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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로 보는 조경이야기(4): 옥상정원. 채워진것과 비워진 것(1)
  • 환경과조경 2010년 4월

이론과 실전: 데리다 좀 그만 데려다 놓지?!
라 빌레뜨 공원(parc de la villette)으로 촉발된 해체주의의 광풍은 1990년대 말의 건축계를 뜨겁게 달군다. 기존의 구조를 해체한다고 하는 츄미(Bernard Tschumi)의 당선작은 해체주의(deconstruction)로 이름 지어진다. 대체 무슨 구조를 해체한다는 것인지? 라는 의문으로 시작되는 공부는 러시아 구성주의부터 시작하여 데리다(Jacques Derrida)와 푸코(Michel Foucault)로 이어진다. 저 유명한 라 빌레뜨의 폴리는, 푸코의 광기와 켤레를 이루어 담론을 형성한다. 이제 형태를 이야기하면서도 모든 이들의 시선은 그 너머에 있는 철학가와 그들의 이론들을 향하고 있다. 그들의 이론들은 이제 많은 이들의 작품에 연이어 반복 사용된다. 문득 떠오르는 단순한 질문, 작품을 이해하기위해서 철학의 이론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처음 한두 번은 그렇다 치더라도 해체해야만 하는 근대적 의미의 구조라는게 애시 당초 없는 우리 한국의 실정에서, 어째서 그것이 연이어 반복 재생산되어야 하는가? 도대체 무엇을 해체한다고 하는 폴리인가? 설계가에게 이론의 역할은 무엇인가? 훌륭한 이론이 훌륭한 설계를 만드는가? 새로운 이론이 참신한 설계를 담보하는가? 이론과 실전사이 불확실한 좌표위에서 디자이너는 과연 어느 지점에 있어야 하는가? 이 같은 혼란속에서 당시 쏟아져 나오는, 마냥 비슷하기만한 작품들을 보며 ‘이제 제발 데리다 좀 그만 데려다 놓고 네 이야기 좀 해보라’고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패널 한 가득을 채우고 있는 사변들뿐이다.
작품을 작품으로 설명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눈을 아래로 돌려 학생 설계를 볼라치면 더욱 가관이다. 작품을 이야기하는데, 무턱대고 “삭막한 콘크리트 숲이…”로부터 시작한다.
제 아무리 지구를 구하는 개념이 있더라도 작품에 그것이 나타나지 않으면 차라리 시를 쓰지 대체 뭐하러 설계를 하는가? 어떻게든 이론에 기대어서 설계를 포장해보려고 하는 비굴함이라니!…, 어쩌면 지금 문제되는 의미과잉의 습성은 이미 그 시절부터 잉태된 것은 아닐지 조심스런 의문도 가져본다.

냉소적이기만 한 필자의 태도는 그 자체만으로 당시의 주류를 거스르는 위험천만한 생각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솔직한 고민이었고, 어떤 의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각 장르의 방법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디자인이라는 장르에서는 그 방법이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해야 익힐 수 있는 것일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남의 작품들을 사례로 하여 그 방법을 역으로 유추해보는 것일 테다. 바로 이 영역에서 구조주의는 좋은 방법으로 사용된다. 다만 언제나 실행이 문제인 법, 그를 위한 이론은 사실 책 한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같은 성취는 문학의 동네에서 일찍이 있어왔다. 국내에서는 구조주의 문학비평의 대가 이어령의 서시 분석이나 기빨, 처용가, 단심가와 하여가의 구조비교 등을 대표적인 성과로 들 수 있겠다.

채워진 것과 채우는 것 사이의 이야기
빌라 사보아? 근대건축의 거장 르 꼬르뷔제의 대표작 빌라 사보아? 조경잡지의 연재에서 분석한다는 건 어째 어울리는 그림이 아닌데? 라고 한다면, 부디 그 생각을 조금만 접으시길 바란다. 두 가지 이유에서인데 우선 첫째로는 애시당초 건축과 조경은 한 몸이기 때문이다(미켈란젤로의 캄피돌리오 광장에서 그랬고, 츄미와 렘 콜하스의 라 빌레뜨 공원에서 그랬다.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서는 FOA의 요코하마 페리터미널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 둘째로는, 공간을 조직하고 디자인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에는 건축의 선례를 빌어 이야기하는 것이 아무래도 더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빌라 사보아와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Roberto Burl Marx의 옥상조경과 비교해보자. 선뜻 머리에 스치는 재현과 표현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현재까지도 조경의 발목을 잡고 있는 회화적 조경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듯하다. 반면에 빌라 사보아의 옥상정원을 보고 있노라면, 도덕경에서 노자가 설파한 공간론을 애써 소개하지 않더라도, 비워진 것은 채운 것을 위해, 역으로 채워진 것은 비워진 것과 함께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겠다. 채워진 방들이 옥상정원을 둘러싸고는 있지만, 옥상정원의 모양과 그 내부의 요소들은 또한 다시 그 주변과의 관계에 의해 같이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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