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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스케이프] 수평에 대하여
    풍경 사진을 찍을 때면 다른 대상보다 좀 더 신경 쓰는 것이 있습니다. 수평을 맞춰 구도를 잡는 일이지요. 예를 들면 바다, 호수, 길, 건물, 구조물 등으로 만들어지는 선을 정확하게 수평으로 맞춘다는 뜻입니다. 안정감 있는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가급적 수평을 맞추는 것이 안전(?)합니다. 요즘 카메라에는 뷰파인더에 보조선이 보이거나 수평계가 내장된 경우가 있어서 촬영할 때 수평을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막상 모니터로 확인해 보면 수평이 안 맞는 경우가 상당히 많죠. 후보정을 통해 수평을 맞출 수는 있지만, 꽤나 성가신 작업입니다. 그래서 찍을 때 최대한 수평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건축 사진을 찍는 분들이 수직선에 강박을 갖는 것처럼 조경 전공자들은 수평선에 꽤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습니다. “내가 찍은 사진 중에 수평 구도가 강조된 사진이 얼마나 될까”, “나중에 이런 사진들을 옆으로 쭉 늘여 붙여보면 재미있겠다.” 그래서 이번 호에는 수평선이 강조된 사진들을 모아 편집해 보았습니다. 이미 ‘이미지 스케이프’에 소개한사진 중에도 꽤 많더군요.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같은 학과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가원조경, 도시건축 소도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실무를 담당했고,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경 계획과 경관 계획에 학문적 관심을 두고 있다.
  • [당신의 사물들] 노트북과 데이터
    학부 졸업 직전, 데이터 관리에 대한 특강을 들었다. 강의의 핵심은 좋은 자료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정리해두지 않으면 추후 활용할 확률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 나름 데이터 관리에 신경을 썼지만, 그것에 일정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대학원 진학을 위해 노트북이 필요했고, 유럽 사람들은 모두 맥북을 쓴다는 뜬소문을 따라 충동적으로 맥북을 구입했다. 2D와 3D 소프트웨어를 함께 써야 하는 조경 설계의 특성상 맥북은 윈도즈 운영 체제 기반의 컴퓨터보다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맥 운영 체제가 동기화 기능으로 기본 응용 프로그램을 활용해 데이터를 관리하기에 훨씬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 ‘서치’(2017)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남겨진 데이터를 통해 실종된 딸의 흔적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현대 사회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신선한 구성으로 보여주었는데, 특히 맥 운영 체제에 익숙한 사람들은 영화의 화면 구성이 더욱 반가웠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현대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를 웹에서 만들어 내고, 이렇게 생성된 정보는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인터넷과 동기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모인 데이터 그룹은 한 사람 또는 어떤 사물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윤일빈은 서울시립대학교와 에식스 대학교(University of Essex)에서 조경을 공부했으며, 디자인 스튜디오 loci, 길레스피에스(Gillespies)에서 실무 경력을 쌓았다. 한국,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두바이, 중국, 홍콩 등 다양한 나라의 프로젝트를 경험했으며, 2018년 11월부터 삼성물산 조경사업팀 디자인그룹에 근무 중이다.
  • [그리는, 조경] 측정하는 드로잉
    조경 드로잉은 언제부터 그려졌을까. 먼저 조경 드로잉의 범위를 정할 필요가 있다. 정원, 공원, 자연을 그린 모든 그림을 조경 드로잉이라고 한다면 화가가 그린 풍경화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존재하는 경관을 모사한 그림일 뿐 조경 드로잉은 아니다. 조경 드로잉은 설계가가 경관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생산한 경관과 관련한 이미지를 말한다. 초기 아이디어 구상 과정에서 빠른 속도로 그리는 스케치, 대상지를 분석하면서 생산하는 다이어그램, 공모전 출품을 위해 만든 컴퓨터 이미지, 공사를 위한 시공 도면, 조성 후에 자신의 작품을 다시 그린 이미지 등 설계 과정에서 만들어진 모든 시각화 작업을 조경 드로잉으로 볼 수 있다. 그럼 언제부터 조경가가 설계 과정에서 이미지를 생산하기 시작했을까. 조경이라는 전문 분야가 만들어진 것이 19세기 중반 이후이므로, 그 이전의 정원이나 공원을 설계한 전문가를 엄격히 말해 조경가라 부를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지난 연재『( 환경과조경』 2019년 2월호, “나무를 그리는 방법, 드로잉의 혼성화”, pp.98~103 참조)에서 소개한 바 있는 이집트 정원 그림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가 조경이라고 부르는 작업의 역사는 인류 문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다만 이집트 정원 그림은 설계가가 그린 것인지 그 여부를 알 수 없기에 조경 드로잉이라 할 수는 없다. 조경 연구자들은 조경 드로잉, 즉 조경가가 경관 설계 과정에서 그린 드로잉이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고 추정한다. 이때의 드로잉은 당시 이탈리아 정원의 질서 정연함을 시각화하기 적합한 평면도 형식으로 그려졌다. 그것은 설계가의 머릿속에 디자인된 경관을 자로 측정해 표현한, 조경 드로잉의 두 가지 특성인 과학적 도구성과 예술적 상상성 중에서 전자의 특성이 강조된 시각화 방식이었다. 메디치 정원 드로잉 16세기 중엽에 조성된 이탈리아 메디치Medici 정원 중 하나인 빌라 디 카스텔로(Villa di Castello)의 정원 상세 평면도는 현존하는 최초의 정원 드로잉 중 하나로 여겨진다(그림 1). 이 드로잉은 정원을 설계한 니콜로 페리콜리(Niccolo Pericoli)(1500~1550), 트리볼로(Tribolo)라고도 불린 이탈리아 조각가이자 화가가 그렸다고 추정된다.1 설계가의 머릿속에 있는 정원을 그대로 평면도로 옮긴 듯한 이 드로잉에는 생울타리의 외곽선이 정교하게 직선으로 그려져 있다. 정원이 조성될 대상지는 평면에서 구획되고 그 내부에 식재가 가지런히 채워지게 된다. 빌라 카스텔로는 현재 남아 있는 이탈리아 정원 중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1404~1472)의 조형 질서를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다. 그러한 조형 질서는 화가 주스토 우텐스(Giusto Utens)(?~1609)의 그림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그림 2). 남북 방향의 직선 축이 화폭 중앙을 지배하고 축을 따라 건축물과 정원이 좌우 대칭으로 펼쳐지며, 격자형 길의 군데군데 분수대, 퍼걸러, 조각상 등이 놓여 있다.2...(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Raffaella Fabiani Giannetto, Medici Gardens: From Making to Design,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08, pp.257~258. 2. 빌라 카스텔로 정원 설계의 전반적 설명은 다음을 참조할 것. D. R. Edward Wright, “Some Medici Gardens of the Florentine Renaissance: An Essay in Post-Aesthetic Interpretation”, in The Italian Garden: Art, Design and Culture, John Dixon Hunt, 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p.34~59. 이명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경 설계와 계획, 역사와 이론, 비평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박사 논문에서는 조경 드로잉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현대 조경 설계 실무와 교육에서 디지털 드로잉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고, 현재는 조경 설계에서 산업 폐허의 활용 양상, 조경 아카이브 구축, 20세기 전후의 한국 조경사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다. ‘조경비평 봄’과 ‘조경연구회 보라(BoLA)’의 회원으로도 활동한다.
  • [도면으로 말하기, 디테일로 짓기] 컨벤셔널 콜라주
    알 수는 없지만 가정은 할 수 있다. 램 콜하스(Rem Koolhaas)는 디자인의 명료성을 잃지 않기 위해 다이어그램 단계에서 설계를 종료했다. 다이애나 발모리(Diana Balmori)는 회화적 설계에 우아함을 불어넣고자 자신이 19세기 화가가 되는 자기 최면을 걸었다. 디제이 섀도(DJ Shadow)는 턴테이블 플레이어만의 독창성을 만들기 위해 아날로그 악기를 완전히 배제하고 샘플링만으로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자조적인 재해석의 사념들이 해 질 무렵의 그림자보다 길어지면, 작가는 창작을 위한 배경으로 스스로 제한된 설정을 구축한다고 결론 낼 수 있다. 정의할 수 없지만 가정은 할 수 있다. 1. 콘셉트, 2. 프로그램과 레이아웃, 3. 디자인, 4. 디테일의 단계가 지난 세기 동안 북미와 유럽의 건축계가 합의해 온 가장 효율적인 불패의 설계 프로세스라고 한다면, 이 같은 전형적 워크 프로세스는 비전형적 배경 설정과 대립한다. 음악이라면 싱커페이션(당김음)과 스케일(음계)의 관계에 해당된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상충되는 두 방식을 자신만의 해석을 통해 적절히 조합하고 재구성하여 새로운 악보를 준비해야 한다.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설계의 전주곡으로서. 유니버설 가든(Universal Garden)은 우주적 이미지 표현과 유니버설 디자인 시스템의 구축을 목표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다. 우주의 이미지를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는 않되 보편적으로 감응이 가능한, 언어적으로 모순되어 보이지만 디자인적으로는 상응하는 복합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콘셉트’ 단계를 핵심 프로세스인 동시에 제한 요소로 설정하고, 사이트의 최소한의 물리적 맥락만을 반영한 뒤 우주적 일러스트 아트워크를 그리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리고는 일러스트 단계에서 설계를 종료시켜버렸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나성진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 GSD에서 조경을 전공했다. 졸업 후 한국의 디자인엘, 뉴욕의 발모리어소시에이츠(Balmori Associates)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CFO)에서 실무 경험을 쌓고, West 8 로테르담과 서울 지사를 오가며 용산공원 기본 설계를 수행했다. 한국, 미국, 유럽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파트너들과 함께 얼라이브어스(ALIVEUS)라는 대안적 그룹을 시작했다.
  • [공간의 탄생, 1968~2018] 한국 도시화의 일상적 현황, 밀도의 향연
    무엇이 우리를 도시로 이끄는가? 지난 연재에서는 한국 도시화 50년의 거시적 현황을 ‘쏠림 현상’으로 규정했으며, 이와 같은 현상의 원동력으로서 지난 50년 동안 끊임없이 지속된 정부 주도의 도시화와 대규모 물리적 개발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연재에서는 한국 도시화 50년의 일상적 현황을 살펴본다. 이를 위해, 내 삶의 그리고 우리 일상의 도시화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946년생 동갑내기지만, 예전부터 내 어린 눈으로 보아도 여러모로 다른 분들이었다. 어머니는 맏딸로서 학교 교사인 외할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충남의 여러 지역에서 사셨는데,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의 조폐공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셨다. 반면 아버지는 농사일하시는 할아버지의 장자로서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줄곧 충남 홍성에서 지내고, 이후 대전에서 대학을 나오셨다. 그런 두 분이 1972년에 중매로 만나서 결혼을 하고, 곧이어 물리 교사였던 아버지의 첫 부임지 서산여고 근처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1974년에 할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어 아버지는 홍성의 갈산중학교로 전근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이에 따라 아버지의 고향 집에서 시집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지금도 가끔 대전에서 직장을 다니며 고급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입던 본인이 8남매의 맏며느리가 되어 시골에서 생활할 때의 이야기를 하시곤 한다. 우리 가족 이외에도 집안에는 농사일하는 머슴이 두세 명 있었으며, 마을 전체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이 무척 어두웠고, 아픈 할아버지를 위해 무당이 굿을 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모들은 언니의 갑작스러운 시골살이에 놀라서 아버지에게언니를 그만 고생시키라는 항의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1977년에 할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대전의 학교로 전근을 하게 되어 어머니는 시댁과 농촌이라는 공간적 질곡을 떠나 다시 도시로 돌아오게 되셨다. 이와 같은 가족 역사 때문인지 우리 누나는 서산에서, 형은 홍성에서, 나는 대전에서 태어났다. 나는 농촌에 대해 목가적이며 낭만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농촌이 도시보다 오랜 시간 적응하며 진화되었기 때문에, 도시보다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공간이라는 막연한 생각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편견과는 달리 우리의 언어 속에서 농촌과 관련된 단어들은 순박함과 평화로움을 넘어서 세련되지 못하고 어리숙한 이미지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농촌은 도시에 비해 발전되지 못한 지역으로, 농촌 사람들은 촌놈, 촌뜨기, 시골뜨기 등으로 비하되기도 한다. 농촌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사실 우리 언어에서만 보여지는 일은 아니다. 영어에서도 농촌과 농촌 사람에 어원을 두고 있는 boorish(거친), churlish(무례한), loutish(투박한) 등의 단어들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전달한다. 그래서일까, 오늘날에는 강남의 값비싼 집에서나 살듯한 연예인들이 농촌에 가서 잠을 자고 생활을 하는 TV 예능 프로그램이 많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에게 농촌은 TV 예능의 인기 촬영 장소인 섬, 오지, 정글처럼 문명이 닿지 않는 외딴곳으로 여겨지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무엇이 우리를 지금껏 도시로 이끌었을까? 이제 한국 도시화 50년의 일상적 현황을 ‘밀도의 향연’으로 규정하고, 이를 이끈 시대적 이념, 정치적 의제, 개인적 욕망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주거를 위한 기계? 정치를 위한 도구! 욕망의 매개물 도시의 본질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문적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도시는 본질적으로 주변 배후지에 대한 공간적 중심지라는 특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도시는 정치 권력, 경제적 부, 사회적 영향력, 문화적 혜택 등이 집적되어 있는 공간적 중심지다. 따라서 개인이 도시로 이동한다는 것은 주변에서 중심으로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고, 사회가 도시를 개선한다는 것은 기존의 중심지를 강화하는 것을 의미하며, 국가가 도시를 개발한다는 것은 새로운 중심지를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하자면, 도시에 대한 어떤 공간적 행위도 주변과 중심의 관계에 영향을 주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공간 계획 분야에서 개별 건축을 넘어서 집합적 도시 문제와 이슈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산업 혁명 이후의 일이다. 도시의 주체가 권력자로부터 일반 시민으로, 도시의 주요한 건축물이 궁궐이나 관공서 등으로부터 일반인을 위한 주택으로까지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서구에서조차 20세기 이후에야 가능했다. 이와 같은 변화의 선봉에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가 있었다. 그는 근대 건축의 형태와 공간을 제시한 대표적 거장으로서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요구 및 시대의 미학에 부응하지 못하는 기존의 건축과 도시를 질타하며, 새로운 건축과 도시를 제안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김충호는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공학과 도시설계 전공 교수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워싱턴 대학교 도시설계·계획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삼우설계와 해안건축에서 실무 건축가로 일했으며,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와 워싱턴 대학교, 중국의 쓰촨 대학교, 한국의 건축도시공간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분야의 교육과 연구를 했다.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건축, 도시, 디자인의 새로운 해석과 현실적 대안을 꿈꾸고 있다.
  • [시네마 스케이프] 칠드런 오브 맨 정말 사과나무를 심을까?
    가슴에 품고 있는 몇 편의 영화가 있다. 숙제하듯 보느니 언젠가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보려고 남겨둔 영화들이다.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2006)도 그중 하나였다. 많은 호평과 그 유명한 후반부 롱 테이크 장면에 대해 익히 들었지만, 눈과 귀를 꼭꼭 닫고 때를 기다렸다. 알폰소 쿠아론(Alfonso Cuaron) 감독이 넷플릭스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로마Roma’(2018)를 보고 원고를 쓰려던 참이었다. ‘로마’는 우리가 아는 그 로마가 아니라 감독이 어렸을 때 살았던 멕시코시티의 지역 이름이다. ‘로마’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감독의 전작들을 보기로 했다.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그래비티(Gravity)’(2013)는 스킵하고, 오래전에 본 영화들을 다시 찾아 봤다. 야한 영화로만 기억나는 ‘이투마마(Y Tu Mama Tambien)’(2001)에서는 내부자의 시선으로 그린 멕시코의 원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분수대 키스, 단 하나의 이미지로만 기억하던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1998). 기네스 펠트로의 아찔한 초록색 원피스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드디어, 마침내, ‘칠드런 오브 맨’을 봤다. ‘로마’는 잠시 잊기로 한다. ‘칠드런 오브 맨’은 2006년에 제작되었으나 한국에서는 10년이 지난 뒤에야 개봉됐다. 영화의 배경은 2027년, 18년째 원인 모를 불임 현상으로 인류는 100년 안에 종말을 고할 예정이다. 전 세계 도시들이 테러로 함락되고 런던이 마지막 보루로 남은 상황이다. 아들을 잃고 무기력하게 살고 있는 테오(클라이브 오웬 분)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현 인류 중 가장 어린 18세 소년이 사고로 사망했다는 뉴스를 본다. 난민 정책에 항거하는 단체의 리더인 전처가 20년 만에 테오 앞에 나타나 한 소녀를 부탁한다. 놀랍게도 그 소녀는 기적적으로 임신한 상태다. 영화는 테오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미래호’라는 배에 태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한동안 유튜브에 몰두하다 ‘로마’를 보기 위해 가입한 넷플릭스에 빠져 지내고 있다.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할 것인가 연이어 다음 편을 볼 것인가 머뭇거리기에는 자동 재생으로 넘어가는 몇 초가 너무 짧다. 멈추려면 행동해야 한다. 중독은 쉽고, 남는 건 불면이다.
  • 커피가 만든 공간, 그 공간에 담긴 문화 ‘커피사회’, 2018. 12. 21 ~ 2019. 3. 3.
    졸음을 밀어내기 위해, 어색한 사람과의 대화에서 침묵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또는 여유로운 주말을 느긋하게 즐기기 위해 우리는 커피를 마신다. 19세기 후반 한국에 도입되어 약 100여 년간 우리 일상 깊숙이 스며든 커피는 기호 식품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과연 우리에게 커피란 무엇일까? 문화역서울 284(이하 문화역서울)에서 2018년 12월 21일부터 2019년 3월 3일까지 열리는 ‘커피사회’는 근현대생활 문화에 녹아든 커피 문화의 변천사를 조명하고, 우리 사회의 커피 문화를 되돌아보는 전시다. 특히 전시장의 원형인 구 서울역사가 근현대의 상징적 공간이자 커피 문화가 시작된 공적 장소(그릴, 1· 2등 대합실 티룸)라는 점이 이 전시의 의미를 더한다. 커피사회는 문화역서울 건물 전역을 활용한다. 중앙홀, 대합실, 과거 귀빈을 모시던 방뿐만 아니라 방과 방을 잇는 통로의 벽면, 중앙홀과 대합실 사이의 거대한 복도까지 커피와 관련된 아카이브를 선보이는 전시대가 되었다. 곳곳에 마련된 작은 카페에서는 입구에서 나눠 준 종이컵에 커피를 담아 마실 수 있어, 커피의 풍미를 느끼며 전시 내용을 곱씹을 수 있다. 커피의 역사 1층 중앙홀에 들어서면 시선을 압도하는 설치물이 관객을 맞이한다. 거대한 5단 케이크나 크리스마스트리를 연상하게 하는 박길종의 ‘커피, 케이크, 트리’다. 원형 전시대 위에는 오래된 원두 그라인더부터 에스프레소 전용 잔, 다양한 커피 제품의 패키지, 보온병 등 커피와 관련된 온갖 물건이 놓여 있는데, 그 개수와 물건이 풍기는 예스러움만으로도 커피의 오래된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문화역서울 2층은 경성 최초의 서양식 레스토랑 ‘그릴’이 있던 자리다. 정치, 문화·예술계의 유명 인사들이 즐겨 찾는 곳이자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던 이곳에서는 근대를 주제로 한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근대의 맛’이 진행된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 [이달의 질문]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설계공모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서울시는 1970년대 사대문 안의 폭주하는 교통량을 수용하기 위해 도로를 넓혀 교통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의 광화문광장 관련 사업은 교통 광장 조성의 성격이 강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육조거리 등 역사적 공간 복원이 이슈가 되었다가, 1990년대에는 서울 올림픽 이후 광화문광장을 글로벌 도시로의 성장을 위한 상징적 광장, 국가적 상징 거리이자 서울의 중심으로 삼고자 하는 이념이 투사됐다. 2000년대에는 육조거리 경관 복원, 광화문 문화 조성 등의 사업을 통해 경관과 문화 콘텐츠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되기도 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 광화문광장은 경제적 측면을 고려하고 보행권을 확보하기 위한 공간으로 또 한 번 재조정되려 한다. 늘 당대의 시대상이 반영되는 광화문광장은 항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이슈가 되는, 우리나라의 가장 중추적인 장소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공간이 형성된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 광화문 앞 공간은 단 한 번도 오롯이 백성과 시민을 위한 공간이었던 적이 없었다. 마음껏 이용하고 누릴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항상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감시당하고, 변화를 강요당하기만 했던 곳. 이제는 그 본연의 모습과 존재의 이유를 아무도 모르게 되어버린, 어찌 보면 계속 버려지고 지워지고만 있는 장소이자 유산이다. 염인석 UDI 도시디자인그룹 소장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어렵다지만, 어쩌면 유에서 새로운 유를 창조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멀쩡한 광장을 왜 바꾸려 하냐’는 의견도 분분하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더 나은 무언가를 찾아 오지 않았나. 도시는 멈춰 있지 않다. 또한 멈춰 있는 것만이 역사가 아니라 새로운 것 역시 역사가 된다. 도시 공간은 우리의 삶을 반영하고 우리는 공간의 영향을 받는다. 모든 설계안은 광장과 국민의 더 나은 상호 작용을 추구했다. 광화문광장이 서울의 랜드마크이자 중요한 사건들의 결집체인 만큼, 지금 당장은 이에 대한 이견도 불협화음도 많아 보이지만, 이목이 집중되는 모든 일은 항상 그래왔다. 광장에 대한 높은 관심이 새로운 광화문광장의 활성화를 이끌 수 있지 않을까, 긍정적인 기대를 해본다. 박세희 한국토지주택공사 지금의 광장도 충분히 넓다. 현재 서울에는 동네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며 쉴 수 있는 마을 광장이 좀 더 필요하다. 커다란 공간보다는 아이들이 안전하고 이웃 간 소통할 수 있는 작고 개방된 공간. 쌓고, 헐고, 넓히는 보여주기식 광장은 이제 그만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추연태 아이모노디자인 대표 접근하기 어렵고 자동차 소음으로 오랫동안 머물 수 없었던 경험을 생각하면, 광화문광장이 바뀔 기회가 일찍 온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국가적 랜드마크 중 하나이며 소통을 상징하는 국가 광장이 단 한 번의 설계공모로 결정된 점은 아쉽다. 기존 광화문광장의 문제는 오래전부터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해답을 찾는 시간이 부족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본 계획 단계에서 진행한 사례 분석을 국민들과 함께 논의해보면 어땠을까. 사람들이 경험한 광화문광장과 다른 나라의 광장을 비교해보는 등 소통 과정이 따랐다면 함께하는 의미를 가진 광장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박종환 서울시 영등포구 멋지고 훌륭한 설계다. 같은 조경가로서 자부심을 뽐내고 싶다. 하지만 소수의 경외심보다 많은 사람의 소확행을 위한, 좀 더 착한 대안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울타리 밖으로 나온 조경은 그럴 필요가 있지 않을까. 천재욱 현대엔지니어링 부장 차로를 없애고 공원으로 조성해야 한다. 정용환 처음 당선안을 보았을 때, 도로 한가운데에 있어 안정감을 주지 못하던 기존의 광장보다 훨씬 편한 마음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감이 일었다. 하지만 광화문이라는 공간의 상징성에 비해 이번 프로젝트는 진행 과정에서 의견 수렴을 충분히 하지 않은 점이 아쉽다. 국가 상징 축의 새로운 변화를 만드는 프로젝트라면, 몇 번의토론회를 여는 것보다 시민들이 광화문의 변화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볼 시간을 주는 게 더 중요하다. 당선안을 보면 육조거리 복원을 통한 국가 상징 축의 완성이 강조되는데, 근현대 서울의 100년보다 조선 시대가 부각되는 점이 아쉬웠다. 앞으로의 진행 과정에서는 근현대 서울의 장소성을 어떻게 살릴지 더 깊이 논의했으면 한다. 박선양 서울시 서대문구 어린 시절 집 근처 한 아파트의 이름은 ‘○○광장’이었다. 유난히 그 아파트 놀이터에 많이 가게 되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게 내 첫 광장이 되었다. 광화문광장이 그 기억의 파편의 아주 작은 한 부분과 닮았다면, 다른 곳에서는 고함과 투정이었을 소음들이 문화와 놀이, 그리고 선언으로 읽힌다는 뜻일 테다. 끊임없는 역사 속에서 이미 광화문광장의 문화는 형성되었다. 이를 잘 연결한다면 경관은 당연히 따라오게 되지 않을까. 당선된 설계안에 녹아 있는 소통과 연결이 근사한 ‘포스트 광화문광장’을 선사해주기를 바란다. 신동훈 환경과조경
    • / 2019년03월 / 371
  • [편집자의 서재] 쓰기의 말들
    흥겨운 비트의 음악이 흘러나오면 마음이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다. 기꺼이 리듬에 몸을 맡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그럴 수 없다. 곤혹스럽다. 쿵쿵대는 박자에 맞춰 요란하게 팔다리를 놀리고 싶지만, 이를 따랐다간 요상한 정체불명의 동작을 구사할 게 뻔하다. 이럴 때는 내적 댄스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한다. 추고 싶은 춤을 마음껏 상상하면서. 내적 댄스 본능을 자극하는 곡처럼 ‘내적 글쓰기’를 유발하는 순간들이 있다. 쓰린 일들이 마음을 사정없이 할퀼 때, 소위 말하는 인생 영화를 만나 먹먹한 마음으로 엔딩 크레디트를 바라볼 때 같은. 개인적으로는 남이 잘 빚은 글을 읽을 때 쓰고 싶은 충동이 빈번하게 인다. 읽는 속도를 늦추고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게 만드는 보석 같은 문장 앞에 서면 글쓴이에 대한 시기와 질투도 잠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나의 주제를 헤쳐서 나의 언어로 다시 빚어내고, 내가 느낀 감정의 근원과 빛나는 순간을 기록해두고 싶다. 머릿속에서 단어가 반짝이고 쓰고 싶은 문장이 둥실 떠오른다. 물론 막상 쓰려고 하면 막막하고 귀찮아 보통은 생각에 그치고 말지만. 『쓰기의 말들』은 글쓰기에 관한 책이지만 쓰는 방법보다 쓰고 싶게 만드는 문장으로 채워져 있다. 저자 은유는 치열한 읽기를 통해 쓰는 자리로 나아간 작가다. 그가 수집한 옥석 같은 문장을 보다 보면 나의 말과 언어가 얼마나 남의 생각으로 오염되어 있는지, 사소한 감정과 일상에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깨닫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나 아닌 실험장으로 만드는 일이다.”(잉게보르그 바하만) 쓰기를 통해 또 다른 나를 일궈낼 수 있을 것 같다. “작가의 임무는 평범한 사람들을 살아 있게 만들고, 우리가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나탈리 골드버그) 작가는 아니지만 글의 힘을 일깨워주는 말이다. “글쓰기의 실천은 기본적으로 ‘망설임들’로 꾸며집니다.”(롤랑 바르트) 쓰지 않고 망설였던 시간,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했던 시간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는다. “칼럼은 편견이다.”(김훈) 글을 통해 생각 드러내기를 주저하던 내게 용기를 불어넣는다.2 덩달아 키보드를 치는 손끝이 경쾌하게 움직인다. 머리말의 마지막 문장은 책이 추구하는 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쓰기의 말들’이 글쓰기로 들어가는 여러 갈래의 진입로가 되어 주길, 그리고 각자의 글이 출구가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3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설계공모’를 다룬 이번 호 또한 누군가의 쓰기로 향하는 진입로가 될 수 있을까, 소심한 기대를 걸어본다. 편집부는 ‘비평’과 ‘이달의 질문’ 지면에 광화문광장에 대한 쓰기의 말들을 수집했다. 말들은 새로운 광장을 향한 기대를 담기도, 광장을 둘러싼 불같은 풍문을 아슬아슬하게 탐색하기도, 정치화된 광장을 조롱하기도, 광장에 투사된 욕망의 근원을 추적하기도 한다. 이 문장들이 누군가의 내적 글쓰기 본능을 유발할 수도 있지 않을까. 몸치 혹은 글치면 어떤가. 비트에 몸을 맡기다 보면 나같이 서툰 춤사위를 보이는 또 다른 이를 만나게 될지도. 정치 논리라는 하나의 불길로 한껏 달았다 금세 식어가는 광장을 뭉근하게 데우고, 맛 좋은 담론을 형성하고, 건강한 공론화의 장을 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각주 정리 1. 은유, 『쓰기의 말들』, 유유 출판사, 2016. 2. 위의 책, p.152, 88, 110, 216. 3. 위의 책, p.19.
  • [CODA] 땅 밑을 걷는 사람들
    고대하던 여행지에서의 첫 기념품이 우산이라니. 출발할 때만해도 온화했던 하늘이 두 시간 만에 색을 바꾸었다. 날씨가 약속과 달리 변덕을 부린 건 아니었다. 여행 시작 일주일 전부터 확인한 1월 마지막 날 오사카의 강수 확률은 줄곧 80%를 웃돌았으니까. 20%의 확률을 원망하며 입술을 비죽이는 대신 창에 묻어나는 빗방울을 보며 우산 손잡이를 단단히 고쳐 잡았다. 빗줄기와 싸워가며 커다란 캐리어를 끄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걱정과는 달리 나와 친구들은 꽤 멀끔한 모습으로 호텔 로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듣던 대로 거리가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했던 덕분이다. 빗물에 쓸려오는 오물은커녕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와 운동화를 흠뻑 적시는 웅덩이 하나가 없었다. 오히려 우리를 괴롭힌 건 100m마다 한 번꼴로 나타난 횡단보도였다. 좀 걸을 만하면 등장하는 건널목은 다섯 걸음이면 건널 수 있을 정도로 길이가 짧은 주제에 대기 시간이 제법 길었다. 차라도 많았다면 견딜만했을 텐데, 한적한 도로를 앞에 둔 나는 몸 속 깊숙이 내재된 ‘빨리빨리’ 정신을 몇 번이고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깨끗한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숙소 인근이 각종 쇼핑몰과 고층 빌딩이 몰려 있는 업무 지구였는데도 말이다. 간간이 곡예사처럼 한 손에는 우산, 한 손에는 자전거 핸들을 쥔 사람들이 빠르게 곁을 스쳐 지날 뿐, 비 오는 일본 도심의 풍경은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처럼 잔잔했다. 다들 고층 빌딩에 갇혀 업무에 시달리고 있구나. 텅 빈 거리의 사정을 어림짐작한 우리는어쩐지 우쭐한 기분과 짧은 휴가가 곧 끝난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바삐 걸음을 옮겼다. 멋대로 내린 진단이 빗나갔다는 걸 여행 삼 일 차의 저녁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사람들은 빌딩이 아닌 땅 밑에 숨어 있었다. 타코야키 맛집을 찾겠다고 들어선 지하도, 그곳에 또 다른 일본의 도심이 있었다. 대여섯 개의 지하철 노선이 얽힌 지하도는 극악의 길 찾기 난이도를 자랑하는 부평지하상가와 겨루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복잡했다. 긴장을 잠깐만 풀어도 출구로 인도하는 화살표가 사라지기 일쑤, 가뜩이나 방향 감각이 없는 나는 기진맥진하여 지하도를 빠져나와야 했다. 하지만 다음날에도 우리는 지상 대신 지하를 찾았다. 평소의 몇 배나 되는 에너지를 길 찾는 데 소모해야 했지만, 지하에는 걸음을 더디게 하는 횡단보도도, 목적지까지의 여정을 길게 만드는 8차선 대로도, 불쑥 끼어들어 우리를 놀라게 하던 바이커도, 내리는 비를 피해 우산을 쓸 필요도 없었다. 지하 곳곳에 숨어있는 맛집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런데 인제 와서야 너무 지하 도시 탐험에 몰두해있던 게 아닌가 아쉬워졌다. 뒤늦은 여행 일기를 쓰기 위해 더듬거린 기억 속에 지하의 모습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지하상가와 다른가 하면 또 그렇게 다를 것도 없는 지하도를 왜 그렇게도 걸었을까. 땅 밑을 누비느라 놓쳤을 미세 먼지 없이 쾌청한 하늘, 겨울인데도 따끈하게 내려오던 햇빛, 가지런히 선 주택들이 만들어내던 골목 풍경들이 새삼 아까웠다. 맹추위를 피해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는 캐나다 ‘몬트리올 언더그라운드 시티’, 태양광 집광 시스템으로 식물이 자라는 지하 공원을 조성하는 뉴욕 ‘로우라인 프로젝트’ 등 세계 각지에서 땅 밑의 새로운 도시를 실험하고 있지만, 여전히 내게 지하는 도시의 일부라기보다 잘 만든 쇼핑몰, 혹은 어설프게 지상을 흉내낸 거짓된 공간으로 다가온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볼 수 없어 시간 감각을 잃게 하는 가상 공간을 닮은 것도 같다.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설계공모’의 수상작을 정리하며 문득 ‘강남권 광역복합환승센터 국제지명초청 설계공모’『( 환경과조경』 2017년 12월호 참조)의 당선작을 떠올렸다. 지상은 넓게 비우고 지하는 문화·예술 등의 프로그램으로 빼곡히 채운 전략이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대상지의 역사나 주변 맥락을 따져보니 같을 수 없다. 코엑스와 호텔, 업무 시설, 백화점을 주변에 둔 강남권 광역복합환승센터는 광화문광장과는 달리 항상 즐겁고 흥겨운 일이 가득한 곳일테다. 먼 훗날 또다시 촛불집회가 열린 광화문광장을 상상해본다. 결의에 찬 목소리로 가득한 땅 아래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지하 도시 역시 지상과 결을 같이 하게 될까, 아니면 계속 살아가기 위한 일상 공간으로 작동하고 있을까. 과연 광화문 광장 지하는 보행 통로를 넘어 하나의 도시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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