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찰스 랜드리와의 아주 ‘평범한’ 인터뷰
진격의 ‘창조 도시’, 그 다음은 무엇인가?
  • 정종은
  • 환경과조경 2014년 8월


ICH02-1.JPG
ⓒ메타기획컨설팅

 

창조 도시의 주창자로 알려진 찰스 랜드리Charles Landry(Comedia 대표)와 메타기획컨설팅(이하 메타)의 인연은 약 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 메타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추진단이 개최한 국제 콘퍼런스에 『The Creative City: A Toolkit for Urban Innovator』라는 저서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랜드리를 초청하는 작업을 도 왔다. 이후 그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인 『The Art of City-Making』의 한국어판인 『크리에이티브 시티 메이킹』 출간을 기획했고, 대구, 부산, 서울, 광주 등에서 랜드리를 초청할 때마다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면서 관계를 돈독히 해왔다. 이번 전라북도에서 개최한 콘퍼런스를 앞두고도 랜드리는 자신의 일정을 미리 공유하면서 서울에서 다시 한 번 메타 식구들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2014년 6월 9일 오후 4시 반 용산역에서 시작되어 자정에 가까운 시간까지 진행된 이 밀착 인터뷰는 기존의 포럼·콘퍼런스·세미나 등에서 이루어졌던 공식적인 인터뷰 형식이 아니라 함께 먹고 마시고 산책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궁금한 내용을 서로 묻고 답하는 아주 평범한, 그래서 더욱 특별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용산역에서 서머셋 호텔로: 랜드리의 전북 방문기

몸집이 큰 백인 사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고 약속 장소로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랜드리 대표님이시죠.” “오, 반갑습니다. 전화했던 정 부소장이신가요” “네, 이쪽으로 가시죠.” KTX를 타고 용산역에 막 도착한 랜드리와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역 앞 광장으로 내려갔다. 길을 건너 신속하게 광화문 방향 택시를 타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갑자기 랜드리가 발걸음을 멈춘다. “와우, 저기를 좀 찍어야겠어요!” 용산역을 올려다보면서 이곳저곳을 끊임없이 자신의 갤럭시 스마트폰에 담는다.

택시에 올라서도 랜드리의 사진 찍기는 멈추지 않았다. 간판, 길거리, 나무, 독특한 건물들… “저게 국보남대문이죠? 저쪽으로 가면 서울시청이 있고요. 여기가 어딘지 알 것 같아요.” 오세훈 시장 시절, 디자인서울 정책 자문을 위해 시청을 방문한 적이 있었던 랜드리는 그 뒤를 이은 박원순 시장에 대해서는 잘 알지못하고 있었다. “새 시장님 이름이 뭐라고요” “메이어 박이에요. 박.원.순.” 그는 끝끝내 그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정종은(이하 정): “그건 그렇고, 이번이 한국에 일곱 번째 방문이신데, 전북 방문은 어떠셨나요?”


찰스 랜드리(이하 랜): “매우 흥미로웠어요. 흥미로운 콘퍼런스들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도 있었어요. 콘퍼런스 전날 밤에 호텔에 도착해서 자고 일어났더니, 다음날 아침에 바로 기조 강연을 하도록 일정이 짜여 있었죠. 저녁까지 콘퍼런스를 진행하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내가 있는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일단 도시를 둘러보고 나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어야 했는데, 기조 발표를 마친 다음에야 도시를 볼 수 있었죠. 저로서는 그 반대로 일정이 짜여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그 외에는 만족스러웠어요. 시골에서 전통 장인이 도자기 만드는 것을 본 일도 기억에 남구요, 한옥 마을에서 도시 속의 오아시스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공간들을 여럿 만난 것도 좋았습니다. 오늘 기차를 타기 전에 익산에서 한 예술 큐레이터가 오래된 거리를 재생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곳을 방문했는데, 너무 멋졌어요. 그런 시도들 이야말로 정말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 영국 최초로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된 글래스고에 대한 연구 보고서에서 ‘창조 도시creative city’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으니, 랜드리가 이 개념을 파고든 지도 벌써 25년이 가까워진다. 그 세월 동안 그가 직접 방문해서 들여다보고 컨설팅을 진행한 도시의 숫자가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전역에 걸쳐 수백 개를 헤아린다. 따라서 ‘그 경험에서 나온 알짜배기 교훈을 정제해서 들려주십사’하는 요청이 크게 무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내용이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이 없는 내용은 맹목적”이라는 칸트의 말처럼,난생 처음 한 도시를 방문한 사람에게 최소한의 ‘내용’을 스스로 채우기 위한 시간을 미리 확보해주었다면 더욱 유익했으리라.


정: “예전에 방문했던 한국의 도시들은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들이었는데, 이번에는 전주에 머무셨죠. 어떤가요? 전하고는 좀 느낌이 달랐나요?”


랜: “네, 전주는 인간적인 규모human scale를 갖고 있더군요. 게다가 콘퍼런스 장소가 한옥 마을 주변이었기 때문에 색다른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전통문화가 갖고 있는 독특한 힘이 분명히 있죠. 그런데 제가 더 궁금했던 것은 일상 문화였어요. 그 도시에 관한 생생한 느낌real feeling은 특별한 것에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것에서 포착되는 법이거든요. 제가 자꾸 다른 곳, 더 평범한 곳을 가자고 하니까 사람들이 좀 이상해 하더라구요. 한옥 마을 바깥을 충분히 보지 못한 게 아직도 아쉽습니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타산지석:

한옥 마을과 이태원의 미래를 위한 레시피 

잠깐 서머셋 호텔 주변을 산책하며 서울의 ‘평범한’ 것들을 들여다본 후, 저녁 약속 장소인 이태원의 고깃집으로 이동했다. 소맥으로 시작하겠다고 우겨서 우리 일행을 놀라게 한 랜드리. 쌈장을 잔뜩 묻혀 차돌박이와 꽃등심을 흡입하시더니 급기야는 옆 테이블의 쌈장까지 자기 앞으로 가져간다. 한국식 음주 문화에 대한 싸이의 새 뮤직비디오, 중국에서 시작된 한류의 기원, 최근 K-Pop의 기세 등에 대해 한참 동안 담소를 나누다가 상하이, 베이징, 칭다오 등 재빠르게 ‘창조 도시’ 트렌드에 올라탄 중국의 도시들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랜: “언급한 도시들 외에도 여러 도시들에 초청을 받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나는 매우 걱정스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중국의 도시들이 ‘미쳐가고 있다obviously going crazy’ 또는 ‘폭발할 것 같다explode’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최근 방문한 베이징에서 갖게 된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여러 도시들이 창조 도시를 언급하지만, 슬로건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중국 정부의 문화 부처차관과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창조도시에 관한 얘기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창조 경제’에 관한 논의, ‘소프트 파워’에 관한 논의였습니다. 각 도시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섬세한 논의는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물론 나의 주관적 인상이 중국의 대표적인 도시들의 운명에 대해 정확한 판단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나와 교류한 일군의 중국인 전문가들도 매우 유사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문제의 근원은 ‘자유의 결핍’입니다. 자유를 동반하지 않은 창조성을 진정한 창조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서로 다른 문명에서 서로 다른 창조성 개념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슬람권의 ‘창조성’과 기독교권의 ‘창조성’, 그리고 유교권의 ‘창조성’ 개념은 같을 수가 없을 테지요. 또한 같은 유교의 영향을 받았더라도 일본의 ‘창조성’과 한국의 ‘창조성’과 중국의 ‘창조성’ 역시 상당히 다를 겁니다.

다시 베이징과 상하이로 돌아가 볼까요? 우리는 중국인들이 보여주는, 무언가 일이 되게 하는 것, 과감한 의사결정 등에 대해서 감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뭐죠? 점점 더 그 도시들이 살기 어려운 곳이 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오염과 같은 건강 이슈, 사회적 불신과 양극화 등은 문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례로 아까 내가 언급한 전문가들은 꽤나 부유한 사람들이었는데요, 거의 모두가 유럽이나 북미에 따로 집을 갖고 있었습니다. 기회만 되면 중국을 떠나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어요.”


랜드리는 유럽의 창조 도시가 표방하는 ‘창조성’은 구성원 모두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곳을 전제한다고 강조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자유의 결핍’이야말로 중국의 ‘창조 도시’를 진정한 창조 도시로 인정하기 어려운 이유이며, 중국의 도시들이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직면하지도 못하고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는 것이다. 다소 주제가 무거워지기도 하였으나, 저녁 식사 이후 이태원 구석구석을 산책하게 되자랜드리는 금세 이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진 천진난만한 아이로 되돌아갔다. 이견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 지명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한국에서 이태원梨泰院/異胎院보다 더 국제적인 공간, 더 이문화적인 공간이 있을까? 이태원 뒷골목의 매우 모던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마치자마자 랜드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전통문화의 본산인 전주 한옥 마을과 이문화의 집합소인 이태원 중에서 어디가 더 당신의 마음을 끌어당기느냐고….

 

 

정종은은 서울대학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영국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문화 정책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메타기획컨설팅에서 Knowledge본부의 부소장으로 ‘세계문화정상회의 의제 설정 연구’, ‘이야기산업 산업범위 확정 연구’, ‘꿈의 오케스트라 합동공연 효과성 연구’, ‘콘텐츠코리아랩 아이디어융합공방’의 프로그램 개발 등을 수행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예술과 사회’를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문화정책학회 학술이사를 맡고 있다.

월간 환경과조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