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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101, 설계를 묻다(13)-설계 도구: 자유 혹은 구속
  • 환경과조경 2010년 2월

도구의 변화
설계사무실을 둘러본다. 20년 전의 작업환경과 비교하였을 때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컴퓨터 사용의 일반화와 제도대의 멸종일 것이다. 이제 제도대는 소장님 자리에나 가봐야 겨우 볼 수 있는 고가구가 되었다. 필자와 비슷한 또래의 설계가들은 설계매체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였다. 우리 선배들은 굳이 컴퓨터그래픽 툴을 직접 다룰 필요가 없었지만, 우리들은 그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필자는 한참동안 컴퓨터 쓰는 것을 주저하던 부류였다. 학부 때 나의 동기들이 CAD, 즉 Computer Aided Design의 새로운 개념에 환호하고 있을 때, 컴퓨터가 생산해내는 프로덕션의 질에 대해서 빈정대던 내 모습이 기억난다. 컴퓨터 잘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이 있었고, 졸업 후 컴퓨터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환경에서 근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툴을 고집하면서 스스로를 가두었었다. 학교 때나 직장 때나 스케치하기, 마커나 색연필로 랜더링하기, 모형만들기가 나의 스페셜티였다.
사담이긴 하지만 컴퓨터를 활용한 설계에 대해서 큰 신뢰를 보내지 않다가 컴퓨터를 적극적으로 나의 툴로 받아들인 두 번의 계기가 있었다. 첫 번째 계기는 대학원 생활 마저도 거의 모든 과제를 재래식으로 생산하여 컴퓨터와 도통 가까이 지낼 기회가 없었는데, 대학원 졸업 이듬해에 새로 개설된 컴퓨터그래픽 수업을 맡아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었다. 컴맹으로 큰 이름을 날리던 내가 대학원에서 컴퓨터그래픽을 가르친다는 스토리 자체가 시트콤이었지만, of course, no problem을 연발하며 덥석 수락을 했더랬다. ‘까짓것 책보고 배우면서 가르치면 되지…….’ 컴퓨터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기계였으나 서로를 이해하고 호흡을 맞추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수업 준비는 그 건조한 독학의 과정을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설정이 되었다. ambidextrous라는 단어가 있다. 양손잡이라는 뜻인데, 다재다능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대학원 수업을 진행하면서 전통적인 디자인 방식과 디지털 디자인 방식은 둘 중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모드 전환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플러스펜을 들든지, 아니면 라이노를 쓰든지 그것들은 내 손끝으로 조정하는 한낱 도구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나의 안목과 상상력이라는 생각을 되뇌고 있었다. 두 번째 계기는 오기의 발동이었다. 배움과 가르침이 공존하던 그 시기에 사무실에서 맡은 일을 가지고 실전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컴퓨터로 이런저런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보스였던 로리 올린이 “헤이, 욱주! 컴퓨터 작업은 디자인이 아니야”라는 말을 살짝 놓으면서 옆을 지나치셨다. 전통적 조경설계의 대명사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는 올린 대가께서 던진 한마디의 무게는 ‘traditional vs. digital’이라는 대결구도에 대해서 한 번 더 깊은 생각을 해보게 했으며, 동시에 도구는 사람쓰기 나름일 뿐이라는 본인의 믿음을 증명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 계기가 되었다. 정말 이 세상의 설계는 트래디셔널과 디지털로 양분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이원적 구도는 단순한 세대차이의 다른 식 표현일까, 아니면 이 두 스타일의 설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여간 올린의 훈수는 컴퓨터작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통합적으로 다뤄보는 실험을 하게하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손이냐 컴퓨터냐
필자의 경우 설계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어느 정도 겉멋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로트링 세트, 스태틀러 홀더, 우치다 각도자, 프리즈마 색연필, 옐로우 트레이싱페이퍼 등 쿨하고 프로페셔널한 학용품들이 스튜디오의 도구들이었다. 설계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이러한 도구를 다루면서 멋진 작업들을 생산하는 설계동네 선배들의 퍼포먼스로부터 증폭되었다. T자와 삼각자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도면을 다루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절로 감탄이 나왔다. 당시에는 작가적 상상력만큼이나 그림을 잘 그리는 것 자체가 좋은 설계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곤 했던 것 같다. 설계도구들을 다루면서 폼 나는 그림을 뽑아내는 능력이 실제 좋은 설계로 이어진다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가시적인 것들로 인해 성과가 드러나는 분야이다 보니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것이 설계를 잘하는 것이라는 암묵적인 등식을 만들어냈었다. 그래서 좋은 상상력을 가지고도 단지 그림을 잘 그려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설계에 소질이 없다고 단정 짓는 친구들이 많았던 것 같다. 비슷한 구도로 이제는 컴퓨터그래픽을 잘 다루면 설계를 잘 한다는 단정을 지을지도 모르겠다.

도구의 전환기에 설계에 입문한 우리 또래는 전통적 방식과 디지털 방식의 설계를 모두 경험한 복 받은 세대라고 할 수 있고,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선배들에게는 손놀림이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은, 후배들에게는 컴퓨터에 그리 능숙하지 않은 세대로 인식될 수도 있다. 손이냐 컴퓨터냐의 이원적 구도는 조경이 과학이냐 예술이냐의 대결구도만큼이나 흔한 얘깃거리였다. 이제 어느 정도 승부는 컴퓨터쪽으로 기운 것처럼 보인다. 컴퓨터를 쓰지 않는 설계사무실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디지털디자인은 비용, 시간을 절약하여 경제성이 높고, 복사, 수정의 편리함과 탁월한 데이터 구축 및 저장 능력의 이점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 컴퓨터라이제이션(computerization)의 승리인지는 제고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컴퓨터가 수작업을 완벽하게 대체했는가?
분명 수작업은 디지털작업에 비해 많은 단점을 안고 있지만 자아와 직지적으로 교감하는 순발력이 뛰어나다. 물론 어느 정도의 훈련 후에 가능한 일이지만 트레이싱지와 플러스펜을 통해서‘아이디어 to 물화’의 초기 구상단계 작업을 컴퓨터보다 수월하게 행할 수 있다. 여전히 전통적인 수작업이 유효하기 때문에 ‘손 vs. 컴퓨터’의 구도에서 어느 쪽도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단순한 이원적 사고로 손이냐 컴퓨터냐를 선택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다양한 도구의 속성에 대해 진지하게 살피는 노력이 필요함을 느낀다. 더불어 도구야 무얼 쓰든 상관없이 설계는 사람하기 나름이라는 기존의 생각도 제고의 대상이 됨을 느낀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주체와 도구와의 사이를 일방적 관계라고 단정 지었지만, 이제는 이 둘 사이가 상호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구는 주체에게 사고의 자유를 허락할 수도, 은연중에 구속을 행하고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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