 흡수할 뿐만 아니라 도시 열섬 현상 완화 등 미기후를 조절해 냉방 에너지 수요를 낮추는 간접적 작용도 기후변화 저감에 일조한다. 여러 자연의 가치는 사실 작동하는 방식이 각각 다르다. 도시 생태계를 위해서라면 식생의 양이 절대적으로 많고 서로 이어져 있으며 실질적 생육 환경이 갖춰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경관적 가치를 위해서는 도시 공공 공간에서의 인지와 접근성, 조화로움을 위해 위치와 형태, 식재와 시설의 설계가 중요할 테다. 물 순환의 매개와 조절을 위해서는 같은 면적이라도 균등한 분포가 효과적이며 식재보다는 투수 조건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도시 안에서 자연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들은 자연의 여러 가치를 효과적으로 달성되도록 유도하고 있을까? 생태적, 경관적, 환경적 기능이 모두 잘 작동하도록 정교하지도, 그중 어느 하나라도 확실하게 달성하도록 효과적이지도 않다. 그런 제도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도시의 자연은 ‘대지의 조경’이다. 건축물을 지을 때 의무적으로 만드는 조경 공간의 목적이 무엇인지, 도시의 자연이 지닌 여러 차원의 가치 측면에서 매우 모호하다. 그러다 보니 개발 압력에 이런 저런 완화 조항이 쉽사리 허용되고, 결국은 그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1. 법적 용어로는 200m2 이상의 대지에 의무적으로 조성하는 ‘대지의 조경’, 소공원, 어린이공원, 근린공원 등 ‘생활권공원’, 완충 녹지, 경관 녹지, 연결 녹지 등 ‘시설녹지’에 해당한다.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 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디자인과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 유영수 / 2024년05월 / 433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스튜디오일공일 101, 생각을 그리다
    일공일의 생각 스튜디오일공일은 궁극적으로 소규모 스튜디오 방식을 추구한다. 외형적 규모에 욕심내지 않으며, 소수의 프로젝트를 깊이 있게 수행하며 모든 프로젝트에서 디자인의 집중력을 잃지 않는, 작지만 강한 조경 디자인을 지향한다. 프로젝트의 종류, 성격과 규모에 경계를 두지 않으며, 작은 정원에서부터 주거 단지, 오피스, 공원 및 오픈스페이스, 리조트 등 다양한 스케일을 넘나들며 단위 경관, 소재, 디테일 등 또 다른 차원의 경관적 융합을 이어가고자 한다. 마이크로micro 경관과 매크로macro 경관이 살아 숨 쉬는 공간,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 풍성한 경관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101’의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실험성, 심미성, 실현성을 바탕에 두고 있다. 100 다음에 새롭게 시작하는 1이라는 숫자가 갖는 상징적 의미처럼,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이 새로움을 이끈다고 생각한다. 디자인 중심적 사고는 단순히 결과물 디자인의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행하는 모든 프로젝트의 바탕이자 과정이며 결과다. 현장 조사와 리서치, 분석, 디자인, 디자인 검증 등 프로젝트 시작부터 끝나는 순간까지의 전 과정에서 일정한 호흡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생성적 다이어그램을 통한 대상지 읽기, 디지털 또는 피지컬 모형을 통한 디자인 발전 스터디와 디자인 검증, 라이노를 통한 도면화, 디자인 감리 현장에서의 디자인 보정과 검수 등을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제안하는 계획이 우리만의 태도를 담는 차별화된 경관 디자인 창작물로 안정적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책임과 노력을 다하고 있다. 여전히 설계 스튜디오 ‘일공일’은 궁극적으로 구성원 모두가 직위 및 역할에 상관없이 개별적인 디자인 주체로서 존중받고, 동시에 책임감 있는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올 라운더(all rounder) 조경설계사무소를 추구한다. 설립 초기부터 공공 영역의 기본계획이나 대형 공공 프로젝트보다는 주로 민간 영역에서 벌어지는 규모가 작고 디자인 밀도가 높게 요구되는, 실제 시공으로 바로 이어지는 민간 특화설계 프로젝트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디자인 팀을 운영할 때 계획실과 설계실의 구분 없이 한 팀에서 기본계획부터 실시설계까지 프로젝트의 전 과정을 수행하게 했다. 일종의 고급 조경이라고 불리는 높은 수준의 디자인이 요구되는 프로젝트는 골격 디자인을 시작할 때 부터 각 부분의 세부 디테일까지 함께 고려하는 경우가 많아서, 디자이너들이 디테일 디자인을 접어두고 계획안만 그리는 훈련만 하면 디자인 실력 향상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프로젝트를 통해 자연스럽게 다양한 스케일을 오가는 디자인 과정에 참여하고, 본인이 참여한 설계안을 3D 작업으로 실체화하는 데 문제가 없는지 검토하고, 어떻게 도면화되는지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과정이 직원들을 올 라운더 디자이너로 성장시킬 것이라 본다. 같은 맥락에서 직원들에게 정원 공모에 참여할 것을 적극 권장한다. 정원박람회는 설계뿐만 아니라 시공까지의 전 과정을 더 긴밀하게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더 나아가 다양한 정원 디자이너, 시공 전문가와 지속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의무 사항은 아니지만, 공교롭게 지금까지의 모든 팀장급 직원은 개인 자격으로 공모전에 참가해 수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2015 순천만 한평정원 디자인전 작가부 선정(김현민, 차용준, 서용현, 김광중, 이상수), 2017 순천만 한평정원 페스티벌 작가부문 최우수상(오태현), 2020 경기정원박람회 작가정원 선정(이슬기), 2023 서울정원박람회 작가정원 부문 우수상(이세희, 장지연), 2023 서울정원박람회 작가정원 부문 우수상(최담희, 김선우) 등 다양한 정원박람회에 참여하고 수상했다. 공모전 참가자는 다른 직원에게 수차례 출품작에 대한 브리핑을 하고, 크리틱을 거쳐 작품을 발전시킨다. 시공작으로 선정되면 준공 시까지 필요한 작업이나 미팅, 답사 등을 업무 시간에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부분적인 경비를 지원한다. 직원 역시 본인의 여름 연차를 사용하거나, 작품 및 이미지 저작권을 회사와 공유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장소의 이야기를 듣다 예전에 기고했던 ‘그들이 설계하는 법’(『환경과조경』2014년 4월호)에서 언급한 ‘인터페이스 랜드스케이프(접촉면 경관)’는 여전히 내가 조경을 하고 있는 이유이며, 스튜디오일공일 설계 철학의 바탕이다. 짧게 요약하면 우리가 디자인하는 조경 공간의 이용자는 ‘조경가가 설계한 공간(다른 의미로는 조경가에 의해서 해석된 공간, 또는 원래 대상지가 가지고 있었던 무수한 역사적, 환경적 정보와 의미가 조경가에 의해서 선별되고 해석되어 다른 공간으로 재탄생된 공간)’의 이용을 통해서만 그 공간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결국 조경이라는 작업은 대상지와 이용자 사이의 역사, 문화, 생태, 그리고 공감각적 감흥을 포괄하는 ‘접촉면 경관’을 형성하는 작업이며, 그것을 통해 이 땅의 가치를 이해하고, 경관과 소통하고, 장소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의미 깊은 작업이 아닐까. 우리가 대상지 리서치와 분석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아가 우리가 이러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더 큰 이유는 이러한 땅과 자연, 그리고 시간의 의미를 경관과 함께 통합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전문가는 조경가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도시숲과 숲놀이터 생명의숲은 학교숲운동과 도시숲운동 등 날로 열악해지고 있는 도시 환경에 숲을 통해 다시 건강한 도시 생태계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시민단체다. 우정숲 프로젝트는 당시 도시숲운동의 일환으로 이 사업을 후원하던 우정사업본부가 서울중앙우체국 공개 공지에 기존 시설 철거 후 도시숲을 조성하게 되면서 시작됐다. 명동의 입구인 대상지는 불과 60~70년 전까지 남산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퍼져 있던 남산의 끝자락이었고, 민족의 상징적 의미인 남산의 생태계가 열악한 도시 환경에 의해서 생태적 천이의 방향이 건강한 숲의 방향이 아닌 오염에 강한 산업 단지의 도시림인 팥배나무림와 산딸나무림의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이러한 주제를 담아 도시의 포장 블록을 뚫고 올라오는 자연의 힘을 모티브로 한 ‘들썩플랜터’를 주요 시설로 하는 도시숲운동 기념정원을 조성했다. 이 프로젝트를 인연으로 2023 모두에게 평등한 숲 만들기 희망숲 2호: 틈새숲, 2024 희망숲 3호: 무궁화기념정원, 2024 청주가드닝페스티벌 입구정원: 씨앗숲 등을 통해 도시에서의 숲과 자연의 의미를 전달하는 프로젝트를 함께하고 있다.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와 협업 프로젝트로 함께하게 된 유니세프 아동권리공간 ‘맘껏숲’ 프로젝트 역시 버려진 도시 공간을 다양한 연령의 아동을 위한 자연 여가 공간으로 조성한 숲놀이터다. 김아연 교수와는 이전에 군산의 유니세프 아동권리광장 ‘맘껏광장’을 통해서 18세 이하 아동(청소년)을 위한 자립적 활동 공간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선행한 적이 있다. 맘껏숲에서는 맘껏광장보다 심화된 콘셉트를 활용해 평일 낮과 주말에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뛰노는 숲 놀이터를 마련하고, 저녁 시간에는 청소년을 위한 공방 및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청소년 숲 여가 공간을 조성했다. 홍석환 교수(부산대학교 조경학과)와 함께 진행한 밀주초등학교 역시 이와 비슷하게 밀양의 구도심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생태적 자연 놀이터로 전환한 프로젝트다. 자연 놀이터 완공 후 입소문을 타고 대도시에서 전학을 오는 등 2개 학급이 늘어나고, 많은 주변 학교와 지자체 교육 관계 부서의 견학이 이어지는 등 큰 이슈가 되었다. 사무실을 운영한 지 올해가 벌써 9년 차다. 돌이켜 보면 한 해, 한 해 매년 정신없이 지나가기만 한 것 같은데, 이런 저런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제법 많이 쌓였다. 그들 간에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통일된 방향성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아 이런 것들이 일공일의 이미지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자리를 빌려 일공일의 지난 9년을 함께 노력해 준 모든 직원들에게 감사했고, 앞으로도 여전히 감사한다는 말을 전한다. 스튜디오일공일(STUDIO101)의 ‘101’은 100 다음의 새롭게 시작하는 ‘1’을 의미한다. 기본에 충실한 것이 곧 새로움의 시작이라는 디자인 철학을 기반으로 실험성, 심미성, 실현성을 갖춘 작업을 지향하는 실천적 조경설계사무소다. 정원, 오피스, 공원, 주거 특화설계, 리조트 및 테마파크 등 실제 시공으로 이어지는 공공·민간 영역의 다양한 외부 공간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눈치 싸움 산책 vs 조깅 vs 자전거
    에피소드 1. 타돌이의 반기 이 글을 작성하기 바로 며칠 전, 자유를 갈망한 타조의 성남 도심 탈출기가 기사를 탔다. 함께 지내던 친구가 먼저 세상을 뜨며 상실에 빠진 ‘타돌이’가 근처 생태 체험장에서 탈출한 것으로, 대로에서 버스와 나란히 달리는 위험천만한 풍경이 펼쳐졌다. 봄날의 한 일화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최근 연구실에서 토론하고 있는 ‘비인간 도시’의 조건이 생각나며 그 잔상이 가시질 않는다. 만약 이곳이 타조가 뛰어다니는 게 익숙한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이라면 타조를 위한 별도의 도로가 있을 수 있을까. 물론 야생 동물이니깐 인간의 신호 체계에 무조건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야생 동식물 서식처의 연결과 이동을 돕고자 만든 생태 통로가 일반화됐듯, 타조가 도시를 활보하는 어떤 차원에서는 공존을 위한 또 다른 규칙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사실 안전하고 편리한 도시를 꿈꾸며 만들어낸 도로 규칙들은 결코 고정적이지 않다. ‘우회전할 때 횡단보도가 빨간불이면 무조건 멈춤’이라는 규칙 역시 이제 갓 돌이 지난 신생 규칙 중 하나다. 보행자와 운전자의 안전을 위해 제정된 교통 규칙이다. 한 차원 깊이 들어가자면 도시 공간을 누가 점유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실려 있다. 이처럼 실제 공간 규칙은 필요에 따라 언젠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반대로 관습화된 규칙은 변화에도 쉽게 움직이지 않으며 아주 천천히 바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치렀던 운전면허시험의 기억도 이미 가물가물(참고로 필자는 운전면허 필기시험 73점을 받은 용사다). 실제 우리가 도시 공간을 향유할 때는 대부분 본능처럼 체화된 규칙을 따르기 마련이다. 이 도시 공간 활용의 변화는 반드시 갈등을 불러오고, 공원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스테드: 뉴욕의 산책과 드라이브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의 걸작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 보스턴 에메랄드 네클러스 공원 시스템(Boston Emerald Necklace Park System)은 뉴욕 센트럴파크와 프로스펙스 공원에서 그가 꿈꿨던 ‘녹지이자 교통 인프라이자 여가 공간’으로서 공원이 실험된 곳이다. 특히 파크웨이와 함께 회자되는 옴스테드의 발상 중 하나는 도시의 분리 이용에 관한 것이다. 필자가 종종 참고하는 옴스테드의 1870년 보스턴 미국사회과학협회 발표문을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12년 전 뉴욕에서 드라이브(pleasure driving)를 하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최소한 1만 마리의 말이 드라이브를 위해 대기하고 있다. 12년 전에는 경량 마차를 위한 길이 전무했다. 오늘날에는 준공된 공원 내 14마일에 달하는 드라이브 코스가 있고 사람이 바글거린다. (뉴욕과 브루클린) 두 도시를 합하면 50마일에 가까운 파크웨이가 조성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적어도 평균 150피트 넓이의 녹지 경계가 만들어질 예정이다.”(각주 1) 비단 옛날이야기로만 치부할 수도 없다. 공원 조성 관련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흔히 목격하게 되는 것이 조용하게 자연 속에서 산책할 수 있는 공원에 대한 욕망과 다양한 운동과 활동이 가능한 공원에 대한 욕망의 부딪침이다. 공원 내 자전거 도로용 신호등 체계나 골프 카트와 전기 자동차가 일렬로 서 있는 관리자용 주차 구역이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지 않게 단차를 조정하고 동선을 그려놓은 센트럴파크를 누가 그려냈는가 생각해보면, 이처럼 욕망의 부딪침으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는 건 결국 설계가의 몫이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jin.everyw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