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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피할 수 없는 인문학과 종이책의 쇠퇴
  • 환경과조경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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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업은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고들 한다. 아마 올해보다 내년이, 내년보다 그 후년이 더 나빠질 게 분명하니 당분간은 더 들어야 할 이야기다. 우리의 희망과 무관하게, 종이와 활자라는 매체를 통한 지식의 유통과 습득은 거대하면서도 급속한 전환기에 접어들었다. 다만 우리가 어느 위치에서서 이 변화를 바라보고 있느냐가 관건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애도(또는 환영)는 잠시 접어두고 인쇄매체의 쇠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물어보아야 할 때다.

하이데거는 1946년에 쓴 ‘휴머니즘에 관한 편지’라는 글에서 휴머니즘이 처음 출현한 때를 로마공화정이라고 했다. 그리스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교양(paideia, 독일어로는 Bildung)을 로마의 덕으로 고양시킨 시기를 시작으로 보는 것이다. 15세기 르네상스의 인문학(휴머니즘)이 고대 그리스 로마인이 남긴 글과 유산에 대한 화답이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설명이다. 르네상스를 고전의 부활로 아는 우리의 상식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책은 인문학과한 운명이었다. 사실 르네상스 이래 인문학은 휴머니즘, 달리 말해 고전을 통해 인간성을 고취하고 더 나은 인간을 만들고자 한 거대한 기획이나 다름없었다. 책은 이를 실현하는 최고의 도구였다. 보다 나은 정치 체제를 만들어 인류 일반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열망이 아니라면 우리가 무엇하러 플라톤과 루소, 홉스, 그리고 마르크스를 읽겠는가? 같은 언어를 쓰고 비슷한 감성과 정서를 공유하는 공동체를 꿈꾸게 하는 데 소설과 책 이상으로 효율적인 것이 무엇이 있었던가? 인간의 삶과 관계하기에 역시 인문학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건축과 조경 쪽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알베르티부터 르 코르뷔지에에 이르기까지 보다 나은 공간과 환경을 향한 욕망이 아니었다면 저 책들이 쓰이기나 했겠는가? 그런데 하이데거는 고대인과의 우정 어린 대화로 미래를 꿈꿔온 인문학이 이제 한계에 달했다고 진단한다. 이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인 독일 철학자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인문학(책)으로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계획이 실패했음이 명백해진 지금 우생학이 그 역할을 하면 왜 안 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기실, 인문학의 프로젝트가 끝난 자리를 기술과 생리학이 대신하는 게 현재 상황이다.

MIT 미디어랩을 만들고 디지털 문명을 선도해온 네그로폰테Nicholas Negroponte는 최근 강의에서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십 년 전 등장한 최초의 터치스크린, 태블릿 등을 보여주며 지금의 디지털 혁신은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회고담만 늘어놓고 강연을 끝내자 조바심이 난 사회자가 무대로 올라가 질문을 던진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 까요” 네그로폰테는 지식 습득 방식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머뭇거리면서도 확신에 차서 이야기한다. 셰익스피어를 힘들게 읽어서 아는 게 아니라 먹거나 몸에 주입해서 단박에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한국의 사정도 이와 유사하다. 많은 통계에 따르면 현재 한국 출판 시장을 지탱하는 세대는 40대 이상이다(남성의 비율이 더 높다). 실용서나 특화된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책의 성패는 40대 이상의 구매에 달려 있다. 이는 단순히 한국 사회가 노령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지금 40대 이상은 80년대 학번과 90년대 초반 학번들이다. 한때 책을 믿었던 이들이다. 출판사 문 앞으로 대형 서점 트럭이 달려와 줄을 서서 책을 실어가던 사회과학 서적의 전성기를 경험했던 이들이다. 책을 통한 계몽과 사회 변혁을 꿈꾸었던 경험은 이후에도 꾸준히 책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관심사뿐 아니라 자녀들에게 가장 책을 열성적으로 사주는 세대다. 유아 시장의 급속한 확대와 축소, 청소년 시장의 탄생 등은 386세대 자녀의 성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이 열정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 이후 세대에게 책은 절대적 권위와 정보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라 수많은 매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세대는 또한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체득했다. 한국에서 출판 동향은 세대론과 나란히 간다.

전자책이냐 종이책이냐를 떠나 책을 읽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외부적 환경의 변화를 논하기 이전에― 저수많은 인문사회과학 책이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고담준론과 사회과학의 치밀한 분석으로 우리는 사회의 교양을 높이기는커녕 도처에서 생겨나는 괴물조차 막지 못했다. 지금 국내에서 책의 위기는 87년 체제를 이끌어낸 열망이 소진되고 냉소와 허무만이 남았음을 알리는 징표다. 플라톤과 루소는 우리의 정치를 조금도 나아지게 하지 못하고, 마르크스는 우리의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무기력하며, 100만 부나 팔린 샌델Michael J.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우리 사회를 정의롭게 하는 데 아무런 힘이 없다. 책이 말하는 이상과 발을 딛고선 현실이 도무지 만나지 않을 것 같은데 책을 읽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실제 삶을 바꾸는 데 아무런 힘도 없는 인문학이 자기계발과 과시용 지식이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 위기를 일찌감치 감지한 이들이 인문학의 실패를 말했을 때부터 책의 쇠퇴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셈이다. 1960년대를 기점으로 인쇄 매체는 영상 매체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레지스 드브레Régis Debray가 일찌감치 진단하지 않았던가. 이제 누구도 인문학-종이책-자국어-계몽이라는 패러다임이 쇠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종이책이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음원의 시대를 맞아 LP가 역설적으로 부활한 것처럼, 물성의 힘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이사할 때마다 책이 제일 무겁고 부피가 크다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책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읽고 쓰고 고뇌하고 떠들며 책을 ‘만드는’ 일을 사랑한다. 이 사랑이 골방에 파묻힌 아날로그 애호가의 페티시가 아니라 광장에 나가 다른 이들과 지식을 나누는 것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지 고민해야 할 때다. 이 물음에 답하기란 지극히 어려울 것이고, 모두에게 유용한 하나의 답도 없을 것이다. 다만 출판, 잡지, 신문 등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이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될 것은 분명하다. 책을 사랑하는 업보를 지닌 모든 이의 건투를 빈다.

 

 

박정현은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12년 『와이드AR』 건축비평상을 수상했다. 『에스콰이어』, 「한국일보」 등에 칼럼을 기고하며 도서출판 마티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1980년대 한국 건축의 담론 구성’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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