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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하게 포위당한 세계적 스텔라 조각품
  • 환경과조경 2004년 12월
- 포스코의 비문화적 눈높이 -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의 눈에 서울은 어떤 인상으로 비칠까. 아마도 그저 특별한 감흥 없이 세계 곳곳에 있는 많은 대도시 중 하나쯤으로 보일 것 같다. 외국 방문객용 홍보물에서는 서울이 동서양 문화가 만나는, 역사가 스며있는 고도(古都)라고 한다. 하지만 고풍스러워야 할 옛 건축물은 600년의 긴 역사에 비하면 별로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할 것이며, 서울의 거리 풍경을 주도하는 현대식 건물들도 몇몇 빌딩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건축예술의 감흥과는 거리가 멀다 싶다. 굳이 유럽의 고도까지 가지 않더라도 비교되는 나라가 있다. 유지 관리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특징을 지닌 옛 건물들이 즐비한 네팔의 고도 박타푸르(Baktapur) 또는 수도 카트만두(Kathmandu) 같은 도시들이 있는 것이다. 1995년, 서울 강남지역 테헤란로에 포스코(POSCO)빌딩이 새로 들어섰다. 빌딩 외벽이 투명한 유리여서 내부의 철물골격이 의도적으로 훤히 보이도록 설계되었다. 포스코의 웅장한 현대식 빌딩은 그 자체가 거대한 예술 조각품 같아서 많은 시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유리와 철골로 구조된 거대빌딩이 뿜어내는 ‘낯설고 싸늘한 느낌’은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었다. 그 안에서 일하고 생활하는 사람들의 끈끈하고 훈훈한 성정(性情)과 약간은 거리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어서 1997년, 가로 세로 높이 약 9m에 이르는 스테인리스 철물 조형물이 포스코 빌딩의 정면 넓은 광장가운데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20세기 추상 미술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거장 후랑크 스텔라(Frank Stella/1936~)의 ‘꽃이 피는 구조물’, 일명 아마벨(Amabel) 이라는 작품이 아닌가. 서울 시내 수많은 빌딩 앞에 설치된 다양한 조형물들이 작품으로서의 예술성 여하를 묻기에 앞서 건물 본체와 조화되지 않는 예가 허다했다. 주변 경관과 어울리기는커녕 괜 시리 짜증스러운 느낌 마 져 주는 것을 일반 시민으로서의 눈높이에서도 쉽사리 동감할 수 있었다. 이처럼 문화적 감각이 메마른 상황에서 포스코 빌딩 앞에 설치된 후랑크 스텔라의 ‘꽃피는 구조물’은 실로 가뭄 끝에 내린 단비처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건물 전면이 유리외벽과 노출된 철 구조물로 짜여져 있는 포스코 빌딩과 거대한 고목(古木)을 연상시키는 스텔라의 작품은 일단 잘 어울렸다. 세자르(Baldaccini Cesar. 1921~1998)의 각종 폐차(廢車) 부품을 압축하여 만든 작품과도 맥락을 하는 폐차나 폐기된 비행기의 스테인리스 폐구조물을 이용하여 만든 후랑크 스텔라의 조형물이 빌딩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포스코 빌딩과 스텔라의 조형물과의 조우 결과, 빌딩의 기하학적 구도에서 오는 날카로움과 차가움에 작품의 무질서한 형상이 더해짐으로써 불균형 안에서 균형(Balance in Unbalance)이라는 독특한 미를 발현하였다. 따라서 많은 국내 미술 애호가들은 포스코가 갖추고 있는 국제적 기업으로서의 안목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1997년 전후 정권 교체와 더불어 포스코의 경영진이 바뀌면서 후랑크 스텔라의 「아마벨」은 수난(受難)을 맞게 된다. 「아마벨」에 대해 일부에서 예술품이 기 앞서 ‘흉물’스럽다느니 심지어 ‘추악’하다느니 하더니 철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는 것이다. 이에 세계적인 예술가의 난해한 작품을 설령 이해할 수 없다고 일방적으로 ‘추악’ 한 것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문제라는 주장이 맞섰다. 이 모든 소동은 포스코가 아마벨을 현 위치에서 철거하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후 다시 6년여의 세월이 흐르면서 「아마벨」은 차츰 우리 곁에서 친숙해져 왔다고 믿었다. 그런데 최근 「아마벨」이 소나무 숲에 의해 포위당해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야말로 추한 몰골이 되어버렸다. 무참하기 이를 데 없는 비문화적 폭거가 따로 없는 듯싶다. 이제 작품 「아마벨」은 소나무 울타리에 ‘감금’ 되어 버렸다. 눈에 걸리는 것을 당장 치워버리지 못하니 적당히 가리기라도 하겠다는 포스코의 비신사적 자세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한국 저작권법 13조와 미국저작권법 제16조는 모두 저작인 인격권의 하나인 동일성 유지권을 인정하고 있다. 작가의 동의 없이 작품을 이전하다가 작품이 파손된다면 저작권법 상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아마벨」의 경우 작가 후랑크 스텔라가 설치 위치를 결정하기 위해 두 번이나 답사하였고, 작품 주변에 야간 조명의 설치마저도 동의하지 않았을 정도였다는데, 지금 그의 작품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알게 되면 어떠할까? 과연 포스코가 저작권법에서 자유스러울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포스코는 작품의 소유권과 저작권이 별개임을 모를 리 없을 터인데 말이다. 어떠한 예술품을 놓고 감상하는 자에게 작품이 난해하다고 또는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고 해서 제거한다면, 이는 남의 의견을 전혀 들어 보려하지도 않는 마음가짐과 같다. 예술품을 통해 남의 생각을 경청하려는 포용력(tolerance)를 기르는 것은 예술품이 가지는 순기능중의 하나이다. 이해하기 어렵다고 흉물이라고 하는 논리는 비문화인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이다. 문득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이 R.Mutt 라고 서명한 작품「남자 소변기」(1917)가 떠오른다. 우리는 누구나 공감하는 곱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이 예술에 속하고 그 부류에 들지 않으면 예술이 아니며 ‘저질’ 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이른바 흑백 논리적 사고 방식에 익숙한 것 같다. 아마벨의 수난도 그러한 의식에서 비롯된 사건이 아닐까. 포스코의 「아마벨」 보다 더 녹슨 고철로 제작된 작품들이 가까운 일본이나 먼 룩셈부르크에서는 변함없이 소중한 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사진 참조) 파리의 명물 에펠탑이나 시드니의 오페라 전당도 처음부터 사랑을 못 받았다. 따라서 우리도 「아마벨」을 옛 모습 그대로 우리 곁에 가만히 두고 사랑을 키워 봤으면 하는 것이 많은 미술 애호가들의 뜻인 줄 안다. 이 성 낙 Lee, Sung Nak·가천의과대학교 총장, 미술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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