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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두 번째 이야기
  • 환경과조경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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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과 3D 프로그램 시뮬레이션, 그리고 투시도 콜라주는 유치원 선생님들과 의견을 교환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모형’이었다. ⓒ김아연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에 대한 발견

모든 설계 프로젝트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지적 탐구 과정으로 시작한다. 무언가를 조금 더 잘 알게 되면 꼭 그만큼 세상을 더 잘 보게 된다. 서울 중산층으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인생에서 겪은 경험의 폭이 넓을 리 만무하다. 모든 설계 과정은 그래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만나는 과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정 정도의 두려움과 공존할 수밖에 없나 보다. 설계 과정이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는 설계 작품 하나가 끝나면 그 전의 나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세상의 복구

청년 시절 난 그다지 어린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어린이가 불편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어린이집에 대한 논문으로 대학원 과정을 마치긴 했지만 학위 과정이 끝나자 그들에 대한 학구적 애정도 희석되었다. 지금도 종종 뜨끔한 점 중의하나는, 만약 나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나의 부모가 늙고 병들지 않았다면, 난 여전히 세상을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설계했을 것이란 점이다. 내 주변에 사회적 약자가 늘어가면서 세상의 불친절함에, 세상의 물리적 환경을 디자인하는 설계가들의 무심함에 느닷없이 화가 날 때가 많아졌다. 지금이야 훨씬 좋아졌지만 아이의 유모차와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다녀야 했던 수년 전의 도시 거리는 100m를 전진하기에도 버거울 정도였다. 노면은 울퉁불퉁했고, 각종 시설들이 툭하면 앞길을 가로막았고, 단차와 턱도 즐비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설계의 디테일은 작품의 미학적 완성도와 더 관계 깊다고 생각했다. 디테일이 사회적 배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서울시의 ‘공공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일에 참가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디자인 새마을운동’이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공공 디자인 가이드라인’은 이 사회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질적기준을 마련한 계기가 되었다. 취지로만 보자면 설계가의 자율성을 훼손한다기보다 설계가의 손을 벗어나있는 도시의 구석구석에 대한 촘촘한 점검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다. 젊고 신체 건강한 자는 세상의 크고 작은 돌부리들을 그저 뛰어넘어 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는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에도 누군가는 걸려 넘어지고, 작은 장애물 하나가 또 다른 누군가의 걸음을 가로막는다. 어리거나 나이 들거나, 몸이나 마음이 불편하거나, 세상의 지배적인 질서가 소외시킨 약한 자에게 세상은 여러모로 친절하지 않다.

평화로운 나라의 백성은 군주가 누군지 관심이 없고, 평등하고 안전한 사회에 사는 자는 법과 규제에 무심해도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는 법이니, 가이드라인과 규제가 강화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사회가 규제없이 굴러가기에는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도 어린이와 관련하여 몇 개의 논문을 쓴 것이 밑천이 되고 아이를 직접 키우면서 위험한 세상에 대한 엄마의 본능적인 의구심이 더해진 탓에, 어린이 놀이 환경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축적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학생 시절의 관심이 개념적이고 학술적인 것이었다면 이제는 오히려 구체적인 아줌마의 관심일 터이다. 그래도 유아교육 전문가가 아닌지라 어린이 공간은 어린이 전문가와 함께 설계하는 것이 마땅하다. 놀이 환경 설계에 있어서 어린이들을 직접 만나고 선생님들과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나도 한때 어린이였으니 어찌 보면 잘 알지 못했던 세상이라기보다 잃어버린 세상에 대한 기억을 되찾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어린이를 위한 공간을 설계할 때는 그만큼 더 눈높이를 낮춰야 하고, 그만큼 더 유치해져야 하며, 그만큼 더 쪼잔해져야 하고, 그만큼 더 인내심이 필요하다.

어느 해 공원 설계 수업에서 서로 다른 열 명의 역할을 주고 그의 관점으로 공원을 분석하는 과제를 내주었다. 청소년 한 명, 중년 남자 한 명, 애기 키우는 엄마 한 명, 할머니 한 명 등등. 그중 한 명은 어린이의 눈높이인 지상 90~100cm 정도에서 공원 전체를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관목이라고 부르는 식물이 아이의 눈앞에 거대한 수벽으로 펼쳐졌다. 반면 어른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구멍으로 어린이들은 런닝맨 놀이를 하며 뛰어다녔다. 배치도를 전제로 하는 고정된 성인의 시각을 벗어나서 본 세상은 정말 위험한 전투장일 수도, 혹은 무엇이든 가능한 신세계일지도 모른다. 설계가 일단 시작되면 가급적 검증된 관점과 검증된 레퍼토리와 검증된 도형에 의존하고 싶은 욕구와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예전에 누군가가 그랬다. 노인이 고집스러워지는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그때까지 쌓아온 삶이 전부 무너지는 느낌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계가에게 자기부정은 생각만큼 멋진 피드백 프로세스가 아니다. 하지만 반성과 성찰이 삭제된 작업은 자신의 잠재성을 스스로 굳혀버리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마치 접착제로 붙여버린 레고 블록처럼!1 나를 돌이켜보는 성찰 과정은 나의 잘못만을 반성하는 일은 아니다. 내 작업 과정에 접착제로 붙어있는 부분들을 찾아 필요한 만큼 해체하고, 검증된 조립 설명서 외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도록 레고 블록을 스스로 해체하는 일, 즉 창조를 위한 파괴 작업이 설계적 반성 혹은 설계가의 성찰의 목표이자 방법일지 모르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당연하게 여기던 질서를 새삼스럽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동 대학원 및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건축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미국Stephen Stimson Landscape Architects와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디자인 로직에서 실장으로 일했으며, 국내외 다양한 스케일의 조경 설계를 진행해왔다.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과 커뮤니티의 변화가 가지는 시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느슨한 설계 집단 스튜디오 테라의 대표로서 조경 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 사이를 넘나드는 중간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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