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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조경설계사무소 탐구
분주했던 2024년이 저물어간다. 이번 12월호에는 지난 3년간 이어온 기획 지면 ‘어떤 디자인 오피스’의 마지막 편을 싣는다. 2022년 1월호(405호)에 문을 연 ‘어떤 디자인 오피스’는 한 조경설계사무소의 대표작과 근작을 둘러싼 뒷이야기, 사무소 경영과 생활 등에 얽힌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은 지면이었다. 한국 현대 조경의 역사를 이끌어온 중견 설계사무소뿐 아니라 새롭게 부상하며 활발한 작업 성과를 펼치고 있는 설계사무소, 신생 아틀리에형 스튜디오를 포함한 이 기획에 총 34개 설계 조직이 참여했다. 서른네 편의 ‘어떤 디자인 오피스’ 지면이 훗날 2020년대 한국 조경의 지형과 풍경을 탐구할 수 있는 생생한 자료로 쓰이기를 기대한다.
한국 조경사 50주년을 맞았던 2022년에는 조경하다 열음(윤호준)의 첫 편에 이어 안마당더랩(이범수+오현주), 본시구도(이형석), 오픈니스 스튜디오(최재혁), 엘피스케이프(박경의+이윤주), 조경설계 디원(최철호), 얼라이브어스(김태경+강한솔), 안팎(반형진+정주영), 조경그룹 이작(양태진), CAT 조경설계사무소(김성완+김용희), 조경사무소 사람과나무(오화식)의 이야기를 담았다.
2023년에는 바이런(이남진), 스튜디오 테라(김아연+안형주), HEA(백종현),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안계동), 가원조경설계사무소(안세헌), 디자인 엘(박준서), 듀송플레이스(송이슬+김민호), 공간이오(이주은+오태현), 디멘션조경설계사무소(이동화), CA조경기술사사무소(진양교), JWL(정욱주+원종호)이 ‘어떤 디자인 오피스’ 지면을 꾸렸다.
2024년의 문을 연 디자인 오피스는 기술사사무소 예당(오두환)이었다. 이어서 조경설계호원(김호윤), 라이브스케이프(유승종), 조경작업소 울(김연금), 스튜디오일공일(김현민), HLD(이호영+이해인), Lab D+H(최영준), MDL(송민원), 인터조경기술사사무소(김수연), 우리엔디자인펌(강연주), 서도(홍광호)를 지면에 초대했다. ‘어떤 디자인 오피스’의 마지막 편(440호)은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은 그룹한어소시에이트(박명권) 이야기다.
3년간의 ‘어떤 디자인 오피스’는 34개 조경설계사무소의 작업과 경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정보 전달형 지면이었지만, 더 나아가 한국 조경계의 내면을 관찰하고 기록한 일종의 아카이브이기도 했다. 조경설계에 관심 있는 이에게는 조경설계사무소의 구체적 현황을, 잠재적 클라이언트에게는 후보 조경가 리스트를, 조경가를 꿈꾸는 학생에게는 각 설계사무소 특유의 스타일과 직장 환경을 탐색하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란다.
본지 편집부가 지면에 초대한 설계 회사는 훨씬 더 많았지만, 여러 계기를 통해 이미 잘 알려진 설계사무소 중 일부는 참여를 고사하거나 다른 사무소들에 지면을 양보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어떤 디자인 오피스’에 담지 못한 여러 조경설계사무소의 경영 현황과 대표 작품이 궁금하다면, 『환경과조경』 2019년 7월호(375호)의 특집 ‘2019 대한민국 조경설계사무소 리포트’를 참고할 수 있다. 이 지면에는 총 88개 설계사무소의 현황과 정보를 모은 바 있다.
다시 한 해를 통과한다. 『환경과조경』의 친구가 되어준 독자들과 필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2025년에도 『환경과조경』은 조경 저널리즘의 최전선에서 조경 담론과 문화를 생산하는 역동적 공론장을 꾸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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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Hey DJ play me a song to make me smile(각주 1)
#1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수색역에서 중앙선을 타면 새벽 6시였다. 그 시간에도 앉을 자리가 없어서 한쪽에 선 채로 휴대폰을 꺼냈다. 라디오 앱을 켜고 방송 중 읽지 못한 청취자 문자를 읽는다. ‘새벽 출근을 하며 듣고 있는데 덕분에 힘이 납니다’, ‘제 최애 코너예요’, ‘이번 주말에는 소개해주신 곳으로 꽃구경 다녀올게요.’ 초반에는 지루하다는 평을 받거나 메시지가 몇 통뿐인 날도 있었지만, 댓글 창에는 대체로 반가운 말들이 가득했다. 한아름 선물을 받아가는 기분.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이 열차는 공덕역에 도착하고, 열차를 가득 메우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 머물던 자리에 앉아 라디오에 귀를 기울인다. “오늘 어떻게 시작하고 계신가요? 오늘 일단 출발!” DJ의 목소리가 들리면 전철이 지하 구간을 빠져나온다. 창밖으로 건물들이 스쳐가는 동안 노래가 몇 곡 더 흘러나오고, 버드나무 사이로 반짝이는 한강이 보일 때에는 게스트 아나운서가 짤막한 뉴스를 전했다. 노란 큰금계국이 한들거리는 철로를 지난 뒤 내일도 놀러 오라는 클로징 멘트가 들리면 역에 내릴 시간이었다.
#2
작년 11월, 라디오에서 하차했다. 개편은 당연한 일이다. 매년 봄가을이면 수많은 프로그램과 코너가 생기고 사라진다. 그러나 개편이 내 일이 되자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열심히 준비하고 웃으며 진행했던 코너가 개편을 피해가기 어려울 정도로 한참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이런 생각과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작업실에 늘 틀어두었던 라디오를 치웠다. 그렇게 일 년을 보냈다.
이제 다시 라디오를 꺼내려고 한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DJ의 목소리와 여러 프로그램으로 흩어진 PD, 작가님들이 꾸리고 있는 방송이 궁금해서다. 다만 걱정이다. 토도독. 버튼을 돌려 익숙한 주파수에 맞추면 작업실 창가의 빨간 벽돌 건물이 조금씩 뒤로 움직일 것 같다. 꽃이 핀 철도변과 아침의 한강과 건물 숲, 그리고 어두운 지하를 지나 수색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새벽에 가닿을 때까지. 시간이 약이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틀린 말인 듯하다.
**각주 정리
1. 제목은 이소라의 노래 ‘신청곡’ 가사에서 가져왔다. “이봐요 디제이, 나를 웃게 해줄 노래를 틀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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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륙순환 도시주의] 다시 쌓는 불턱
“시끄럽다! 저리가라!”
삼양 3동에 남아있는 할망(할머니) 불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씨 삼춘(삼촌의 제주 방언)이 소리쳤다. 그가 애기 해녀였던 시절, 뭘 물어보려 불턱에 찾아가면 할망들에게 시끄럽다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우영팟에서 검질매고(김매고) 나온 잡초들을 불턱에 가져와 불을 피워두던 애기 해녀는 이제 노년의 잠수회장이 되었고, 할망 불턱도 옆집에서 창고를 지으며 반쯤 허물어져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지 오래.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쉬는 사적인 공간이자, 하루의 물질부터 마을의 대소사까지 중요한 일들을 의논하는 공적인 자리였던 불턱은 해녀 공동체의 건축적 상징이다. 하지만 해녀 인구의 고령화와 감소로 인해 이러한 공간들도 사라져가고 있다. 답사 중 스러져가는 탈의장이나 불턱을 볼 때마다, 나는 삼춘들이 떠난 뒤의 바당밭의 미래를 고민하고는 했다. 소멸해가는 것들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내가 선택한 첫 번째 방법은 기록이었다. 기록은 문화의 증거가 된다. 답사를 다니며 측량한 여러 불턱과 잠수탈의장을 이번 글에서 살펴보겠다. 두 번째 방법은 변화다. 앞선 글에서는 바다와 땅을 오가는 영양분을 섬과 바당밭 풍경의 스케일에서 살펴보고 지속가능한 순환을 그려봤다. 깨끗한 물을 끌어와 화학 비료와 육상 양식장 배출수, 축산 폐수 등으로 오염시켜 바다에 방류해왔던 근대적 착취에서 벗어나, 돼지 분뇨를 이용해서 지렁이를 키우고, 광어 양식장에서 나오는 유기물로 해조류를 키워 소라나 전복을 먹이는 통합 다중 영양 양식(Integrated Multi-Trophic Aquaculture)을 상상해봤다. 버려지는 소라 껍데기는 해녀들이 오가는 조간대 길의 재료가 되어 검은 현무암 지대를 수놓으면 그 길에서 해녀 공동체가 다른 이들과 함께 걷는 일도 가능할 것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건축적 스케일에서 삼양 3동 할망 불턱을 다양한 세대가 만나는 공간으로 변화시켜본 과정을 다뤄보겠다.
“또똣ᄒᆞᆫ디 이리로 오라(따뜻한 여기로 와라)”
불턱은 해녀 건축의 원형이다. 불턱은 크게 자연형과 인공형으로 나뉜다. 자연형 불턱은 자연 지형을 이용해 바람을 막아 불을 피워 사용한 형태를 지칭한다. 종달리에 위치한 돌청산 불턱이 대표적 예다.(각주 1) 현무암이 고르게 퍼져 있던 암반 지대가 마치 입을 벌리듯 갑자기 움푹 내려앉으며 바다로 이어지는 돌청산 불턱은 양옆으로 솟은 작은 현무암 절벽이 차가운 바닷바람을 막아주었다. 또한 이 골짜기는 해녀들이 바다로 드나드는 자연스러운 길이 되기도 했다.
자연 지형이 바람을 막아주지 못하는 경우 옛날 해녀들은 직접 돌담을 쌓아서 불턱을 만들었다. 이를 인공형 불턱으로 분류한다. 일례로 하도리에 위치한 보시코지 불턱이 있다. 해안도로변에서 마주하는 보시코지 불턱은 성인 허리께 높이의 약 동서 12m, 남북 6m의 직사각형 돌담으로, 그 단아한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담장 주변을 수놓은 문주란과 함께 담 위쪽에 덧발린 백색 모르타르가 눈길을 끄는데, 이는 인근 무두개의 산호모래로 만든 시멘트 모르타르다. 초기에는 오직 돌을 쌓아서 만드는 구조였으나, 제주에 시멘트가 보급되면서 해녀들은 이 모르타르로 돌담 틈새를 메워 바람을 차단하기도 했다. 그마저도 시멘트가 귀했던 초기에는 가장 바람에 많이 노출되고 구조적으로 취약한 위쪽에만 시멘트를 덧발랐다.
보시코지 불턱 입구로 들어서면 낮은 중간 담을 두어 내부를 두 개의 공간으로 구분한 구조가 드러나는데, 여기에 해녀 사회의 위계가 반영되어 있다. 서쪽의 높은 지대는 하군 해녀들이, 동쪽 낮은 지대는 상군 해녀들이 사용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보통 물리적으로 높은 자리에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이 앉는 것과 달리, 낮은 지대에 사회적 위치가 더 높은 상군 해녀들이 앉았다는 것이다. 이유는 불턱에 앉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소란스러운 풍경이 뒤로 물러나고, 사나운 바람과 파도 소리는 돌담을 거치며 온화해진다. 묵묵한 돌담 위로 하늘은 지나가고.
*환경과조경440호(2024년 12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청산은 성산일출봉과 비슷하게 생긴 바위를 주민들이 일컫는 말이다.
강준호는 존재와 제도가 만든 풍경을 읽는 건축가다. UCLA에서 건축과 미술사를 복수전공한 뒤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GSD)에서 건축학 석사를 마쳤다. 이후 게럿 도허티(Gareth Doherty) 교수의 비평적 조경 디자인 연구소(Critical Landscapes Design Lab)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해안 지역의 기후 변화 인식을 조사했다. 현재 건축가와 정원사로 일하며 조경과 건축을 함께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 @junho_s_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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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디자인 오피스] 그룹한어소시에이트
그룹한의 선한 설계
30년,
한국 조경의 역사와 함께
1994년 창립한 그룹한어소시에이트(이하 그룹한)는 2024년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하는 조경설계사무소다. 현재 계열사 7개에 150여 명의 전문 인력이 근무하고 있다. 대형 공원과 주거 공간 설계에 강점을 두고 도시설계부터 정원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조직화된 시스템과 노하우를 통해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창의적 비전으로 미래에 도전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 세계 20여 국가에서 매년 100개가 넘는 국내외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세계조경가협회(이하 IFLA) 대상 3회 수상, 대한민국 조경대상 대통령상 등 200개가 넘는 상을 수상했다.
자연과의 동거를 꿈꾸며
그룹한은 조경설계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이원화를 극복하고 일상에서 자연과 문화의 접점을 찾아 역동적이고 생동하는 자연성을 디자인하고 있다. 2016년에 준공된 배곧생명공원은 인간에 의한 개발로 훼손된 해안 매립지를 다시 자연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생명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대상지의 핵심인 중앙공원은 서해에서 급격하게 나타나는 조수 간만 차를 이용해 바닷물을 공원 내로 끌어들이고 자연 에너지만으로 담수와 기수, 해수가 만나는 복합적 생태계를 구성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경관을 연출하고 다양한 연안 생물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배곧한울공원은 사라진 해안선을 되살리고 바다의 기억을 회복하고자 갯벌, 바람 등 여덟 가지 바다의 기억을 테마로 설정하고, 매립에 의해 직선화된 6km의 호안을 굴곡진 12km의 역동적 호안으로 새롭게 바꾸었다. 미완의 작품이지만 송도 G5 블록 공원 현상설계에서는 서해안의 대표적 원경관인 갯골과 해식 절벽을 디자인 모티브로 지형을 만드는 바람의 흐름을 따라 바닷물을 대지 내로 끌어들여 새로운 물길과 대지의 모양새를 만들어 냈다. 2013년 개관한 국립생태원은 습지 생태계의 특징을 관찰할 수 있는 금구리구역, 한국의 기후대별 삼림 식생을 재현한 하다람구역 등으로 구성했다. 기존 대상지의 식생과 수문을 면밀히 분석하여 훼손을 최소화하고 자연적인 수순환 체계 확립과 종 다양성 증진을 위한 최적의 서식지 조성으로 박제된 자연이 아닌 살아있는 생태계를 구현했다. 천안삼거리공원은 능수버들의 유래와 흥타령을 간직해온 대상지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 흥이 넘치는 삼남길을 재현하고 광활한 습지와 능수버들 군락이 춤추는 자연마당을 조성해 문화와 자연이 어우러진 역동적인 작용들을 끌어내고자 했다. 이러한 디자인은 겉모습의 자연에 대한 동경을 넘어 변화하고 역동적인 자연, 문화적인 자연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다.
과학과 예술의 경계를 넘어
예술적 또는 과학적 설계 방법론을 지향하는 상반된 디자인 경향을 융합해 나가면서 조경 디자인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나가고 있다. 자연의 생태계와 인간의 예술적 감성을 통합적 안목에서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자연의 생태적 과정에 디자인의 상상력과 의미를 결합하는 조경설계를 궁극적으로 추구한다.
우리의 작품 중 예술 지향적인 작품으로 일산자이에 설치한 조형 퍼걸러는 꽃잎을 확대하고 스케일을 과장해 만든 크고 작은 구멍들이 그늘을 제공한다. 퍼걸러 바닥에는 햇볕의 방향에 따라 변화하는 그림자가 장관을 이룬다. 근린공원의 수경 시설은 친수 공간과 환경 조각품을 결합한 스토리텔링으로 조경과 미술이 통합된 예술 장식품을 구현했다. 양평 현대그룹 연수원의 평면은 기하학적 추상화를 연상하게 하고, 수원 SK 스카이뷰에 설치한 소나무 환경 조각품은 진입로 좌우로 식재된 소나무 군락과 통합된 조형미를 구현한다. 개포 래미안 포레스트, 수원센트럴아이파크자이에 설치한 조형 수경 시설과 제주 신화역사공원 조경설계공모 당선작, 화성 봉담 프라이드시티의 수공간은 땅의 융기와 용암의 팽창, 등고선 지형의 복원 등을 표현한 대지 예술에서 영감을 받았다.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 명지지구 조경설계공모 당선작은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한 생태학적 환경 이론과 대지 예술의 구현이라는 예술 지향적 조경설계를 결합해 완성했다. 쓰레기 매립지였던 대상지에 철새의 먹이인 새섬매자기 군락을 복원하고, 강 하구의 습지, 사구, 물골의 수문학적, 지형적 특성을 디자인에 반영해 자연과 인간이 함께 상생하고 치유되는 공원을 목표로 삼았다. 미사강변센트럴자이의 외부 공간 설계는 ‘디자인 위드 워터Design with Water’란 메인 콘셉트를 중심으로 물 관리와 함께 수공간을 디자인하는 과정을 통해 주민들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그리고 생명이 살아있는 지속가능한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
동탄목동공원(재난안전공원)은 전 지구적으로 심각한 재난과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을 중심으로 설계했다. 권역 안에서 수용할 수 있는 안전 및 대피 시설의 규모를 과학적으로 산정하고 도시 재해 시에 임시 거처로 활용할 수 있는 피난 광장과 관리 시설을 평상시 놀이 체험 및 교육 시설과 연계하며 조형미를 드러낼 수 있게 디자인했다. 렛츠런파크 영천은 경마공원에 머무르지 않고 부지 전체를 대지 예술로 승화시켜 정원 중심의 테마파크를 제공하는 지역문화형 공원으로 계획했다. 영천시의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한 다양한 이벤트 프로그램을 통해 관광객과 문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공원을 지향한다.
행정중심복합도시 5-1생활권 스마트 조경 설계공모 당선작은 지속가능한 스마트 공원을 활성화하기 위해 자연·인문 자원이 가진 지역성과 정체성을 기반으로 스마트 과학 기술을 접목해 도시와 시민이 협력해 도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능동적 시스템을 구축한다. 성남 복정 1, 2 공공주택지구 조경설계공모 당선작은 기후위기 영향을 줄이기 위한 탄소중립 공원으로 계획했다.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에 따라 녹색 공간의 지표를 제안하고, 자연 기반 탄소 흡수 및 저장량을 현재까지의 연구를 기반으로 정량화해 대상지 설계안에 탄소중립을 위한 생활의 실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도시를 건축하는 조경
조경의 전통적인 반도시적 가치 지향에서 벗어나 도시 속에서도 그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다. 조경과 건축과 도시가 혼합된 하이브리드 영역에서 조경가로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며 영역 간의 네트워크를 조절하는 지휘자로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관점의 프로젝트를 다수 수행했다.
가덕도 개발개념 현상설계안은 도로와 방파제 같은 회색 인프라가 아닌, 실개천과 조류의 흐름에 따라 경관과 그린 인프라가 우선적으로 고려된 경관 중심적 계획의 프로세스를 제시한다. 3기 신도시 공원의 첫 주자인 인천 계양 테크노밸리 공공주택지구 조경설계공모 당선작은 기존 대형 중앙공원 중심의 1, 2기 신도시 공원 계획의 패러다임을 탈피한 휴먼 스케일의 선형공원을 도입했다. 입주민의 일상 깊숙한 곳까지 공원ㆍ녹지가 자리 잡는 것을 지향하고 지역 경관을 담은 디자인 모티브, 입체적 선형공원, 도시와 상호 작용하는 일상의 공원을 추구한다.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추구했지만 미완의 작품으로 남은 대형 프로젝트로는 용산공원, 서남권 국회대로 상부공원, 서울국제교류복합지구 등이 있다.
일산 식사지구 도시 개발 프로젝트는 초기 단계부터 조경가가 참여해 전체 마스터플랜 계획 과정에서 회색 인프라가 아닌 녹지 원형으로부터 그린 DNA를 추출하고자 했다. 새로운 도시 녹지 체계를 재생하고 그린 인프라스트럭처를 구축하는 전략으로 생태적 관점으로 도시 골격을 구성한 프로젝트의 좋은 예시다. 이와 같이 대규모 주거 단지 개발에서 그룹한이 주도적 역할을 해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실천한 프로젝트들이 있다.
군부대 이전 부지에 대규모 중앙공원으로 녹색 축을 만들고 ‘조경이 만드는 도시’를 추구한 창원 중동유니시티와 산수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봉우리와 계곡을 주제로 친환경 단지를 구현한 화성 봉담 프라이드시티, 지형의 선형이 살아있는 대지 예술로 단지를 가로지르는 중앙 공간과 대자연을 품은 생활 공간을 계획한 디에이치 아너힐즈, 한강으로의 경관 축을 따라 대규모 오픈스페이스가 설계된 잠실5단지, 메가 네이처 파크(Mega Nature Park)를 콘셉트로 올림픽공원의 자연을 담은 올림픽파크 포레온 등이 있다.
그룹한은 대지 예술로부터 영감을 얻어 독립적인 건축을 미적, 철학적 토대를 기반으로 하나의 흐름을 일관성 있게 완성하고자 하는 건축가들과 협업해 왔다. 세종시 정부 청사, LH 사옥, 부산현대미술관, 인천항 국제여객터미널, 울산전시컨벤션센터(UECO), 판교 알파돔, 동탄 롯데백화점 복합몰, 마곡 원웨스트 서울, 송도 롯데몰, 제주중문리조트 등 조경, 건축, 도시가 혼합된 영역에서 조경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전통의 계승과 한국적 조경을 위하여
다양한 설계 방법을 통해 전통 조경을 계승하고 한국적 조경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한 시도를 이어왔다. 꽃담의 아름다움을 현대적 수경 시설인 벽천에 도입한 수지 LG빌리지와 전통을 재현한 부여 백제문화단지는 초창기 작품에서 시도된 형태 모방에 그치지 않고 전통 마을을 이루는 조성 방식인 풍수사상 등을 재해석해 실개천과 비보숲 등 산수 조성 기법을 현대적인 공간 조성 방식으로 구현했다. 양주자이의 실개천은 풍수사상을 접목해 천보산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실개천을 단지 내로 끌어들여 녹지와 수계가 유지되도록 생태와 문화의 그린 네트워크를 구현했다. 강남 도심 속 대규모 주거 단지인 반포자이는 한강으로부터 단지를 관통하는 두 갈래의 실개천을 도입해 다양한 휴게 공간과 오픈스페이스, 놀이 공간과 운동 시설 등을 배치하고 자연스럽게 물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설계했다. 서울대학교 행정관 광장은 차경과 비움의 전통적 조영 원리를 계승한 작품으로 전통 한옥 마당이 가진 비움의 미학에서 영감을 얻어 채우는 대신 비움을 통해 실용의 미를 실천했다. 청계중앙공원은 숲(山經)과 개울(水經), 그리고 길(修己)이 만드는 한국 전통 마을의 구성 원리를 차용하고 자연과 상생하는 음양오행 사상을 도입한 전통 조경의 재해석을 통해 한국적 도시 공원의 모델을 제시했다.
세계로 향한 발걸음
그룹한은 2007년부터 매년 IFLA 학생설계공모전의 공식 후원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9년에는 미국 뉴욕 맨해튼 지사를 설립해 세계화의 초석을 다졌다. 일산자이 제로가든(2011), 배곧생명공원(2014) 등 으로 IFLA 작품 대상을 받는 등 국제 무대에서 한국 조경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생명의 강(River of Life)(2011), 부르나이 케다야강 워터프런트(Kedaya Eco-corridor Waterfront)(2014), 아제르바이젠 바쿠 올림픽 경기장(Baku Olympic Stadium)(2014), 이란 아틀라스 플라자(Atlass Pars)(2016), 필리핀 클락 더 샵 힐즈 리조트(The Sarp Hills Resort)(2016),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토이테파 신도시(Toytepa Newtown)(2017), 미얀마양곤 한타와디국제공항(Hanthawaddy International Airport)(2019)등 전 세계 20여 개 국가에서 다양한 국제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오피스
구성과 문화
그룹한은 휴게 및 놀이 시설 설계·시공, LID 등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친환경 기술을 연구, 개발하는 자매 회사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며 성장 중이다. 가이아글로벌은 ‘아이들의 꿈이 현실이 됩니다’라는 비전을 토대로 2002년에 설립한 친환경 놀이 시설물 브랜드다. 화학적 방부 처리가 필요 없는 유럽산 1등급 아까시 원목과 무독성 천연 안료를 사용해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생태 놀이터를 만든다. 한국그린인프라연구소는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도시, 자연과 미래 세대를 위한 그린인프라 기술과 제품의 개발 및 보급을 목표로 2011년 설립됐다.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도시 환경을 만들기 위한 연구 개발에 앞장서고 있다. 토인 디자인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도시에서 예술성과 기능성을 겸비한 새로운 조경 시설물 개발을 위해 2014년에 설립됐다. 도심 속의 녹색 안식처를 지향하며 자연을 담고, 자연을 닮은 자연 감성의 미래형 야외 조경 시설물 연구 및 개발을 하고 있다. 또한 조경계의 유일한 전문지인 월간 『환경과조경』과 「한국조경신문」을 발간하며 ‘조경문화발전소’로서 조경계의 역사를 꾸준히 아카이브하고 조경 분야의 소통과 발전을 지원하고 있다.
회사 행사
매년 임직원들과 함께 다양한 사내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매년 봄마다 사옥 옥상에서 진행하는 스프링파밍데이는 채소와 과일들을 함께 심고 가꾸는 이벤트로 구성원들에게 사무실에서 벗어나 자연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 가평의 그룹한 연수원 포레하우스를 통해 계열사 워크숍과 직원 가족들을 위한 무료 힐링 여행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임원 해외 워크숍과 전 직원 국내 및 해외 답사, 우수 사원 해외 답사 프로그램 등도 진행하고, 환경조경나눔연구원과 함께 가평 꽃동네, 한사랑마을 등에서 나눔과 봉사활동도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소장들의
소회
그룹한의 의미
그룹한 30주년을 기념해서 지난날의 사진과 추억들을 열어보았다. 막상 선명한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내가 한 프로젝트, 나와 함께한 사람들 모두에게 그룹한이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해졌다. 신입 공채 입사 동기 13명 중 이제 3명이 남았다. 신입부터 대리, 과장, 차장까지 직급이 올라갈 때마다 세우게 되는 목표와 미래에 대한 생각들이 있었지만 지금 얼만큼 이루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룹한은 내게 사회생활의 시작이었고, 힘든 직장 생활의 과정이었으며, 함께한 사람들과의 추억이었다고 정의하고 싶다. (전략 1본부, 김원대 소장)
내일의 꿈
“꿈을 먹고 사는 조경가 오태호입니다.” 2021년 겨울이 시작될 즈음, 그룹한 빌딩 6층 면접장에서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했다. 어린 시절, 독일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 궁전의 정원을 처음 마주했을 때 느낀 깊은 감동은 나를 조경의 길로 이끌었다. 그때 눈에 담았던 그림 같은 풍경을 내 손으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은 지금도 변함없다. 조경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언젠가 국내 최고의 설계사무소에서 일하고 싶다’라는 다소 막연한 꿈을 꾸었고 내게 그룹한은 동경이자 꿈이었다. 그룹한에게 소망하는 바가 있다면, 어제의 내가 그랬듯 내일의 누군가에게 동경이자 꿈이 되어주길 바란다. (전략 2본부 , 오태호 소장)
다음 30년을 그리며
2024년은 그룹한이 30주년을 맞이한 해고, 그룹한과 함께한 지도 만 25년이 지났다. 누군가는 내게 한 회사에 어찌 그렇게 오래 다닐 수 있는지 묻는다. 돌이켜보면 정말 이 일이 좋아서 즐기며 했지만, 누구나 그러하듯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히고 힘든 순간도 많았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를 굳이 꼽자면 조경에 대한 각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대표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나와 함께 걸어가며 서로의 힘듦을 공감할 수 있는 동료들이 아니었을까. 그룹한은 30주년을 넘어, 앞으로의 30년을 더해도 거뜬하게 조경계를 이끌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설계 1본부, 김애경 소장)
한계를 넘는 새로운 도전
“그룹한에서는 항상 예상을 뛰어넘는 도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입사 면접에서 전임 소장으로부터 들은 말의 의미를 지금 팀을 이끌며 깊이 이해하게 됐다. 주로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만큼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최근 진행 중인 군포대야미 공원 프로젝트에서는 기후 최적화 분석을 적용해 여름철에도 쾌적한 공원을 목표로 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그늘을 만들고, 바람이 흐르는 공간을 구상해 여름에도 시원한 공원이 되도록 계획하고 있다. 어떻게 더 새롭고 창의적인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프로젝트를 하며 늘 하는 고민이지만, 매 프로젝트에서 한계를 넘어서는 해결책을 고민해온 것, 그것이 그룹한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설계 2본부, 강이주 소장)
지난 20년을 돌아보며
20년 전 내 기억 속의 그룹한은 이전 회사에서 저녁 시간 잠시 빠져나와 경력직 면접을 보러온 것이 처음이었다. 유난히도 반짝이던 엘리베이터, 숨이 약간 찰 정도로 언덕을 올라야 하는 방배동 제일 높은 곳의 빌딩. 젊은 조경 그룹. 그때만 해도 20년을 근무할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 힘들었지만 우리는 늘 작은 성공을 할 수 있어 자신감이 넘쳤고 최고의 회사 일원이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동료 간의 우정과 경쟁, 선후배 간의 끈끈한 연대와 더불어 그때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한결 수월하게 내가 원하는 설계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20년을 그룹한과 함께했으며 우리는 같이 성장해왔다. 앞으로 더욱 성장할 그룹한과 나의 20년을 기대해본다. (설계 3본부, 주세훈 소장)
다채로운 가능성과 기회
그룹한은 나에게 많은 기회와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 평생 가보지 못할 남극부터 앞으로도 살아보지 못할 아파트, 살면서 가서는 안 되는 공공 청사들까지 프로젝트로 다가오는 20년간의 만남이 있었다. 정기 워크숍은 평소 숨쉬기 운동밖에 모르던 나에게 겨울에는 보드를, 여름에는 래프팅과 서바이벌 게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했다. 아마 100명의 사람과 뭉친 해외 패키지를 떠나는 경험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루를 그럭저럭 살아가던 나에게 다채로운 가능성과 기회를 준 그룹한에 감사한다. (설계 4본부, 정미혜 소장)
유유자적의 삶을 꿈꾸며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조경가는 실재할 수 있는가. 조경설계를 하던 동료들과 이 주제로 늦은 술자리에서 자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어린 시절에는 일이 바빠져 예약해 둔 휴가를 취소할 때 상사들을 탓하곤 했는데, 입사 6년차이자 소장인 지금은 모든 것이 내 탓이다. 지금 이 글은 연말까지 꼼짝없이 특근을 하며 고생해야 하는 우리 팀원들을 위한 고백문이다. 글을 쓰는 지금은 만추의 절경이 펼쳐진 10월 말, 마음은 저기 어딘가 시원한 바람 부는 벤치에 앉아 카페라테를 마시고 있지만 몸은 컴퓨터 앞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들이여, 빼앗긴 들에도 기필코 봄은 오고 우리는 곧 도서에 도장 쾅쾅 찍어서 납품을 하고야 말지어니. 함께 지금 이 역경을 묵묵히 함께 버텨내주어 몹시 감사하다. 오늘 유유자적한 삶을 살지는 못해도 내일 유유자적한 삶을 꿈꾸는 조경가 배상. (설계 5본부, 송시내 소장)
30년의 타임라인
입사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룹한은 10주년을 맞이했다. 내가 기억하는 10주년의 그룹한은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인재와 희망이 넘치던 곳이었다. 입사 10년차, 20주년을 맞이한 그룹한은 성장의 정점을 달렸다. 부산과 뉴욕 지소가 설립됐고, 계열사가 늘어났고 해외 설계사들과의 무수한 교류와 조경설계에 대한 다양한 고민과 실험이 시도됐다. 30주년을 맞이한 그룹한은 조경 분야의 많은 사람들과 ‘관계’가 연결된 곳이 됐다. 수많은 사람이 그룹한을 통해 인연을 맺었으며 업계 내 외부의 다양한 공간으로 진출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에게 그룹한은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30년의 시간은 그룹한을 단순한 직장을 넘어 인연을 맺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 한구석에 보관해야 할 중요한 의미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그룹한과 인연을 맺고 있는 이들이 가진 기억이 소멸하지 않도록 지속되길 바란다. (그룹한 김기천 본부장)
주니어
디자이너와의 대화(각주 1)
창립 당시와 현재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당시 조경 분야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조경설계사무소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건축이나 토목 분야와 비교했을 때 역할과 위상이 너무 낮아 비전을 갖기 힘들었다. 그때부터 제대로 된 조경설계사무소를 만들어서 우리 사회에 조경에 대한 인식을 뿌리내리고, 후배들에게 조경설계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심어주고 싶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조경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많이 나아졌다. 특히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하던 당시와 비교할 때 워라밸 관점에서는 괄목할 만한 변화가 있다.
사라졌거나 현재도 남아 있는 비공식적 전통 혹은 재밌는 관습이 있나
다양한 사내 행사 중에서도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에 진행하는 해피아워가 있다. 모든 부서별로 지난 한 달간의 프로젝트를 모든 사원들이 돌아가며 발표를 하고 함께 소통하는 시간으로 매달 새로운 활력을 불러 일으킨다. 또 과거에는 직원들의 동기 부여를 위한 독특한 인사 시스템으로 일명 로터리(lottery) 제도를 시행했다. 능력 있는 직원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누구든 PM에 지원할 수 있게 하고 직원들을 상대로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자율적으로 팀을 만들어 가는 전통이다.
회사에서 가장 특별했던 순간
직원들과 수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지만 함께 일했던 순간보다 사실 여행가고 놀던 기억이 더 그립다. 사회에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직원들과 주말에 시간을 쪼개 봉사활동을 다녔던 기억들이 특별하다. 환경조경나눔연구원과 함께 조성한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정원은 역사의 아픈 상처로 고통 받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조경이 선물한 따뜻한 마음이었다. 손수 삽을 들고 기념식수를 했던 생전의 김복동 할머니께서 기뻐하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가평 꽃동네에서 예쁘게 조성된 정원을 보고 하루 동안의 기적이라며 좋아하던 수녀님의 환한 미소도 여태껏 기억에 남아있다. 또 2007년부터 IFLA 학생설계공모전의 공식 후원사로 참여해 지금까지 전 세계의 조경 학생들이 참가하는 국제 행사에 우리 회사가 기여하고 있다는 것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룹한이 지향하는 지속가능한 조경 디자인을 위한 중요한 원칙이 있을 것 같다
과거에는 조경이 그냥 건축이나 도시 분야의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조경이 만드는 도시’가 세계적인 흐름이 되었다. 기존 대상지가 가진 생태적, 역사적 문화적 자원을 잘 보전하고, 이를 바탕으로 도시가 만들어져야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도시가 된다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문화가 공존하며 서로 상생의 길로 나갈 수 있는 대안을 찾는 것이 우리의 디자인 원칙이다.
3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지나온 여정은 파란만장했고 앞으로 가야할 길도 결코 만만치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어떠한 어려움도 함께 극복해왔던 것처럼 나와 그룹한 가족 모두가 멋지게 해내리라 믿는다. 우리에겐 조경을 위해 청춘을 불사르는 용광로와도 같은 열정이 있었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꺼지지 않는 혁신의 에너지가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당당하게 정도경영의 바른길을 걸어 갈 용기가 있다.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보다 지난 30년간 함께 동고동락했던 가족과도 같은 우리 동료들이다.
가장 기억에 남거나 아쉬웠던 프로젝트
수많은 공모전에서 당선됐지만 오히려 낙선했던 작품들에 아쉬움이 크다. 광교호수공원 국제설계공모에서 아쉽게도 우승을 놓치고 실망에 잠겼을 때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제임스 코너가 “이제 지는 법을 배워야 할 때이고, 전쟁에서 많이 져본 자만이 이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거야”라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당시 이미 세계적인 조경설계의 대가인 그도 수많은 공모전에서 낙선한 작품이 더 많았다고 했다. 스타 조경가로부터 지는 법을 배우고 다시 새로운 용기가 생겼고 더 많은 공모전에 도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30주년을 맞이한 감회가 어떤지 궁금하다
10주년을 맞이할 때는 회사가 급속한 성장기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파묻혀 있었다. 사원이 50명이 넘은 뒤 조직 관리의 어려움을 느끼고 체계적인 경영 공부를 위해 미국 와튼스쿨 최고경영자 과정을 이수했다. 디자이너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을 경영자라는 마인드로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20주년 즈음 회사가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국내 시장에서 벗어나 세계를 향한 도전을 시작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GSD 객원교수로 근무하면서 뉴욕 맨해튼에 그룹한 미국 지사를 세웠고, 조지 하그리브스, 제임스 코너, 사사키 등 세계적인 조경가들과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국제적인 조경설계사무소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30주년이란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 이제 다시 미래를 준비할 때가 온 것 같다. 앞으로도 그룹한은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위해 생명의 원천인 자연을 경외하고,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디자인,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미적 가치를 끊임없이 탐구해 나갈 것이다. 더불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며 건강한 사회와 이웃의 행복한 삶의 기반을 만들기 위한 노력에 더욱 힘쓸 것이다.
조경에 한이 맺혀 그룹'한'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얼핏 들었다. 지금 어느 정도는 그때의 한이 풀렸는지 궁금하다
1994년 11명의 젊은 디자이너를 모아 작은 조경설계사무소를 창업했다. 당시에 조경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족해 우리가 앞장서서 조경의 한을 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을 사명에 새기고 크게 된다는 의미와 한국을 대표한다는 의미의 한자 클 한(韓)으로 의미를 더했다. 또 1인이 아닌 팀으로 하나가 된다는 의미와 장차 큰 기업으로의 성장을 염원하는 뜻으로 그룹을 사명에 넣어 그룹한을 완성했다. 창업한 지 30년이란 세월이 흘러 강산이 세 번 바뀌었다. 한국 조경설계 분야의 성장과 역사를 함께 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500명에 가까운 인재가 그룹한의 문지방을 넘나 들었다. 한때 100명이 넘는 인원으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고 IMF와 리먼 사태와 같은 국내외의 숱한 위기의 파도를 넘어오면서 그룹한은 조경설계를 바탕으로 친환경 놀이터, 조경 시설, 자재 개발, 조경 미디어 등 글로벌 조경 그룹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각주 정리
1. 그룹한 30주년을 맞이하며 입사 1~3년차 주니어 디자이너들(민연주, 강다운, 김민지, 임민부, 이민정, 이다솔, 김혜지, 김채송)로부터 그룹한의 과거와 현재, 비전 등에 대한 궁금한 점을 질문 받았고 이에 대한 답변을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했다.
그룹한어소시에이트는 인간과 자연의 상생, 미적 가치와 효용성의 극대화,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환경을 위해 창의적이고 선한 디자인을 실천하고 있다.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위해 생명의 원천인 자연을 경외하고, 생물종 다양성과 전 지구적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생태적으로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디자인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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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파도 파도 끝이 없는 남산-공원
서울의 길에서는 (남)산이 보인다(각주 1)
조경과 도시를 키워드로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관한 연구를 하다 보면 몇 번이고 마주치게 되는 남산 혹은 남산공원. 서울시 공원 홈페이지는 남산을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서울의 상징”이라고 소개한다. 실제로 서울 시민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산과 얽힌 기억 한두 가지는 있기 마련이다. 물론 남산-공원에 쌓인 복잡한 역사적 켜와 정치·사회적 맥락으로 인해 화자의 연령대, 시기, 취향에 따라 남산의 경험은 크게 갈리게 된다. 남산을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선조의 발자취로 볼 것인가? 한양도성이라는 걸출한 문화유산이 그 형태를 뽐내는 유산의 위치로 볼 것인가? 대도시 서울 속 자연의 재현으로 볼 수도 있는가? 김종성 건축가가 설계한 힐튼호텔부터 케이블카와 말 많고 탈도 많은 남산돈까스까지, 20세기 중후반 서울의 대중문화 속에 새겨진 장소 기억으로 볼 것인가? 그도 아니면 바라보는 곳, 즉 대상으로서 남산에 무게를 더 둘 것인가?
에피소드 1. 만화의 집
일상에서 남산을 어떤 공간으로 인지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를 훌쩍 졸업하고 난 뒤 신도시로 이사 갔음에도 ‘일부러’ 남산을 오고 갔기 때문. 2000년대 초반의 여름 주말, 연신 ‘더워’와 ‘왜 이렇게 먼 거야’를 중얼거리며 경사진 좁은 보행로를 걸어 올랐다. 언덕이라면 질색팔색 하는 중학생이 자발적으로 남산을 오른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기 마련. 현재는 문을 닫은 ‘만화의 집’이 그 이유였다.
서울에서 만화 좀 봤다는 20세기 소년, 소녀라면 열에 일고여덟은 ‘서울애니메이션센터’를 들어보지 않았을까. 최근 몇 년간 재건축으로 인해 회현역 근처로 자리를 옮겨 운영했지만, 원래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현재 남산예장공원이라고 알려진 곳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담론화가 부족할 뿐 이 부지의 역사도 한 굴곡한다. 1950년대 KBS 사옥으로 완공됐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는 국토통일원 청사, 1980년대에는 안기부, 1999년(Y2K!)부터 서울경제진흥원이 운영하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의 자리로 유지되고 있다. 그 이전에는 통감부 자리였고, 일제강점기 중반부터 한동안은 과학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남산의 유구한 역사와 비슷한 결을 지닌 부지다.
그렇다면 왜 만화의 집에 가야 했는가? 답은 간단하다. 온종일 무료로 (당시만 하더라도) 국내에서 손꼽히는 만화책 컬렉션을 볼 수 있는 시영 만화방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네 만화방보다 깨끗하고 만화책 관리도 잘 되어 있어서 이쪽 계열 학생들이 시내 곳곳에서 모여드는 핫플이기도 했다. 다만 다들 만화책 읽기 바빠서 사랑방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환경과조경440호(2024년 12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2024년 10월에 출간된 건축가이자 조경가이며 도시경관기록자로도 잘 알려진 김인수의 책에서 따온 소제목이다. 김인수, 『서울의 골목길에서는 산이 보인다: 오래된 골목길에서 바라본 서울, 그 30여 년의 기록』, 목수책방, 2024.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jin.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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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제도가 낳은 도시와 그 이면
2023년 1월부터 격월 연재한 유영수 교수(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과)의 ‘제도가 만든 도시’를 이번 호로 끝맺는다. 저자는 “도시는 인류가 만든 가장 복잡하고도 복합적이며 수많은 사람이 물리적으로나 비물리적으로 밀도 높게 개입한 공간적 장치”이므로, “결국 도시의 모습, 즉 도시 공간의 형태와 거기서 일어나는 공간적 현상은 사람에 의한 의식적 행위와 집합적 질서로 만들어진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그의 기획은 ‘제도’라는 도시의 “일반해가 우리 도시의 보편적인 모습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417호) 조회하고 비평하는 긴 여정이었다.
연재의 첫 글은 ‘도시의 제도는 정당한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도시를 구성하는 “제도는 우리 사회가 합의한 가치 체계와 질서를 작동시키는 공간적 장치를 만”든다는 점에서 그것이 공공에게 이익을 가져올 때 정당성을 보장받는다. 하지만 “도시 제도는 특정 공간과 시간 속에서 절대적이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정당하며, 종종 사회의 지배적 가치에만 예속된 도구가 되기 쉽다”(417호).
이러한 문제의식은 “제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적 측면에서 제도의 형식과 실행 방식이 가지는 한계를 우리 도시의 여러 사례를 통해 짚어보”는, 즉 ‘도시의 제도는 효율적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도시 제도를 통해 보편적 가치를 제시하고 사회적 동의를 얻기 위해 애쓰는 것 이상으로 “적절한 설계 기준과 다양한 규제의 방식 자체를 개발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유연한 허용을 합리적으로 허용하고 그러한 허용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419호).
우리는 도시에서 제도가 결정하는 공간의 ‘크기’에 묶여 살아간다. 저자는 “제도가 규정하는 크기 제한의 의미를 곱씹”으면서 그 크기―특히 면적과 높이―를 넘어서고자 하는 도시의 열망을 살피고, 작은 도시 조직과 형태에 더 가혹한 제도의 불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한다(421호). 그는 ‘크기’의 쟁점을 인구 감소에 따른 축소도시 문제와도 연결한다. “감소한 인구에 맞춰 도시의 크기를 적정한 수준으로” 줄여야 하지만, “성장과 달리 축소에는 상당한 저항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도시를 줄이더라도 “도시의 삶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게 하는 것, 즉 “자율주행, AI 로봇 등 발전하고 있는 여러 가지 새로운 기술을 비롯해 도시 서비스를 제공하는 다양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423호).
연재는 제도가 규정하는 ‘도시의 비움’을 되묻는다. 도시의 제도는 밀집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됐다고도 볼 수 있다. “산업화와 도시 인구의 급격한 증가가 야기한 정주 환경의 악화는 밀집은 죄악이라는 생각을 낳았고, 이를 해소하는 것이 곧 도시계획과 제도의 소명이었다.” 따라서 도시의 제도는 “‘채움’을 억제하고 ‘비움’을 강제하는 방향성을 가지며, 채움과 비움의 양과 크기에 대해 비율, 최대‧최소의 기준을 제시한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에게 익숙한 건폐율과 용적률을 들 수 있다. 저자는 제도에 따른 비움의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제도가 만든 나쁜 비움”을 우려한다. 총량만을 고려해 “비움의 배분”에 관여하지 못하는 제도, “비움의 위치와 형태”를 다루지 않는 제도, “비움의 획일성과 평면적 비움”의 한계를 지적한다(425호).
도시의 “다양성은 도시가 사회와 개인에게 제공하는 ‘기회의 폭’”이자 “도시의 번영을 가져오는 ‘도시적’ 자원”이다. “제도가 도시 공간의 다양성에 어떻게 관여하는가”라는 저자의 탐색은 다양성과 통일성의 켤레 관계에 관한 논의로 확장된다. 우리는 통일성을 다양성의 반대 극단에 있는 가치라고 여기곤 한다. 그러나 저자가 다양한 논거를 들어 예증하듯, “두 속성은 오히려 양립해야만 서로를 강화하고 드러내는 역설적 관계”를 맺는다. 도시의 제도는 “다양성은 통일성을 배경으로 부각”되고 “다양성을 구성하는 통일성”도 있다(427호)는 점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마치 생명체처럼 도시도 삶과 죽음을 겪는다. “도시 공간 요소가 새로 태어나고 쓰이다 낡고 죽는 생로병사, 혹은 신진대사는 …… 도시의 긴 역사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저자는 보도블럭 교체부터 재건축, 재개발에 이르는 폭넓은 사례를 들어 도시의 제도와 엮인 ‘도시 공간의 생로병사’를 살핀다(429호). 도시의 ‘시간’과 관련한 의제는 여덟 달 뒤의 글인 ‘도시의 역사, 문화유산’(437호)과 교집합을 갖는다. 그는 경직된 제도에 의해 “문화유산[이] ‘과거’에 박제되고 주변의 ‘현재’ 도시 공간의 필요와 충돌”하는 난맥을 짚는다. 복원의 원형과 시점, 규제 일변도의 역사경관 문제 등에 관한 논의를 통해 저자는 제도적 방법의 다양성이 도시의 역사적 품격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도시를 둘러싼 제도의 핵심은 ‘소유’로 수렴된다. 자본주의 체제의 “도시 공간은 …… 어느 한 조각도 ‘소유’의 밖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소유와 재산권은 도시의 제도에서 매우 견고하게 작동한다. 물론 도시의 다양한 제도는 헌법상의 “‘공공복리’를 근거로 재산권을 제한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가지며 …… 공간의 소유에 배타적으로 보장되는 사용‧수익‧처분의 권리 모두에 촘촘하게 개입”하지만, 결국 도시 개발의 이익 문제와 얽힌다. 소유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결국 도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저자의 말처럼 “소유가 독점하는 배타적 권리의 선은 사회적 합의의 결과로 인정해야 하지만, 그래도 항상 질문은 필요하다”(431호).
도시의 자연을 만드는 것도 결국 도시의 제도다. “도시 안에서 자연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들은 자연의 여러 가치[가] 효과적으로 달성되도록 유도하고 있을까?” 저자는 획일적인 양적 공급이나 면적 확보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일상 도시 공간의 작은 자연” 혹은 “도시 내 작은 자연의 조각에 대한 개별적 디자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433호).
도시에서 기능의 위치와 배열은 도시 공간의 구조를 형성한다. 저자는 우리 도시의 기능과 구조를 강력하게 규정하는 용도 지역(zoning)과 획지의 허점을 짚으며 “더 유연하고 역동적이거나 더 높은 혼합을 위한 계획적 수법”(435호)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12회에 걸친 ‘제도가 만든 도시’를 맺으며 저자는 “‘일반해’로서 제도의 실행 방식”이 낳은 “획일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결과”를 되짚는다. 그리고 “양적 기준 위주의 운용에서 비롯된” 난맥을 넘어설 수 있는 “정성적 가치의 제도화”, “집합적 중재와 거버넌스”, “전문가의 역할과 전문가에 대한 사회적 신뢰”라는 과제를 던진다(439호). 도시 공간의 현재를 낳은 제도와 그 이면을 탐사한 유영수 교수의 긴 여정에 깊이 감사드린다.
큰따옴표 안의 구절과 문장은 모두 연재 글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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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발끝에 걸린 풍경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쭉 읽을 순 없을까. 몇 페이지 넘기다 멈추고 쌓아둔 책 더미를 볼 때마다 한숨을 내쉰다. 시작한 책을 마무리하기 전에 자꾸만 새 책을 기웃거리는 버릇 탓에 책 더미와 그만큼의 죄책감이 자꾸만 늘어난다.
읽다 만 책을 늘리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표지 그림부터 제목, 목차, 소개 글, 내지 디자인까지 완벽히 내 취향인 책을 만난다. 당장 주문해서 펼쳐 든다. 역시 재미있다. 어라, 그런데 생각보다 어려운 내용이 슬슬 등장한다. 설마 끝까지 이러겠어? 남은 페이지를 훑어본다. 두툼한데 글이 빽빽해서 잘 읽히지 않을 것 같다. 조금 질리는 찰나 인터넷 서점 메인 페이지에 흥미로운 책이 등장한다. 책의 상세 페이지를 읽다가 이 책이야 말로 완벽히 내 취향임을 알게 되고 또 구입한다.
지난 봄, 북한산 산책을 다녀왔다. 완만한 길만 골라 천천히 걷는데 내려오는 등산객들이 바람을 넣었다. 전망대에 오르면 경치가 근사하다고. 건물 4~5층 정도 높이의 전망대는 꼭대기까지 계단이 이어졌다.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지면과 한 뼘씩 멀어지더니 머리 위에 있던 나뭇가지가 어느새 발아래에 있었다. 생각보다 꽤 아찔해서 더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었다. 오를수록 더 무서울 텐데 어쩌지. 어정쩡한 자세로 손잡이를 꼭 붙잡고 등산객을 원망하다가 발아래의 높이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을 다음 계단 안쪽에 완전히 들어오게 올려놓았다. 안전하다고 느껴질 만큼 아주 천천히. 그렇게 계단 하나를 밟고 다음 계단을 밟았다. 그렇게 하나씩 꼭꼭 밟아 나가니 어느새 정상이었다.
멈춰버렸던 책도 한 권씩 꺼내어 그 문장을 하나하나 꼭꼭 밟아 나가고 싶다.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에 가닿을 때까지. 참, 그때 올랐던 전망대의 풍경은 무심코 주워섬긴 말처럼 근사하지는 않았다. 북한산이긴 해도 작은 동네 전망대이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내려오는 발걸음은 가벼웠고 봄바람은 상쾌했다. 완독의 기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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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가 만든 도시] 제도가 만든 도시
연재를 시작한 지 어느덧 2년이 됐다. 여러 법제도가 어떤 목적과 수단으로 시행되며 어떤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는지에 관심을 가져 왔고, 그간 몇몇 연구와 수업에서 다루기도 했다. 그러나 이 주제로 열두 번의 글을 쓰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생각해 두었던 ‘거리’가 금세 떨어져 솔직히 고백하자면 중복해서 등장한 소재도 있다. 연재 전에 알고 있던 것 이상으로 연재를 하면서 알게 된 것도 많다. 쓰고 지우기를 무한 반복하며 문장을 짓는 나의 대책 없는 글쓰기 방식에 대해서도 반성했다. 참 무모한 도전이었고, 부끄러움을 평생 지고 가야할 것 같다.
마지막 원고에 이르러 이 연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돌이켜보며 열한 편의 원고를 찬찬히 다시 읽어 보았다. ‘제도는 정당한가, 그리고 효율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연재를 시작한 이래, 도시 제도와 우리 도시 공간의 ‘크기’, ‘비움’, ‘다양성과 통일성’, ‘생로병사’, ‘소유’, ‘자연’, ‘기능’, 그리고 ‘역사’에 관여하는 바를 이리저리 헤집었다.
특히 여러 현실 공간의 사례와 기사를 많이 다루려 했다(그림 2). 대개는 우리 도시 제도가 만든 공간 현상의 부정적 결과를 들추며 제도의 불완전함과 부작동, 나아가 부조리를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첫 원고에서 ‘제도는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질문했지만, 역시나 비판이 쉽기 때문이다. 전보다 더 나은 도시 공간을 만드는 데 기여한 도시 제도도 많고, 제도 자체도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 왔는데 그런 부분은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 각 꼭지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내용들을 되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도시의 ‘크기’에 관여하는 제도는 ‘최소’, ‘최대’ 같은 기준으로 도시의 웬만한 공간 요소의 크기를 재단한다. 우선적으로는 더 높고, 더 넓은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개인의 욕망을 공공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선으로 제한하기 위한 목적에서다. 그러나 동시에 ‘크기’에 관여하는 제도는 더 높고, 더 큰 도시를 향한 우리 사회의 집단적인 욕망을 수용하고 혹은 부추기며, 작은 공간에 더불리하고 가혹하게 작용하는 ‘이중 플레이’를 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내 방 창문의 크기부터 도시의 크기까지, 도시 공간의 크기를 정하는 제도가 못하는 것이 있다. 도시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다. 도시 자체의 ‘크기’에 관여하는 현대의 도시계획 제도는 오로지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전제하고 그에 맞춰 도시를 넓혀 짓는 물레라서 거꾸로 돌아가지 않는다. 인구가 감소하는 만큼 이미 만들어진 도시를 합리적으로 줄여나가기 위한 도시계획 제도는 사실상 아직 없다. 그러나 인구 감소를 넘어 소멸을 우려하는 지방 소도시에서도 기성 시가지 밖 새로운 땅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을 허용하는 물레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어 사실상 도시를 늘려가고 있는 셈이다.
도시의 ‘비움’에서는 공공이 마련하는 ‘공동의 비움’과 민간이 대지 단위에서 확보하는 ‘개별의 비움’ 간의 균형에 대해 질문을 제기했다. 우리 도시의 주거지에서 단지형 아파트가 점점 더 우세해지는 상황은 도시가 공유하는 비움이 아닌 외부에 배타적인 비움이 늘어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더 큰 문제는 도시 안에서 그 분포와 역할이 다른 두 비움 간의 적정한 배분이나 상호 관계에 대해 도시 제도가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공동의 비움’을 만드는 제도와 ‘개별의 비움’을 만드는 제도는 각각 움직인다.
*환경과조경439호(2024년 11월호)수록본 일부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 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 디자인과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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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륙순환 도시주의] 바당 가는 길
“바당서 나오당 다쳐시녜”
바당밭으로 들어가는 길 위 이씨 삼춘(삼촌의 제주 방언)의 한 팔이 굽어 있었다. 푸른 깁스가 무심히 그의 팔을 감쌌다. 수확한 물건을 들고 오던 삼춘은 젖은 현무암에 미끄러졌고. 그 와중에도 삼춘은 성한 한 팔로 갈퀴를 쥐고 사락거리는 검붉은 톳을 바당밭 앞 시멘트 도로에 펼치고 있었다. 해녀는 바다와 땅을 오간다지만 인간은 본래 땅 위에 사는 동물이다. 숨을 쉴 수 있고 두 발로 설 수 있는 안정적인 2차원의 땅과는 달리, 바다는 잠시 숨을 참고 방문하는 중력과 부력 사이의 3차원 공간이다. 그 둘을 오가는 데는 다양한 기술(테크닉과 테크놀로지)이 필요하다. 호흡을 참고 내쉬는 기술(숨비질), 한기를 견디는 기술, 물건을 채집하고 물 밖으로 운반하는 기술(테크닉)부터 물에 떠서 잠시 기댈 곳이 되어주는 테왁, 잡은 물건을 넣는 망사리, 고무옷, 물안경과 같은 도구, 몸을 덥히는 불턱이나 목욕을 할 수 있는 탈의장, 바당밭 진입로와 해녀배가 접안할 수 있는 항구와 같은 기반 시설까지(테크놀로지). 이러한 기술들은 다양한 관습과 제도와 맞물려 바당밭을 오랫동안 가꿔왔다.
첫 번째 글 “잠수하는 풍경”에서 필자는 해륙순환 도시주의를 해녀가 땅과 바다를 연결시키듯 건축과 조경이 수면 위아래의 다양한 행위자들의 (부가)생산물들을 호혜 교환하는 지역적 시스템으로 정의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과 제도로써 고무옷과 금채기, 바당밭 진입로와 물마중을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필자가 참여한 물마중의 경험을 통해 땅과 바다를 연결시키는 기술로써의 ‘길’과 해녀 공동체와 바깥 사회를 연결하는 사회적 연결로써의 ‘길’을 새롭게 상상해보겠다.
고무옷과 금채기
땅과 바다를 오갈 수 있게 하는 많은 기술 중에서 해녀의 물질을 가장 많이 변화시킨 것은 1970년대 고무옷의 도입이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해녀들은 물적삼과 물소중이라고 부르던 무명이나 광목 소재의 작업복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물질에 최적화된 디자인이었지만 젖은 무명이나 광목은 바다 속 한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해녀들은 물에 들어가기 전, 중간, 후에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바다로 들어가는 길목에 불을 피우는 자리인 불턱을 만들었다. 불턱에서 몸을 녹이고 들어가도 작업 시간은 30분에서 한 시간 내외였다. 자신의 숨 길이와 추위로 인한 작업 시간의 한계가 자연스럽게 바당밭의 고갈을 방지했다.
하지만 짧은 물질과 불턱으로 몸을 녹이던 작업 리듬이 고무 잠수복의 도입으로 바뀌었다. 일본에서 사온 고무옷을 입은 해녀들이 3~5시간 작업을 하며 4배에서 5배 더 많은 물건을 수확하자 이 기술의 도입을 반대하는 해녀들이 생겼다.(각주 1) 그들은 갑자기 증가한 생산성으로 인해 “물건이 씨가 말라”버릴 것을 걱정했다. 고무옷 도입을 찬성하는 해녀들은 고무옷이 가져온 열적 편의(thermal comfort)와 생산성의 향상, 경제적 이득을 우선시했다. 해녀 공동체는 이러한 논쟁을 고무옷과 함께 자원 고갈을 방지할 여러 제도를 도입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간 불문율로 존재했던 관습을 ‘공동어장관리규약’으로 문서화해 물질 시간을 제한하고, 계절에 따라 건질 수 있는 물건의 종류와 크기 등을 규정하고, 자치 기구를 두어 이 규칙을 집행·감독했다. 예를 들어 해녀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인 뿔소라의 경우 산란기인 6월부터 9월까지 채집을 금했고(금채기), 7cm 이하의 소라는 잡거나 판매하지 않음으로써 지속가능하게 했다. 채집하는 양을 조절하는 것뿐만 아니라 해녀는 바당밭에 ‘씨’를 뿌리기도 한다.
바당밭 내의 ‘자연 양식장’을 두어 소라나 전복, 해삼의 작은 개체들을 풀어주고, 이것이 자랄 때까지 그 구역에서 물질을 금지했다.(각주 2) 또한 해초의 경우, 돌미역이나 톳, 그리고 비료로 사용하던 듬북까지도 특정 기간에는 채집을 금지해 이것이 충분히 자랄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해녀들은 “공유의 비극을 넘어” 바당밭을 보존해올 수 있었다.(각주 3)
유학생에서 일손으로
2020년 9월 27일, 종일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렸지만 별반 건진 것 없이 돌아가는 길이었다.검은 현무암이 펼쳐진 해안가 멀리 작은 검은색 매스가 서 있었다. 오름을 닮아 둥근 지붕을 가진 단층 건물은 현무암으로 마감되어 있어 마치 그곳에서 솟아난 듯 했다. 정면에 걸린 ‘제주시수산업협동조합 삼양어촌계 잠수탈의장’이라는 손글씨 현판이 정겨웠다. 문을 두드리니 한 해녀가 나왔다. 그는 몸이 안 좋아 물질을 나가지 못했다면서도 내가 해녀 건축과 풍경을 연구한다고 말하자 탈의장과 불턱을 보여주었다. 탈의장에는 여럿이 동시에 씻을 수 있는 큼직한 공용 목욕탕이 있었고 작은 거실, 그보다 더 작은 부엌이 딸려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쓰지 못한다는 불턱은 옆집 창고가 입구를 막고 있어 접근이 어려웠고 태풍에 반쯤 무너져 있었다.
어느덧 동료들이 물에서 나올 시간이 되었다며 따라가겠느냐고 묻기에 냉큼 따라나섰다. 해안가 돌길을 따라 걸으니 멀리 해녀들이 물 밖으로 망사리를 이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뒤로는 20대로 보이는 관광객 두 명이 해안가 의자에 앉아 구경하고 있었다. 급히 사진을 마저 찍고 망사리를 건져내는 데 손을 보탰다. 소라가 가득 담긴 망사리는 20kg은 거뜬히 나가는 듯했다. 망사리 그물을 들면 그 사이로 튀어나온 소라뿔이 몸을 찔렀고, 거기서 떨어지는 물이 현무암을 더 미끄럽게 했다. 겨우 언덕을 올라 도로 위 리어카에 실었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 사이, 큰 목소리로 얘기하는 해녀들에게서 수확의 흥분과 땅으로 돌아왔다는 기쁨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정신 차리고 보니 리어카를 끌고 있었다.
“게난 여기서 뭐햄서(그러니까 여기서 뭐하느냐)?” 한 삼춘이 뒤에서 리어카를 밀며 물었다. 미국서 건축 공부하는데 해녀의 디자인과 풍경을 연구한다고 하자 별반 말이 없었다. 이후 이어지는 질문들. “결혼은 해시냐(했느냐)”, “여자 친구는 이시냐(있느냐)”, “무사 머리는 여자추룩 그자락 길렁다념서(왜 머리는 그렇게 여자처럼 길게 하고 다니느냐)?” 결혼은 아직이며 여자친구는 없다고 하자, 삼춘들은 나지막한 탄식과 함께 그 원인이 내 머리 길이 때문이라는 명쾌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 아찔하고 흥겨운 대화에 함께 웃다 보니 탈의장에 도착했다. 삼춘들은 즉시 소라를 크기에 따라 분류하고, 일부는 삶아 살만 꺼내고 껍질을 버렸다. 생물로 팔 것은 바닷가 웅덩이를 창고 삼아 그 속에 넣어 보관했다. 일이 끝나가자 이씨 삼춘이 수고했다며 내게 작은 문어 한 마리와 소라를 검은 봉지에 싸주었다.
해녀가 바다에서 나올 때 마중 나가는 것을 ‘물마중’이라고 한다. 보통 이때 육지에서 기다리던 남자들이 물건을 건지고 옮기는 일을 돕는다. 물에서는 부력으로 뜨던 물건들이 물 밖에서는 무거워지기 때문에 일손이 더 필요한 것이다. 내가 갔던 날도 한 할아버지가 나와서 물건 건지는 일을 함께했다. 그날 우연히 물마중을 나가게 된 인연으로 나는 삼양 삼춘들을 자주 찾아 만나고일하는 모습을 기록하며 삼춘들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3월쯤 아예 삼양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한동안 삼춘들을 볼 수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갈 때마다 다음에 찾아오라며 돌려보냈고, 포기할까 고민하던 2021년 4월 14일, 장문의 편지를 써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찾아갔다. 텅 빈 탈의장 주변을 걷다 보니 잠수회장이었던 이씨 삼춘이 저 멀리 바당밭 진입로에서 날 보고 손짓했다. 팔에 깁스를 한 삼춘은 바다에 들어가지 못한 대신 수확한 톳을 한 팔로 고르게 너는 중이었다. 시간 있으면 도우라는 말에 오랜만에 쓸모가 있어진 나는 그날부터 삼일 내리 삼춘들과 톳을 수확했다. 보통은 남편이나 아들 등 다른 남자들이 일을 돕는다는데, 삼양 3동에서는 첫날 임금을 받고 일하던 한 남성을 제외하고는 오직 나와 대여섯명의 삼춘들이 전부였다.
톳 수확은 물의 흐름을 따라간다. 썰물이 시작되면 삼춘들은 톳을 수확해서 빨간 포대에 담은 후 더 깊은 바다로 나아간다. 어느 정도 무거워지면 포대를 근처에 두고 계속 전진한다. 밀물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면 돌아오면서 하나씩 육지로 옮긴다. 톳이 파도에 떠내려가기 전에 운반해야 하기 때문에 쉴 수 없다. 삼춘들은 계속 톳을 담고, 나는 계속 뭍으로 날랐다. 20kg 내외의 톳 한 포대를 들고 현무암 지대를 지나가는게 쉽지 않았다. 현무암 표면은 거칠지만 물과 이끼로 미끄러웠고, 겉에서 보기에는 안정적이어도 밟으면 흔들리기 일쑤였다. 이씨 삼춘처럼 나도 넘어져서 바지가 찢어지고 무릎이 까졌다. 일하는 게 영 불안한 나를 보며 삼춘들은 길을 일러주었다. ‘보기엔 다 검은 돌이지만, 걸어 보면 흔들리지 않는 길이 있다.’ 오직 노동으로 익힌 길. 3일차 작업이 끝나자 머리 긴 일꾼이 쓸 만했는지 늘 까칠하던 한 삼춘이 번호를 쓰고 가라고 했다. 그러곤 빳빳한 오만 원 권 두 장을 쥐어 주며 내게 여기서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길
근대화가 한창이던 1980년대 제주, 해녀들은 바당밭 작업로를 포장함으로써 바당밭 풍경을 바꿔 나갔다. 검은 현무암 사이로 회백색 시멘트가 틈을 메꾸었고, 두터운 선이 되어 바다와 육지를 가름했다. 그 길 위로 해녀들은 조금이나마 안전하게 걸었고, 물차(운송 트럭)는 해안가 더 깊이 들어와 바다 창고에서 물건을 건져 갔다. 하지만 시멘트 포장은 돌 틈에서 살아가는 소라와 거북손, 게와 같은 생물의 서식지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시멘트의 생산과 운송, 폐기에 있어서도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두 환경을 연결하는 다른 길도 있지 않을까?
해륙순환 도시주의적 제안은 소라 껍데기로 길을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소라나 전복 껍데기는 대부분 재활용되지 않고 바닷가 주변이나 폐기장에 버려진다. 1920년대 일제 식민지 시절 이러한 껍데기를 가공해 단추로 재활용하는 공장이 제주에 있었지만 1980년대에 문을 닫으면서 껍데기는 쓰레기가 되어 버려졌다.(각주 4)해녀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많은 음식점의 경우에는 해산물 껍데기를 모아 폐기물 업체에 넘기는데 이 중 일부만이 비료나 자개의 재료로 재활용됐다.(각주 5)이를 해결하기 위해 2020년 제주도는 몇 마을에 분쇄기를 도입해서 껍데기를 갈아 비료로 활용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고, 다양한 기관들이 자원화 방안을 모색하는 중이다.(각주 6)나는 뿔소라 껍데기를 조간대 길의 골재로 사용해보는 것을 상상해본다. 탄산칼슘으로 이루어진 뿔소라 껍데기는 겉에 나있는 뿔과 나선형의 형태 덕분에 압력이나 충격에 강하다.(각주 7)또한 그껍데기를 쌓았을 때 뿔이 맞물리고 단단하게 결합한다. 해녀들이 자주 오가는 길목에 3차원 지오넷을 설치하고 그 속을 소라 껍데기로 채우는 것이다. 이런 길은 해녀들의 작업을 조금이나마 덜 위험하게 하고 환경에 미치는 영향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 길은 관광객이나 다른 주민에게 산책로가 될 수도 있다. 그 길 위에서 해녀가 아닌 사람들도 땅과 바다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면, 바다에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일이 조금 더 쉬워진다면, 더 많은 사람이 해녀의 일에 동참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며 파도와 사람들의 걸음으로 소라 껍데기가 깨지고 부서졌을 때, 그 길을 새롭게 채우는 것도 하나의 의례가 될 것이다.
해녀 공동체는 신규 해녀의 부재, 물질 소득과 농어촌 인구의 감소 등의 이유로 사라져가고 있다. 해녀 평균 연령은 이미 2020년에 70대를 넘어섰고,(각주 8)제주 해녀 인구는 1970년 1만 4,143명에서 2023년 2,839명으로 급감했다. 해녀학교가 신규 해녀를 양성하고 있지만, 실제로 어촌계에 가입해 해녀가 되기란 어렵다. 최소 물질 일수를 채워야 하고 기존 공동체의 동의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각주 9)직업인으로서 해녀를 양성하는 것이 해녀의 소멸을 막기에 충분하지 않다면 조금 느슨하고 열린 공동체는 어떤가? 길 위해서 만나는 것이 시작이 될 수 있다. 문화유산으로서의 해녀가 아니라 우연히 마주친 이웃으로, 관광객이 아니라 물마중 나오는 지인으로서. 조금씩 우연히 함께 걷다 보면 연결될 테니.
**각주 정리
1. 고광민,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속의 해녀 연구”, 『무형유산』 6, 2019, p.232. 김경돈, 류석진, “비배제성과 경합성의 순차적 해소를 통한 공유의 비극의 자치적 해결방안 모색: 제주도 동일리 해녀의 자치조직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연구』 20(3), 2011.
2. 안미정, 『제주 잠수의 어로와 의례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연구: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위한 문화전략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박사 학위논문, 2007, p.119.
3. 엘리너 오스트롬, 『공유의 비극을 넘어』, 알에이치코리아, 2010. 해녀 공동체가 어떻게 오스트롬이 정리한 지속가능한 공유 자원의 여덟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는 노우정의 『제주 해녀공동체의 특성과 지속가능한 마을어장 관리』(제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1)를 참조.
4. 장태욱, “군수시설에서 통조림공장, 도시재생까지 요동치는 근대 유산”, 「서귀포신문」 2019년 3월 18일.
5. “버려지던 굴, 조개 껍데기 새로운 소득원 된다”, 해양수산부 보도자료, 2023년 1월 12일.
6. 김태홍, “서귀포시, 소라, 성게 껍질 해양오염방지 농가 퇴비로 재활용… 파쇄기 지원”, 「제주환경일보」 2022년 2월 28일.
7. 권예슬, “자연계 최고로 단단한 소라껍데기의 비결은”, 『동아사이언스』 2016년 2월 18일.
8. 이진호. “‘은퇴자가 신규해녀의 10배, 제주 해녀 인구 3000명대 붕괴’ 소멸해가는 해녀, 그 속의 작은 움직임들 지켜내야”, 「한경」 2024년 3월 25일.
9. 위의 글
강준호는 존재와 제도가 만든 풍경을 읽는 건축가다. UCLA에서 건축과 미술사를 복수전공한 뒤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GSD)에서 건축학 석사를 마쳤다. 이후 게럿 도허티(Gareth Doherty) 교수의 비평적 조경 디자인 연구소(Critical Landscapes Design Lab)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해안 지역의 기후 변화 인식을 조사했다. 현재 건축가와 정원사로 일하며 조경과 건축을 함께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 @junho_s_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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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디자인 오피스] 서도
축적된 랜드스케이프를 탐구하고 재해석해 장소에 새로운 연속성을 부여하다
오피스의
시작
사무실을 시작한 건 설계를 하다 보면 장소가 지닌 정체성을 단순히 컴퓨터 화면과 종이의 결과물로 구현할 수 없다는 갈증 때문이었다. 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한 게 디자인 빌드였다.
사무실 개소 후 첫 디자인 빌드 프로젝트는 보리(Voree)였다. 보리는 서해라는 서사가 담긴 랜드스케이프와 농경 문화가 스며 있는 장소다. 이 지역이 가진 독창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지역의 고유한 질감을 디자인에 반영하고자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서해의 석양과 청보리, 메밀의 생산적 경관을 감상하는 공간이 만들어졌고, 지속가능한 로컬리티가 형성됐다. 클라이언트, 건축가, 조경가, 시공자가 긴밀하게 협의했다. 덕분에 보리만의 고유한 정체성이 드러나는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장소의
탐구와 해석
오랜 세월 동안 장소는 생태학적 요소와 인문학적 요소로 인해 고유한 모습으로 변화한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이을 수 있게 현 시점에 필요한 순기능을 디자인 요소로 도입해 지속가능한 경관을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조성된 공간은 긴 생명력을 지니게 되고 동시대의 공유 공간이 된다.
보리는 영광군 백수해안도로 한편에 위치한 작은 카페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지역의 고유한 랜드스케이프를 발굴하는 과정을 가졌는데, 그때 해안가의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란 청보리, 해안 절벽과 석양을 감상할 수 있는 잠재적 자원을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을 새롭게 조성하기보다는 기존 경관을 온전히 이어갈 수 있는 설계를 하며 지역 고유의 질감을 유지하고 주변 자연 경관에 순응하게 했다. 전면에 긴창이 설치된 건축물에서 석양과 청보리밭의 파노라마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차경을 통해 방문객이 건축물 내부에서 자연 경관을 감상하고, 외부로 나와 자연의 경이로움과 서사적 풍경을 직접 경험하길 바랐다. 이를 위해 외부 공간으로 안내하는 유입 요소가 필요했다. 청보리밭에서 해안 절벽의 파도 소리와 석양을 감상할 수 있는 두 곳을 결절점으로 설정했다. 결절점에는 인근 지역에서 자란 팽나무를 식재했으며, 목재 오브제를 설치해 방문객의 흥미를 유발하고 진입을 유도하고자 했다. 그늘목 아래에 서면 서해의 환상적인 해질녘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고유한
질감 찾기
땅의 기억과 흔적
장소의 고유한 질감은 땅의 기억과 흔적에 새겨져 있다. 용산어린이정원 프로젝트에서는 현장에서 독특한 반달 패턴의 담장을 발견했다. 반달 형태의 콘크리트 블록을 패턴화해 이 장소의 고유한 색상과 질감을 표현했다. 아이들의 생각을 담을 수 있는 반달 모양의 낙서판, 가족들이 담소를 나누는 반달 테이블, 다채로운 활동을 유도해 생동감을 불어 넣는 두더지 잡기, 용산 미8군 클럽무대에서 모티브를 얻은 무대 놀이터 등 독특한 패턴의 디자인을 통해 이 지역의 기억과 흔적의 이야기를 담고자 했다.
시경원(時景園)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했다. 대상지는 고봉산의 낮은 구릉지에 야생 초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그 지역이 지니고 있는 경관적 특성과 땅의 흔적을 존중하여 장소가 지니고 있던 기억에 어긋나지 않고 온전히 이어갈 수 있도록 그 지역의 식생 경관을 그라스와 암석 소재를 활용해 디자인했다.
소재의 물성
재료의 물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소재를 활용해 디자인한다. 재료 본연의 질감을 감상할 수 있으며, 시간 변화에 따라 재료의 물성도 함께 변화해 단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암석은 지역마다 색상과 질감이 다르다. 예부터 마을의 담장에 쓰인 돌은 집터, 경작지에서 나오기도 하고, 주변 산이나 강가에서 주워 오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지역마다 석재의 특성을 구분했다. 그래서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암석을 활용해 디자인에 적용한다. 목재도 종종 활용한다. 목재는 시간의 물성을 잘 나타내는 소재다. 영구적이지 않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연으로 환원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색감과 질감의 물성이 변화한다. 주변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아 사람의 피부가 닿는 곳에는 목재를 주된 소재로 활용한다.
식물
식물로 고유한 질감을 만들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자연스레 씨가 떨어져 오랜 시간 동안 천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식생 경관을 아무리 비슷하게 묘사하더라도 본연의 모습을 구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최대한 유사하게 연출하기 위해 주변 식생을 관찰하고 관련 문헌 조사를 진행한다. 대상지 인근 지역의 생태 조사 보고서를 참고하다 보면 지역 자생종과 식생 환경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기초 자료를 토대로 기후 조건, 생육 환경, 수급 여부를 고려해 수종을 선정한다.
인문학 관련 문헌을 조사하면 식물에 담긴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끼는 맨땅이 드러나 식물이 전혀 없는 곳에 가장 먼저 나타나 다른 생물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주는 식물로 알려져 있고, 과거에는 아기 기저귀 재료로 사용됐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식물이다.
이렇듯 식물에 담긴 이야기는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흥미로운 요소로 작용한다. 이러한 생태학적, 인문학적 특성을 고려해 수종을 선정하고 식재 디자인을 한다. 식재 디자인은 다양한 색감을 이용한 화려하고 돋보이는 식재 패턴보다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의 색감을 이용해 자연이 주는 서정적 느낌을 전달하고자 한다.
보태니컬
커뮤니티
사람들이 자연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쁜 일상을 잠시 뒤로 하고 자연이 전해주는 위안과 환기의 시간을 갖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보태니컬 커뮤니티(botanical community)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식물을 매개체로 자연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인사이드 아웃 가든(Inside Out Garden)은 친근한 영화 캐릭터와 정원이 결합된 형태로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자연을 이해하고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아홉 가지 색깔이 전하는 식물 이야기를 통해 불안한 마음을 잠시 잊고 마음 속 평온함을 느끼길 바랐다.
대상지는 한강의 서사적 풍경을 차경할 수 있는 입지적 특성이 있다. 한강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도록 눈높이보다 낮은 수종을 식재해 열린 시야를 확보했다. 또한 퇴적층이 형성된 토양으로 원활한 배수가 힘든 구조였다. 토양 치환 및 마운딩을 통해 배수를 원활히 하고 땅의 지력을 높여 생육 환경을 개선했다. 휠체어와 유모차가 진입할 수 있게 보행 동선 폭을 1.5m 이상 확보해 누구든지 편하게 접근하게 했다. 보행 편의성, 내구성을 고려하여 워싱 콘크리트로 바닥을 포장했다. 캐릭터가 위치한 곳에는 높이가 낮은 암석을 함께 배치하여 잠시 걸터앉아 쉴 수 있게 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등장하는 감정들의 아홉 가지 색깔을 고려해 아홉 가지 색상 구역을 형성했다. 진입부는 웰컴 정원으로 기쁨을 상징하는 옐로우 존으로 설정했다. 구역마다 색깔을 고려해 식재를 연출했다. 열매가 붉은 계열인 산사나무와 팥배나무는 레드 존, 보라색 열매가 있는 뽕나무를 퍼플 존, 단풍색을 고려하여 계수나무를 오렌지 존에 식재했다. 관목과 초화류는 구역별 색상을 고려해 식재했다.
자연이 전해주는
환기와 쉼의 여백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내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멎는 곳에서 죽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꿈이오.” 무용(無用)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비생산적인 무용한 것들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다. 그래서 땅과 물, 빛과 바람, 자연의 생명력을 만나는 곳에서 잃어버렸던 무용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우리의 삶이 자연으로부터 다시 회복되길 바라며 설계에 임한다.
도시에서 잠시 벗어나 나지막한 언덕이 있는 헤아림(林) 정원에 들어오면 새소리와 꽃내음 등 자연이 전해주는 생명력과 무용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는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지내온 능수버들나무와 산들바람이 부는 언덕이 있다. 능수버들나무 테이블에 앉아 자연이 주는 느긋한 여유를 즐기기도 하고, 나무와 꽃, 돌담이 있는 언덕에 오르면 정원의 풍경과 한강이 전해주는 쉼의 여백을 느낄 수 있다.
정원의 중점이 되는 버드나무 경관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색감이 화려한 식재보다는 암석을 활용한 연출로 버드나무를 강조했다. 능수버들 나무 아래에는 커뮤니티 테이블을 설치해 담소와 간단한 식음 공간으로 활용하고 테이블 하부의 일부를 개방해 휠체어 이용자도 불편함 없이 이용하게 했다. 브랜드 슬로건과 BI에서 모티브를 얻은 돌담을 조성해 해당 브랜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돌담의 높이는 눈높이보다 낮게 해 시각적 개방성을 강조했다. 정원에는 인위적 시설을 배제하고, 돌, 나무, 꽃 등 자연 소재를 활용해 아이들이 건강하게 놀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했다.
아카이빙
오피스의
미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매번 반복적인 문구를 쓰게 된다. 주변 경관에 순응, 지역 고유한 색상과 질감, 온전히 이어가는 디자인, 진귀하고 화려함이 강한 수종보다는 인근 지역 환경에 적응한 수종 중심으로 식재, 자연 소재 등등.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게 16년 동안의 실무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와 이치라는 생각이 든다.
옛 우리 선조들이 그렸던 ‘원(園)’의 모습은 수려한 산과 맑은 물이 흐르고 양지바른 곳에 터를 잡아 경관을 감상하는, 그야말로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풍경이다. 정원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주변 경관의 일부가 되는 정원을 그려낸 것이다. 우리 정서에 맞는 정원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원고를 쓰기 위해 예전 자료들을 살펴보며 잠시 잊고 있었던 랜드스케이프가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울림이 있었던 시간을 보냈다. 스튜디오 명칭을 리스케이프 대신 서도라고 새로 바꿨다. 이름에 담긴 뜻처럼 지혜와 이치를 탐구하고 장소에 새로운 연속성을 부여하는 랜드스케이프를 그려나가고 싶다.
서도(諝道, 구 리스케이프)는 자연과 사람이 함께 머무는 곳을 작업하는 디자인 스튜디오다. 2020년에 문을 열어 조경설계, 정원 디자인 빌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서도는 한자로 ‘지혜’와 ‘이치’란 뜻을 담고 있으며, 장소에 축적된 랜드스케이프의 본질적인 탐구와 해석을 통해 새로운 연속성을 부여하는 디자인을 추구한다. LH 공공주택 작가정원, 팜 보리(Farm Voree), 신사동 사옥 건축 외부 공간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