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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상수시(Sansoucci) 정원
  • 환경과조경 2004년 6월
 상수시 정원과 프리드리히 대왕 상수시 궁전은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24km 떨어진 포츠담에 있다.
 포츠담은 브란덴부르크 주의 수도이기도 하고, 1945년 ‘포츠담 선언’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지명이다. 포츠담에 가려면 베를린에서 S-bahn 3번이나 7번을 타고 포츠담 슈타트에서 내려 91번이나 96번 트램을 타고 가다 루이젠프라츠에서 내려 약간 걸으면 된다. 총면적 287k㎡에 이르는 큰 규모의 상수시 정원은 워낙 넓어 상수시 공원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곳에 최초로 세워진 건물이 상수시 궁전이고, 이후 확장을 거듭하면서 다른 궁전과 정원 건축물 그리고 부속 정원들이 추가되었다. 흔히 프리드리히 대왕이라 불리는 프리드리히 2세는 1744년 상수시에 여름별궁을 세운다. 그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베를린을 수도로 정하고 1709년 정식으로 프러시아왕국을 선포한 왕이다. 그는 엄격한 전형적인 군인스타일의 왕이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이러한 부친과는 성향이 사뭇 달랐다. 그는 문예에 큰 관심이 있었고, 여성처럼 파마를 했으며 프랑스어를 즐겨 썼다. 남성우월적인 부친의 눈에는 너무 나약한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시를 읽는 것을 보고 지팡이로 때리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친구와 영국으로 도주하려다 발각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왕이 된 후 선정을 베풀었다. 고문제도를 금지시켰고, 베를린의 학사원을 부흥시켰다. 학자와 문인을 상수시 궁전에 초청하여 학문과 예술을 토론하게 하였다. 볼테르가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플루트를 연주하는 상수시의 철학자 제왕으로 불렸다. 그는 이러한 문화취향에도 불구하고 냉철한 정치가였다. 당시 프러시아는 강력한 왕권을 자랑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 테레사는 프리드리히 2세를 냉혈한이라 표현했을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의 걱정은 한낮 기우였다. 프랑스 문화에 심취해 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상수시궁전을 만들면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삼았다. 로코로식 궁전과 기하학적 정원공간의 구성은 베르사이유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수시 궁전은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소박하다. 포도덩굴의 정원은 다른 정원에서는 볼 수 없는 상수시 정원만의 독특한 스타일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왕위를 물려받은 직후인 32세 때에 건축가 크노벨스도르프를 시켜 거친 언덕이라 불리는 곳에 궁전을 만들게 한다. 포도나무 덩굴로 덮인 테라스 정원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직접 스케치한 구상을 실현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정원 애호가였고, 그의 이러한 취향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왕비는 베를린에 있는 몽비쥬라는 여름별장에 정원을 만들어 가꾸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장식을 싫어하여 베를린과 포츠담 성의 정원을 과일과 채소들을 가꾸는 정원으로 개조하였다. 실용적인 목적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런 부모의 상반된 취향을 받아들여 포도나무 테라스라는 새로운 정원을 창조하였다. 포도나무들이 햇볕이 잘 받을 수 있도록 언덕의 지형을 이용하여 테라스를 만들었고, 테라스의 형태도 포물선 모양으로 만들었다. 미학적 아름다움이 실용적 목적과 교묘히 결합된 것이다. 그의 명성을 유럽에 드높인 7년 전쟁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상수시 정원을 새롭게 확장한다. 상수시 궁전보다 보다 큰 신궁전을 건축하고 벨베데레라 불리는 건축물과 폐허의 산이라 불리는 조형물과 중국식 찻집을 만든다.
 신궁전은 보다 강력해진 왕권을 표현하기 위해 상수시 궁전보다 웅대한 스케일로 지어 왕족들과 손님들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폐허의 산은 상수시 궁전에서 바라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본 따 만든 인공의 폐허로서 신전의 흔적과 건축물의 기둥들이 서있다. 당시에서 상수시 궁전의 대리석 홀에서 손님들과 만찬을 하면서 로마식 폐허를 바라보며 고대 철학자의 이름을 들먹이며 담소를 나누었다 한다.
 중국식 찻집 정원은 가장 기이하고 매력적인 건축물로서 숲 속에 숨겨져 있다. 중국예술은 로코코 시대에 매우 인기가 높았다. 중국 비단으로 몸을 두르고, 중국식 문양의 벽지로 실내를 꾸미고 중국 도자기로 차를 마시곤 했다. 상수시의 중국식 티 하우스는 당시의 귀족 취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다른 어느 정원건축물보다 화려하고 아름답다. 덤불들이 가려진 숲 속에서 중국식 정자를 보게 되면 마치 동화 속 나라에 들어온 착각이 든다.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상수시 정원은 하나의 소우주였고, 내면으로 침잠하는 비밀의 정원이었다. 그는 이 곳에 그가 좋아하던 개들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는 강아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이 곳에는 10마리의 애견들이 묻혀있을 정도니까. 아마도 불행했던 결혼생활 때문이었기에 애견에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애정 없는 정략결혼을 한 후 그는 왕비와 별거한다. 왕비는 다른 곳에서 생활하였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평생 자식이 없었다. 상수시 궁전은 프리드리히 대왕과 손님들의 처소로 사용되었다. 세상을 얻었지만, 사랑을 얻지는 못했나보다. 그는“나는 철학자로서 살았다. 화려하지 않게 아무런 의식 없이 상수시에 잠들게 해다오”라고 말했단다. 그러나 당대에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후손들은 그러한 초라한 장례식을 원치 않았고, 그를 부친의 묘소 옆에 묻었다. 다행히 한참이 지난 독일이 통일된 후 1991년,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시 이 곳 상수시에 돌아와 묻히게 되었다.
 이제 그는 ‘근심 걱정 없는’ 상수시(san soucci는 불어로 without worry라는 뜻이다)에서 편안한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조 경 진 Zoh, Kyung Jin
서울시립대학교 건축도시조경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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