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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의 맛, 게으른 피크닉을 꿈꾸며
당신의 공원은 어디입니까?
  • 환경과조경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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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나마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앉아, 
먹고 마시고 쉬며 수다를 떠는 걸 좋아하는 건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회사를 그만두고 오롯이 백수였던 시절이었다. 출근을 하지 않으니 자유로워진 평일 오후, 한 대학 캠퍼스의 넓은 잔디밭에 나와 앉았다. 그 당시 하늘은 넓고 푸르렀고 눈앞에서 낮게 넘실대는 녹색 풍경이 무척 아름다웠던 기억이 선명하다. 게다가 함께 있던 친구가 바로 그 잔디밭으로 짜장면을 시켰다. 야외인데도 음식이 배달된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했고 심지어 그 상황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날 이후 ‘풀밭 위의 식사’는 나에게 여유의 상징처럼 각인되었다. 그런데 누군가 ‘화창한 평일 오후에 자연 속에서 맛있는 식사도 했으니 행복한 기억이겠구나’라고 묻는다면 글쎄, 선뜻 답하기 어렵다. 그 감정은 불안과 낯섦 사이를 오간다. 백수 신분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탓일까. 노동이 신성시되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강박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작년 가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벌어졌던 ‘멍 때리기대회’가 언론의 화제가 되었던 것은 아마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냥 ‘쉼’을 견디지 못하는(혹은 인정하지 않는)이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 일을 떠올리게 된 것은 K 때문이다. 이번 특집 주제를 찾느라 고민 중인 나에게 그녀는 공원의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 광교호수공원을 방문한 그녀는 예전에는 놀이 공원에서나 먹을 수 있던 솜사탕과 추로스를 발견한 덕택에 이 공원에 대한 좋은 기억을 남겼다는 것이다. 추로스라니! 막대 모양의 페이스트리 반죽을 기름에 튀겨낸 이 스페인 전통요리의 쫄깃한 식감, 그걸 들고 다니던 놀이 공원의 한 장면, 설탕이 솔솔 뿌려져 있어 달착지근하고 끈적끈적해진 손의 느낌까지 여러 가지 기억이 호박넝쿨처럼 끌려나온다. 솜사탕은 어떤가. 고운 설탕실로 만들어진 솜뭉치의 인공적 맛이야말로 야외의 맛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과연 광교호수공원에서 갖가지 모양의 솜사탕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아, 요즘 아이들은 좋겠다. 우리 때는 하얀색과 분홍색의 단순한 솜사탕 밖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오리, 꽃, 눈사람 등 믿을 수 없는 모양과 세련된 색상의 솜사탕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얼마 전부터 솜사탕이 불량식품이라는 민원에 광교호수공원에서 판매가 금지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K의 주장은 장소와 연결되는 음식, 어떤 공간의 경험을 완성시키는 맛이 있다는 것이다.


미각, 공감각적 경험의 시작

최근 소위 ‘먹방’이나 요리 프로그램의 열풍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음식이 주는 즐거움은 일상적 경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야외 활동과 음식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만약 어떤 장소에 간다면 우선 ‘맛집’부터 검색한다. 혹은 등산을 하는 수많은 중년 남성(?)들은 배낭에 막걸리를 챙겨 넣는다. 산 정상에서 막걸리 한 잔을 마셔야, 아니면 하산 길에 도토리묵에 살얼음 동동주를 먹어줘야 비로소 등산을 마무리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계곡에서는 백숙, 고속도로에서는 호두과자, 소풍에는 김밥… 예는 수없이 많다. 우리는 음식을 보고 공간을 떠올리고, 어떤 장소에 갈 때 특정한 음식을 맛보길 기대한다. 미각은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의 감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술을 예로 들어보자. “알코올은 분위기 설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알코올이 우리의 기분을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하고, 그것은 자주 그렇게 한다. 이완과 흥겨움을 나타내는 표시로서의 알코올은 심지어는 술을 마시기도 전에 몸에 해방을 준비한다.”1 우리가 야외에서 추구하는 미각은 필연적으로 다른 감각과 기억, 정서적 활동과 연관된다. 전통적으로는 화전놀이가 그런 예가 아닐까 싶다. 당시 젊은 남녀나 부녀자들은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경치 좋은 곳을 찾아 벌이는 꽃놀이를 기대하며 한동안 설레었을 것이다. 얇고 하얀 찹쌀가루 반죽 위에 진달래꽃이나 장미, 국화의 선명한 꽃잎이 올라간 화전의 맛은 어땠을까. 사실 화전의 맛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눈으로 먹고, 분위기로 먹고, 간만에 쐬는 콧바람에 이미 맛있게 먹을 준비가 되지 않았을까.


공원 계획과 음식

도시 공공 공간의 양적 팽창이 한계에 접어들면서 최근 좀 더 활기 있는 공공 공간을 위한 질적 변화에 대한 고민도 늘고 있다. 혹자는 공원에 필요한 것은 미술품이 아니라 음식을 제공하는 시설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실제 공원을 계획할 때는 음식과 관련된 활동에 대한 고려는 크지 않은 편이다. 피크닉장이나 캠핑장이 기본적인 시설로 계획되는 정도다. 미국의 도시학자인 윌리엄 화이트William H. Whyte는 그의 저서 『The Social Life of Small Urban Spaces』(1980)에서 공공 공간에서 사람들의 활동을 끌어들이고 싶다면 음식을 내놓으라고 권고했다. 특히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곳을 예민하게 알아채는 코를 가진 노점상은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음식은 사람들을 모으고, 음식이 있는 곳은 사회적 장소가 된다. 몇 개의 접이식 테이블과 의자만으로 커다란 시각적 효과를 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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