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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스케이프] 경주
도시의 시간, 기억의 대상
  • 환경과조경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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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40대 이상이라면 경주에 대한 첫 기억이 수학여행일 확률이 높다. 동트기 전부터 산에 올라가 졸린 눈을 부비며 화장실인 줄 알고 들어가서 본 석굴암은 충격적으로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첨성대는 상상했던 것보다 작았고 포석정은 미니어처 같이 느껴졌다. 사진 속에서 본 유적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전통 양식을 어설프게 모방한 기와 장식의 4층 민박집과 넓은 잔디밭 위의 벚꽃이 석가탑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바람에 흩날리던 벚꽃 아래에서의 수다는 눈부셨고, 민박집에서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는 여전히 단골 안줏거리다. 경주의 첫인상은 불국사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내 얼굴 찾기도 힘들다)처럼 박제된 이미지로 남아 있다. 첨성대 뒷모습의 표정이 앞모습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황룡사의 빈터가 어떤 울림을 주는지 느끼게 된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영화 ‘경주’(감독 장률)에는 불국사나 첨성대 같은 경주의 대표 선수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래된 골목, 찻집의 정원, 노래방 앞, 아파트 주변, 자전거 길 등 일상의 공간이 주요 무대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공간은 고분과 찻집 정원이다. 장률 감독은 재중 동포 3세로 특정한 장소가 가진 정서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감성을 주로 그려 왔다. 장률은 경주를 처음 방문했을 때 백 개가 넘는 고분이 일상과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는 모습이 특이해 보였다고 한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베이징 대학 교수로, 선배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남은 시간을 경주에서 보낸다. 남자는 고분 앞에서 교복 입은 고등학생들이 입을 맞추거나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이 재잘대며 지나가는 장면을 본다. 장률이 실제 느꼈을 경주의 첫인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남자는 미모의 찻집 여주인과 얽히면서 그녀의 일상에 하루 동안 동행하게 된다. 여자는 아파트 창문을 열면 보이는 고분을 바라보며 “경주에서는 단 하루라도 능을 보지 않고는 살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여자의 모임에 따라가 술을 마신 남자는 그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와 함께 술에 취한 채 걷다가 고분 위로 올라간다. 그녀는 고분에 엎드려 고분을 향해 소리치기도 하고, 건너편 고분에 올라가 자신과 똑같은 포즈로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보기도 한다. 옆으로 누운 여자의 허리선과 고분의 부드러운 곡선이 닮아 보인다.

그녀를 짝사랑하는 남자는 그의 아버지가 고분 위에서 술을 마신 후 깔고 앉았던 돗자리를 타고 내려오곤 했다는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고분에서 술 취한 채 썰매타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난다. “알 만한 사람들이 문화재 위에서 뭐하는 짓들이냐. 문화재는 너희가 올라가 노는 데가 아니야”라고 호통치는 경비원에게 그들은 결국 쫓겨난다. 엄숙한 죽음의 공간과 자잘한 일상이 얽히는 상황은 경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고분들과 멀리 보이는 도시의 불빛을 한 프레임에 담은 장면은 영화의 공간과 주제를 함축해서 보여주는 마법 같은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고분이 경주의 실제 모습이라면, 찻집은 경주를 은유한다. 찻집은 오래전 모습을 간직한 채 현재의 시간이 흐르고 있으며 낯선 사람들이 방문하는 공간이다. 비밀을 간직한 아름다운 여주인이 있고 전통차라는 콘텐츠가 있다. 결코 화려하지 않은 작은 정원이지만 깊이와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내부 공간과 정원은 주인공들의 시선, 움직임, 감정의 변화로 점점 그 경계가 불분명해진다. 정원의 빛은 방으로 들어와 인물을 비추고, 방안의 인물은 정원에 있는 인물을 훔쳐본다. 소나기가 잠시 왔다가 그치면서 정원의 빛이 석양으로 노랗게 물들면 방안의 빛도 변하면서 인물의 마음도 움직인다. 여주인공으로 분한 신민아는 키가 커서 집과 정원을 더 작아 보이게 만든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고, 한겨레 영화평론 전문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전공으로 삼아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극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그것이 주는 감동과 함께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텍스트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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