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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이 있는 풍경
  • 환경과조경 2004년 12월
불로문, 문이 있는 풍경을 위한 치밀한 계획 우리의 전통문화를 생각할 때 “자연과의 조화와 자연에 순응”이라는 사실을 빼놓을 수 있을까? 다듬은 듯하지만 한쪽 귀퉁이가 일그러진 토기며 질그릇, 초가지붕에 덩덕실 올라가 있는 박 덩이나 다듬어지지 않은 원재료의 모양 그대로 휘어진 채로 세워진 기둥이라든가 하는 등등의 모습들이 그로써 연상되는 이미지들이 아닌가 싶다. 굳이 전통조경에 국한된 일이 아니더라도 자연스러움을 잘 표현했거나 자연스러운 형상을 즐겨했다는 사실이 우리 전통문화의 한 특징이라는 이야기다. 아무리 소박하게 만들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일종의 프로세스가 있기 마련이다. 즉 솜씨 좋은 손끝을 이용하여 그릇을 만들어가거나 돌을 다듬어 석상을 만들며 정으로 돌을 쪼아 석조형물을 만들어 가는 동안, 떠오른 착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머리 속으로 그려가는 것처럼 어떤 방식으로든 디자인과 실행의 과정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당연한 과정도 일종의 설계 프로세스라 할 수 있다. 창덕궁 후원의 불로문은 애련지 쪽으로 들어가는 원지의 출입문 같기도 하고 단독으로 세워진 조형물 같기도 하다. 문 따로 담장 따로 각각 별개로 만들어졌을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우리가 바라보는 불로문 역시 문 따로 담장 따로 바라보지는 않을게 아닌가. 불로문이 그냥 담장에 걸쳐있는 하나의 문에 불과하게 보이기에는 이 주변에 울창한 숲이 있고, 게다가 연못이며 수로까지 걸쳐 있으니 불로문을 감상함에서 문 자체만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지하철 경복궁 역 구내에 세워놓은 불로문 복제품이 창덕궁 후원의 원조 불로문과 여러 면에서 비교되는 것은, 그것이 복제된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문은 그것으로 하나의 조형물이 되기에는 담장과의 관련성이 너무나 짙게 연계되어 있고, 담 주위며 그 안팎의 풍경이 함께 하는 것이기에 전철역의 불로문은 그것 하나만으로 서 있음으로 해서 초라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서서 주합루 부용지 일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자유시간을 가진 뒤 연경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지금까지의 관람 코스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이제 옥류천 쪽으로도 개방되었다하니 최소한 스쳐 지나가는 발치에서도 불로문은 그를 위시한 풍경과 함께 하나의 점경물로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겠는가 싶다. 통으로 돌을 다듬어 조형해 놓았기에 무미건조할 정도로 단순한 형태와 통째로 다듬은 돌의 크기를 셈하여 보면서 우리의 전통조형물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대상임을 느껴본 사람들도 적지 않으리라.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불로문은 그냥 단순무식하게 네모난 테두리를 만들고 모를 둥글게 죽여서 만든 그런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작도된 일련의 도형의 바탕에서 높이와 폭, 그리고 문 꼴의 두께며 그 옆으로 이어진 담장의 규모와도 잘 짜 맞추어진 정교한 디자인에 의거한 조형물이 아니겠는가 하는 이야기다. 디자인은 독창적인 구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구상이 구체적인 조형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머리 속으로 그려오던 문의 모양이며 담장과의 비례며 그리고 문의 안과 밖의 대지의 미세한 높낮이까지 고려한 제작과 설치의 과정이 필요하다. 불로문을 분석해보면 빈틈없이 잘 맞아가는 일사불란한 도형이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불로문을 분석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주위의 지인들로부터 두 종류의 되물음을 받곤 한다. “정말 그럴까?” 어쩌면, 꼭 묻고자 하는 의도라기보다는 생각 밖의 경우를 만나, 그냥 툭 던져 보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정말 그렇고 아니고를 떠나 그림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신반의하는 것은 자로 잰 듯 도형을 그렸고 거기에 맞추어 치밀하게 도안된 것이 아무래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조화와 순응의 법칙, 또는 그에 따른 무심함이 베여있을 모습과는 너무 거리가 있기 때문이니 무리한 이야기도 아니다. 다른 한 가지의 반응은, “왜 그렇게 했을까?” 하는 이야기다. 물론 그 앞에는 ‘정말 그렇다고 치더라도’ 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보더라도 신빙성이 결여된 것 같다는, 보다 의구심이 짙게 묻어있거나 혹은 그게 사실이라 생각할 때 정말 왜 그랬을까 싶어 몹시 궁금해 하는 되물음이다. 우리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의구심을 풀기 위함이 아니라 순리적인 유추를 위하여 이런 자문자답을 해 볼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정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또는 그렇게 할 경우 어떤 효과적인 결과를 취할 수 있는가? 정 기 호 Jung, Ki Ho·성균관대학교 건축·조경 및 토목공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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