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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101, 설계를 묻다(14)
  • 환경과조경 2010년 3월

마무리의 시작
1년 넘게 허덕거리며 꾸려오던 연재의 릴레이를 마감할 시간이 왔다. 타고난 글쟁이들이 아닌 탓에 매달 원고 마감이 다가올 즈음엔 으레 필자들 사이에 한숨과 안타까움이 배어있는 문자들이 오고갔다. 뚜렷한 정답 없이 키워드만 던져놓고 시작한 터라 매달 컴퓨터의 하얀 화면이 주는 막막함을 독대하고 앉아있던 기억의 깊이만큼, 이제 손에 꽤 두툼하게 잡히는 과월호 원고뭉치가 주는 부끄러운 기쁨도 느낀다. 연재를 마무리짓는 마지막 글을 위해 지난 열세편의 원고들을 훑어보니, 새삼스럽게 연재 전체의 제목이 “설계를 묻다(bury or question)”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묻혀져있던 설계에 관한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묻는" 과정은 엉켜있는 막막함을 노출하고 구조화하는 작업이었다. 프롤로그에서 정욱주 교수는 열두 가지 키워드를 위한 질문들을 쏟아내었다. 연재의 기획과 잘 맞았던 오프닝에 걸맞는 마무리라면……. 에필로그에서는 열두 가지 질문꾸러미에 대한 해답들을 정리해주어야하는걸까라는 의문이 내내 부담으로 다가왔다. 아마 1년이 넘는 시간을 통해 우리들은 질문만을 던졌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의도가 교과서적인 해답보다는 설계에 대한 정체모를 답답함과 어려움을 12개의 키워드를 통해 쉽게 들여다 볼 수 있는 틀을 제시하고 질문의 형태로 막연함을 실체화하는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들이 조경설계에 대해 지금까지 느꼈던 여러 과정을 들여다보고 문제를 정의함으로써 스스로의 공부하는 과정을 드러내고 공유한 셈이다.

101은 과목의 위계상 가장 처음 배우는 “입문과정”을 의미한다. 2학년으로 올라가면 201, 202, 3학년이 되면 301, 302…… 이러한 순차적 교과과목 숫자를 제목으로 채택한 이유가 후속편에 대한 암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미안하게도 201, 301, 401의 속편들은 설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산해야하는 텍스트라는 점을 얘기하고 싶다. 아이들이 세계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하는 일들은 세계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여과시키지 않은 원초적 질문들이다. 조경설계라는 세계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중요한 것 역시 우리 주변의 외부환경에 대한 애정어린 관찰과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일이라고 응용한다면, “설계를 묻다”의 마무리 역시 해답꾸러미보다는 또다른 층위로 진화된 질문들이어야 하지는 않을까.


12개의 질문종합세트
1년을 염두에 두고 기획한 것이라 당연히 12개의 키워드가 선정되었다. 프롤로그에서 제시했던 키워드들은 필자들의 생각의 진화과정에 맞추어, 재현과 표현이 합쳐지고 소통이 사라지고 프로세스와 설계도구가 추가되면서 조정되었다. 각 키워드를 가지고 1년의 달력을 만들면 각 달마다 어떤 그림과 문구가 좋을까하는 우스운 생각도 든다. 정리하는 의미에서 지난 글들의 제목들을 모아보니 다음과 같다.

개념: 휘발성 개념에서 촉각적 개념으로
정체성: 개성, 전통 그리고 한국성
형태: 보이지 않는 것도 디자인하는 형태적 상상력
프로그램: program is air
디테일: 작은 것에 대한 상상이 갖는 큰 힘
질감: 재료와 인간과의 교감
재현: 드로잉과 상상력, 공간의 삼각관계에 대한 추적
리빙시스템: 문화적 산물로서의 생태적 디자인
스케일: 조경설계에 있어서의 스케일
프로세스: 시간축의 공간화
대상지 분석: 대상지라는 텍스트 읽기
설계도구: 자유 혹은 구속

열두 가지 화두를 관통하는 공통의 가치나 지향점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필자들 사이의 관점과 생각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몇 가지 바탕에 깔고 있는 근원적인 가치는 복사한 것만큼 일치하였다. 12개의 글들은 모두 궁극적인 설계의 지향점이 설계도면 그 자체가 아닌 실제로 지어지는 실체적 경관 혹은 공간으로 향해야하며 공간의 진정성은 설계가의 태도로부터 비롯된다는, 어찌보면 뻔한 결론의 열두 가지 버전이다.
언어유희적인 개념이 공간화되지 못하는 세태에 대한 걱정, 자아의 실천적 정체성이 아닌 형태적 모방에 그치기 쉬운 전통과 한국성 논쟁의 허무함에 대한 우려, 평면적 도면 효과와 형태 자체에 집착하는 경향에 대한 경계, 강요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유도되는 공간의 자연스러운 프로그램 연출력에 대한 욕망, 기계적으로 형식화된 디테일이 부르는 문제점들에 대한 지적, 공간의 풍부한 질료성과 느낌, 재료와 사람이 만나는 승화된 관계를 질감을 통해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 현실에 근거한 상상적인 드로잉이 가질 수 있는 폭발적인 힘과 그 재현의 방식이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암시, 과학적 이론이 아닌 문화적 실천으로서의 생태적 디자인으로서의 통합적 리빙시스템 개념의 제시, 규모와 스케일에 맞는 새로운 설계실천방식에 대한 고민, 기계적인 단계별 계획이 아닌 조경공간 자체에서 비롯되는 섬세한 시간성의 물화방식으로서의 프로세스, 형식적인 절차가 아닌 설계의 핵심적인 단서를 찾는 조건의 해석과정으로서의 대상지 분석, 그리고 마지막으로 설계가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킬 수 있는 설계도구의 가능성……. 이 모든 것이 보다 진정성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다각도의 검증방식이었다고 하면 너무 허무한 일반화일까?

많은 조경설계가 그 뻔한 결론을 잘 실천하고 있지 못한 데에서 오는 무기력증에 너무 쉽게 적응해버린 것은 아닐까. 설계의 결과물이 실제로 만들어지는 경관과 공간과의 끊임없는 관계성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종이 혹은 모니터 위의 덧없는 시각적 유희에 그칠 수밖에 없음이 우리를 조바심나게 한다. 엄청난 가속도로 양적 팽창하는 우리 조경설계의 상황이 양질전화의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기 위한 실제적인 점검과 준비와 실행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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