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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맥시멈과 미니멈
설계는 생각을 도면 위에 그리는 행위다. 머릿속 이미지를 시각화해 명확한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무한 반복의 피드백이 필요하다. 도면 위에 그려진 이미지는 다시 생각을 구동하게 만들고, 조정된 형태로 도면 위에 반영된다. 이러한 작업에서 설계자는 희열을 맛보기도 하고 깊은 슬럼프에 빠지기도 한다. 그려진 도면은, 나름 완성된 도면은, 실제로 구현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최종의 결과물이며 설계자의 생각이 오롯이 드러난 창작물이다.
생각은 어떻게 정리되는가
설계의 단초는 다양하다. 건조한 문구로 채워진 과업지시서일 수도 있고, 열정적인 건축주와의 토론 결과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결론은 ‘잘 만들어 주세요.’ 그 순간 공은 이제 설계자에게 넘어온다. 답사하고 조사한다. 초기의 생각들은 간단한 스케치로 남겨진다. 그리기를 반복하면서 설계자의 의지가 투사된다. 욕심이 의지로 착각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디에서 보았음 직한 멋진 이미지를 구현해 보고 싶은 생각에 도면은 점점 과감해진다. 과도해진다. 생각이 정리될 즈음에는 엇나간 선들도 함께 소거되어야 하나, 끝까지 살아남아서 설계자를 괴롭힌다.
땅에 집중하자
마음을 비우는 것은 다시 처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쓸모없는 미사여구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건축주의 집착도 다시 살펴봐야 한다. 왜 만들고자 할까, 이 땅에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없어도 되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땅에 집중하자
마음을 비우는 것은 다시 처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쓸모없는 미사여구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건축주의 집착도 다시 살펴봐야 한다. 왜 만들고자 할까, 이 땅에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없어도 되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2007년 서울아산병원. 조경 공간이 구현될장소의 구조는 의외로 단순했다. 한쪽에는 거대한 병원 건축물이, 반대편에는 방대한 주차장이 있다. 바닥은 지하 주차장 상부, 길이 300m와 폭 60m. 웬만한 공원 규모에 버금간다. 아픈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 직원까지 하루 유동 인구가 4만 명쯤 된다고 했다.
밀도 높은 숲이 필요했다. 나무는 최대한 조밀하게, 높은 키로 건물을 가릴 수 있기를. 환자들이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는 통로는 넘치더라도 많게, 나무 아래 앉을 수 있는 공간도 많게, 오래 앉아도 불편하지 않은 벤치를 충분하게, 풀과 꽃과 나비를 많이 만날 수 있게, 물가를 걷는 즐거움을, 물소리는 듣는 재미를, 어디 한적한 곳에 숨어서 미어지는 가슴을 달랠 수 있기를. 정영선의 생각은 분명했다.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모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콘크리트의 건조함밖에 없는 장소는, 완전히 다른 것들로 채워질 필요가 있었다. 이곳은 병원이었다. 설계자의 과욕이 표현될 공간은 없었다. 형태는 기능에 충실해야 했고, 디자인적 제스처는 배제되었다. 준공 후 15년 차, 숲은 높게 자랐고 여전히 환자들로 넘쳐난다. ‘맥시멈(maximum)’은 땅에 집중한 결과였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2008년 뉴욕 주 원불교 원다르마센터. 공항을 빠져나온 우리 일행은 파크웨이를 따라 두 시간 쯤을 달려 한적한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저 멀리 애팔래치아 산맥이 보이는 낮은 구릉의 대상지. 땅은 아름다웠다. 남겨진 숲, 완만한 구릉을 따라 흐르는 넓은 초지, 그림 같이 자라난 야생 사과나무, 언제 비가 왔는지 아직 습지로 남아 있는 낮은 계곡. 바람이 불고 검은 구름이 몰려오니 금방 후드득 비가 내린다. 그러다가 언제 개었는지, 구름 사이로 햇빛이 쏟아진다. 여기는 원래이런 곳이라고 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의 변화무쌍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는 땅.
건축가는 이곳에 명상을 위한 집 몇 채를 설계하고 있었다. 한국의 시골집을 닮은 구조라고했다. 규모는 소박했고, 배치는 자연스러웠다. 땅을 해치지 않는 디자인. 미주 원불교에서 추진하는 명상 공간을 위한 장소였다.
이곳에 ‘조경’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여기에 무엇을 더한다는 말인가. 땅을 깎고 담을 올리며, 나무를 심는 행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형도를 분석하고, 스터디 모형을 만들고, 답사한 자료들을 모았다. 이쯤 되면 설계자의 노트는 이런저런 스케치로 채워지고 있어야 하나, 여전히 빈 종이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결론은 의외로 명쾌하고 단순했다. 조경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걷기 명상을 위한 길을 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길은 굽이굽이 흐른다, 충분히 좁게 만든다, 한눈에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지형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미니멈(minimum)’ 디자인의 전략들이 정리되고 있었다.
설계는 도면집 두께로 판단되지 않는다. 생각은 땅을 이해하는 태도에서 출발하는 것이 옳다. 필요한 것들은 충분히 담겨야 하고, 필요 없는 것들은 과감히 배제되는 것이 좋다. 그것이 맥시멈이든 미니멈이든 정영선의 작업은 늘 땅에 집중한다. 그가 그의 작업을 ‘땅에 쓰는 시’라고 부르는 이유다
박승진은 경관, 도시, 정원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loci 대표소장이다.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를 거쳐 한국 1세대 조경설계사무소 서안에서 실무를 했다. 2007년 지금의 사무실을 열었다. 조경건축가로서 푸른 별 지구,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 자연과 도시와 정원, 평범한 일상의 사람들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 서안에 재직하면서 정영선과 함께 워커힐 마스터플랜, 삼성전자 30주년 기념공원, 서울아산병원 등 다양한 규모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후 loci를 운영하면서 뉴욕 원다르마센터,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과 원료식물원, 제주 오설록, 강릉 시마크호텔, 남해 사우스케이프 등 여러 작업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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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협업의 유산을 읽다
정영선의 ‘서양조경사’ 강의는 당시 대학교 3학년 조경학도들에게 서양 정원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들어 주었다. 4학년이 되자 한국 정원을 하나라도 더 가슴에 심어주고 싶었는지 지금도 들어가기 힘든 성락원 복원 현장을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1987년 가을, 전국 학생졸업작품전에 대학별로 출품해 경복궁역에서 전시와 심사가 열렸는데, 안타깝게도 자리가 모자라 한 작품이 걸릴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우리 팀만 남겨져 발을 동동 구르다 마침 어둡고 구석진 자리를 발견하고 근처 목공소의 도움을 받아 뒤늦게 작품을 걸게 되었다.
우연히 이 과정을 지켜보던 심사위원 정영선은 보통의 작품과는 달리 재개발 계획에 관한 설계와 모형을 들고 나온 우리 팀에게 가장 잘했다며 격려해 주었다. 이후 조경설계 서안(이하 서안)의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고, 졸업한 뒤에는 그의 추천으로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며 자연스레 환경대학원에 진학하였고 방학 중에는 서안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지금 생각해 보면 정영선은 나에게 많은 기회를 열어주었다. 그와 함께한 여러 프로젝트 중 의미 있는 두 개의 마스터플랜과 비영리 재단과 협업한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선유도공원 설계공모
1999년 10월 말 선유정수장의 공원화 설계공모가 열렸고, 나는 설계공모 PM을 맡게 되었다. 대상지를 처음 만났을 때, 유학 시절 논문 주제였던 ‘장소의 기억-베르시 공원Le Parc de Bercy’이 떠올랐다. 파리 시가 오랜 기간 조사 및 연구 후 공원의 성격을 결정해 설계공모를 열었던 베르시 공원과는 달리, 선유도공원 설계공모에 주어진 시간과 자료는 몹시 빈약했다. 장소성 보전을 위해 기존 정수장 시설을 존치하거나 재활용하라는 지침이 따로 없었듯이 건축 도면은 제공되지 않았다. 선유도는 겸재 정선의 그림 속 신선이 노니는 섬처럼 아름다운 선유봉이었다는 것, 과거 섬 안에 큰 절과 유명한 약수가 있었다는 것을 지역 역사에서 찾으면서 물과 인연이 깊은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료를 찾으면서 정수장 지하실에서 프랑스 엔지니어링 회사가 설계한 묵은 도면집을 찾아냈고, 직원 허락 하에 개별 건축 도면을 복사할 수 있었다. 복사해 온 건축 도면을 누더기처럼 이어 붙이고 다시 도면화해 현황 모형을 만들어 보니 현장에서 보지 못한 다른 차원의 공간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정수장의 핵심 시설인 하부 공간에 주목했고 정수 공간의 흔적을 일부 남김으로써 장소의 기억을 회생시키면서 물과 수생 식물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부여하였다.
정영선은 젊은이들과의 협업에 포용적이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는 데 열려 있었다. 당선 후 부분적으로 바뀌긴 했지만 마스터플랜이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는 그의 강한 의지로 지켜지고 실현되었다. 당시 산업 시설의 재활용에 대한 시선이 지금 같지 않아 어려움도 있었다. 취수 펌프장 건물 구조는 마치 수변에 다리를 걸친 정자를 떠올리게 해 정자에서 조망을 즐겼던 선조들의 풍류를 재현하는 의미에서 선유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신선이 노닐었다는 선유도의 낭만적 장소성을 되살리고 한강 너머로 마주하고 있는 망원정과 함께 장소의 기억을 이어주는 상징적 공간이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당선 후 서울시 심의에서 어느 시의원이 선유정을 지적하며 진짜 한국 전통 정자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원안을 관철하지 못했다며 정영선은 심의를 나오자마자 너무 속상한 나머지 나에게 미안하다고 전화한 적도 있다.
그는 건축가와의 협업을 자주 강조했다. 실제로 공모전 팀 구성에 건축가가 포함된 팀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유도공원은 당선 후 건축과의 협업이 중요한 프로젝트였던 만큼 비슷한 가치와 생각을 공유하는 건축가와의 작업이 무척 중요했던 것 같다. 이때의 교훈을 깊이 새겨 프로젝트의 규모와 상관없이 건축가와의 협업이 필요하다면 초반부터 같이 작업하고 있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전은정은 조경포레 소장이다.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 졸업 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을 거쳐 파리 라빌레뜨 국립건축대학/국립고등사회과학대학원 협동박사과정 ‘정원, 경관, 지역’의 D.E.A.를 취득했다.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조경설계 서안을 거쳐 2004년 사무실을 열었다. 과거와 현대의 공존,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재단법인 아름지기의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사단법인 도코모 모코리아 이사로 활동했다. 김해 수릉원, 동경주재 주일한국대사관, 강릉 라카이 샌드파인 리조트 조경설계 등을 수행했다. 용산공원 국제공모에서 서안과 협업해 3등에 당선된 바 있다. 틈틈이 설계와 시공을 병행,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 등 다수의 개인 정원을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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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땅을 읽는 법을 배우다
정영선의 작품과 철학은 오늘날 한국 조경의 방향성을 제시하며 많은 후배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첫 직장인 조경설계 서안(이하 서안)에서 6년 가까이 일했지만, 직접 만나며 일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스케치와 도면, 보고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잠시 만나는 기회가 있으면 그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당시 정영선의 작품에서 받은 영감과 배움을 독자와 나누고자 한다.
담담한 설계를 그리며 배우다
정영선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 있다. 어디까지가 그가 만든 경관이고 어디서부터가 원래 있던 자연인지, 그 경계가 모호한 아름다운 풍경이다. 당시 그는 한국 조경의 특성을 ‘담담함’이라고 표현했다. 지금은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검이불루 화이불치’로 설명한다. 이러한 철학은 나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항상 나의 설계가 ‘담담함’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씩 생각해보며 공간을 설계하고 있다.
2007년, 광교호수공원 설계공모 당시 하루종일 대상지를 돌아다니며 숲과 수변의 경관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현장에서 들은 내용을 그때 그때 받아 적었다가 나중에 노트로 다시 한번 정리했다. “버드나무 가지가 밝으니 이른 봄에 아름답다”, “어두운 골짜기에 일찍 싹을 틔우는 귀룽나무를 심으면 좋겠다”, “흥덕지구 아파트를 가리기 위해 키 큰 상수리나무를 심자”, “호수 물가로 물풀을 심고, 축축한 들판에는 돌배나무가 좋겠다” 등 정영선은 현장에서 경관 계획의 큰 골격을 잡아갔다. 그는 내게 각 장소의 경관을 꼼꼼히 기록하며 큰 그림을 그려나가는 과정을 가르쳐 주었다. 정영선의 세심한 관찰과 분석은 내가 경관을 크게 보고 지역에 맞게 계획을 세우는 방법을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이호영은 조경 분야에서 20년 이상의 설계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는 HLD 대표로 디자인을 총괄하고 있다. HLD 설립 전에는 조경설계 서안, AECOM, office ma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2018년 제1회 젊은 조경가 상을 수상했고, 한국조경협회 부회장, 한국조경가협회 위원장, 서울시 공공조경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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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선유도공원이 건네는 위로
선유도공원에는 배려와 풍부함 그리고 정제된 느낌의 분위기가 흐른다. 기존 시설과 새로운 건축물 그리고 이를 둘러싼 조경 사이에 주고 받는 일종의 상호 교류가 있다. 조경가 정영선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건축가 페터 춤토어Peter Zumthor의 『분위기』(2013)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건축을 설명하는 데 있어 아홉 가지 특징(건축의 몸, 물질의 양립성, 공간의 소리, 공간의 온도, 주변의 사물, 안정과 유혹 사이, 내부와 외부의 긴장, 친밀함의 수준, 사물을 비추는 빛)을 제시한다. 이를 바탕으로 한 춤토어의 설계는 건축과 그 주변 환경의 관계를 면밀히 들여다보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이는 공백의 시간을 잇고 서로 다른 영역의 언어들을 포용하는 정영선의 철학 ‘조경가는 연결사’와 맥락을 같이한다.
땅을 읽는 정영선의 태도를 보면, 대상지에서부터 영감을 찾으며 면밀히 분석하고 관찰해 설계한다. 새로운 형태의 공간 골격을 만들어 내기보다 땅의 분위기를 읽어내어 그 땅에 필요한 것들을 주변과 관계 지으며 형태를 만든다.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독특한 분위기를 선유도공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공원 개장 이후 여러 번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시공된 공원 배치도를 모사(模寫)했다. 선을 따라 그리는 행위 속에서 공간의 골격을 상상해가며 설계 의도와 분위기를 읽어 나갔다.
이 과정을 통해 선유도공원의 해석을 위한 여섯 가지 틀(공간의 골격, 전이 공간, 절제된 요소들, 빛과 소리, 호기심과 관찰, 위로)을 세웠다. 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뤄지는데, 순차적 인과 관계로 설명하면서 선유도공원의 정제된 분위기를 전달하고자 한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조용준은 지난 20년간 작은 스케일의 공공 정원부터 큰 스케일의 도시계획까지 다양한 국내외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창의적인 생각으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며, 공공을 위한 의미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새로운 광화문광장, 국립새만금 수목원, 세운상가 녹지축 조성계획, KT 디지코 도시숲, 더 글라스 호텔정원, 나주 빛가람호수공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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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과 디올 성수, 미래 세대의 수용
경기도 오산에 있는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2019)과 서울시 성동구의 디올 성수(2022)는 조경가 정영선의 손길로 탄생한 공간이다.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에는 동백과 장미 등 아모레퍼시픽 화장품의 원료가 되는 식물들이 심겨 있고 삼지구엽초, 깽깽이풀 등이 포근하게 땅을 덮고 있다. 디올 성수에서도 데자뷔가 일어난다. 세계적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각주 1)가 사랑했던 장미와 라벤더로 분명히 프랑스 정원을 표현했는데, 모란과 작약, 잔잔한 한국 풀들이 어우러져 한국 정원 느낌이 난다. 단순히 둘을 합친 게 아니라 화학적 성분마저 풀어헤쳐 만들어낸 듯한 제3의 결과물이다. 짜깁기가 아닌 재편집이라는 측면에서 이것은 창조이자 혁신이다.
아모레퍼시픽과 크리스챤 디올, 두 브랜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창업가의 철학과 헤리티지가 녹아든 경영이다. 아모레퍼시픽은 서성환(1924~2003) 선대 회장이 1960년 첫 프랑스 방문 길에 들렀던 남프랑스 그라스의 라벤더 밭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세운 회사다. 프랑스 노르망디 그랑빌에서 어머니가 가꾸는 장미 정원에서 자란 크리스티앙 디오르(1905~1957)는 1951년 그라스의 성 ‘샤토 드 라 콜 누아르(Château de la Colle Noire)’를 사들여 세상을 뜰 때까지 향수 원료 식물을 재배했다. 패션 디자이너이자 조향사였던 그에게 식물은 영감의 원천이자 브랜드의
철학이었다.
둘째, 전통을 혁신해 미래 세대와 만난다는 점이다. 고 서성환 회장은 세계 각국에 있는 차 문화가 왜 우리에겐 없을까 안타까워하며 제주에 다원(茶園)을 일궜다. 요즘 제주 오설록을 찾는 미래 세대는 정영선이 곶자왈을 구현한 정원을 보며 녹차라테를 마시고 견고하게 스토리텔링된 녹차 성분의 화장품을 산다. 루이비통 모에헤네시(LVMH)에 편입된 크리스챤 디올의 행보도 전략적이다. 글로벌 도시들을 돌면서 헤리티지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전시회를 열고, 미래 세대의 왕래가 잦은 핫플 지역에 매장을 낸다. 디올 성수도 그 전략 중 하나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1. 우리에게 익숙한 브랜드인 ‘크리스챤 디올’은 미국 영어 표기법에 따라 적었고, 설립자인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프랑스어 표기법에 따라 적었다.
김선미는 2023년부터 동아일보에서 ‘김선미의 시크릿가든’을 연재하고 있다. 동아일보에서 논설위원, 뉴센테니얼본부 크리에이티브랩 팀장, 편집국 문화부와 산업부 차장 등을 거쳐 현재는 콘텐츠기획본부 부장이다. 최근에는 국내에서 가볼 만한 24개의 정원을 소개한 『정원의 위로』(민음사, 2024)를 펴냈다. 산림교육전문가(숲 해설가)이자 현재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 박사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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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한국 조경 가치의 시각화, 아모레퍼시픽 본사
조경, 그게 뭐 하는 건데
조경학과에 다닌다고 하면 자주 듣던 말은 “나무 심는 일 아니야?” 혹은 “이 나무 이름이 뭐야?” 였다. 여러 공종이 늘 협업하는 건설사에서 조경직으로 근무하니 이제 조경이 나무 심는 일은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안다. 하지만 여전히 건축 외 남은 공간을 담당하는 업무로 여겨지곤 한다. 그래서 늘 하는 고민은 1) 다른 공종과 협업하면서도 조경이 돋보이는 디자인과 구현 방법, 2) 조경이 건축 외관을 더욱 풍부해 보이게 만드는 배경이 되면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고 건물과 상생하게 하는 방법이다. 고민에 대한 답을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이하 아모레퍼시픽)에서 찾았다.
대청마루에서 보는 풍경
아모레퍼시픽 지상층 조경은 밖에선 건축을 보고 안에선 조경을 보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만든다. 독특한 루버 디자인의 백색 건물을 배경으로 두고 있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조경에 감탄하며 자연스럽게 이끌려 걸어가면 바깥과 건물을 연결하며 자연스러운 전이 공간 역할을 하는 지상층 숲을 만나게 된다. 숲을 지나 필로티 하부에 서면 방금까지 봤던 도시 풍경이 잊히고 전혀 다른 공간에 온 듯하다.
이 풍경은 선조들이 휴식을 즐겼던 대청마루와 닮았다. 기둥들은 대들보가 되고 넓은 필로티 하부는 대청마루가 된다. 건물 하부에서 차가 달리는 도로가 바로 보였다면 이런 경험을 전혀 할 수 없고 그저 현대적 회랑으로만 느껴졌을 것이다.
이런 경험을 건물 내부에서도 할 수 있다. 건물의 모든 창에서 외부 조경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전통 조경의 개념인 차경을 떠올리게 한다. 창의 위치와 크기, 건물 내부에서 보이는 풍경과의 거리를 고려한 식재 디자인이 건물 안으로 조경을 끌어들인다.
이러한 조경은 이용자와 건축물의 관계를 맺어주며 이 공간을 지속해서 이용하도록 유도한다. 외부에서 본 숲이 건물과 외부를 분리시키며 자연 속으로 들어서는 듯한 느낌을 부여한다면, 내부의 창을 통해 보이는 조경은 나만을 위한 정원이 되며 이용자를 머무르게 하고 건축과 더 소통하게 하는 연결사 역할을 한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백규리는 경희대학교 환경조경디자인학과 졸업 후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설계를 배웠다. 현재는 현대엔지니어링에서 설계와 시공을 담당하는 디자인지니어(design+engineer)다. 조경인에게 감동과 경험을 주는 공간을 조성하는 것을 추구한다. 조경이 발길 닿는 모든 공간을 만진다는 점을 돋보이게 하는 데 관심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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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식물과 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제3자가 바라본 정영선의 이야기를 다룬 세션 1, 2가 끝나자 무대 위에 작은 테이블과 의자 세 개가 놓였다. 이제 주인공이 직접 마이크를 쥘 시간. 세션 3 ‘정영선과의 대화’는 정영선과 두 명의 손님을 초대했다. 중앙 자리에는 정영선, 왼편에는 조경진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설계학과)의 자리가 마련됐다. 대담 진행을 맡은 이지회 학예연구사(국립현대미술관)는 조경진이 이번 전시와 어떻게 연을 맺게 되었는지 소개했다. “조경진 교수에게 이번 전시장 입구를 장식한 연보를 의뢰했다. 정영선의 삶과 작업의 역사, 한국 조경사, 그리고 세계 환경 관련 이슈의 연대기 작성을 이끌어주며 이번 전시회의 시공간적 맥락을 짚어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오른편 자리에는 배형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가 앉았다. 배형민은 정영선의 작품 중 하나인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개관을 기념하며 출간한 『아모레퍼시픽의 건축』의 저자다. 그는 이지회와 함께 황금사자상을 받은 제14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준비한 바 있는데, 이지회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베니스비엔날레의 기억을 자주 떠올렸다. 오늘 함께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며 대담의 시작을 알렸다. 세 사람 사이의 대화는 느릿하고 은은하게 오갔다. 조경 철학을 파헤치거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대신, 오랜 세월 묵혀 둔 작업 뒤편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내는 식이었다. 대담 뒤에는 청중에게 질문을 받아 답을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중 몇 가지를 뽑아 간단히 소개한다.
사우스케이프, 바위를 쪼아 만든 조경가의 조각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 포스터 한가운데를 차지한 것은 식물도, 탁 트인 경관도 아닌 거대한 바위다. 거칠면서도 섬세한 단면이 돋보이는 이 바위는 남해 사우스케이프의 암각 동산이다. 이 바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청했다.
“사우스케이프 설계 의뢰를 받아 처음 클라이언트 내외를 만나러 가던 날, 마당에 있는 억새풀과 들풀을 뜯어 가지고 들어갔어요. 대상지가 본래의 경관이 아름다운 남해인 만큼 이런 우리의 풀들이 보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직접 뽑은 억새풀과 들풀을 보여주며 말하니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대상지에 커다란 바위산이 있었는데, 숙박 시설과 주요 홀, 휴식 공간이 이 바위산을 빙 두르고 있었습니다. 건축 공사를 진행하며 이 바위를 없애보려고 했지만, 깨다 지쳤는지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이 바위가 너무 좋더라고요. 이 바위를 없애지 않고 다듬어, 주변을 두른 건축물의 다른 고유 기능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물과 꽃을 더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절 믿어준 건지 알아서 해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날부터 한 제자와 함께 호미와 망치를 들고 몇 날 며칠에 걸쳐 바위를 손으로 다듬었습니다. 이 바위는 조경가가 만든 조각인 셈입니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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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How Landscape Architec ts Record Their Works?
기록하지 않은 것은 휘발되기 마련이다. 대상지 위에 처음 그렸던 선, 땅을 마주했을 때 떠올린 날 것의 첫인상을 온전히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마스터플랜이 완성되기까지 수십 번 고쳐 그린 수많은 선은 그저 최종안이 되지 못해 버려지는 부산물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기록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밑바탕이 된다. 어떤 프로젝트에서는 대안에 불과했던 아이디어가 다른 대상지에서 최적의 해결법으로 작동하고, 버려진 스케치와 도면에서 새로운 콘셉트를 건져 올리기도 한다. 모니터를 따라 붙인 포스트잇 메모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돕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조경가는 자신의 작업을 어떻게 아카이빙하고 있을까. 작업이 끝난 뒤 정리하는 걸 선호할까, 틈틈이 정리하는 걸 선호할까. 종이 문서, 도면, 영상, 사진, 낙서, 메모 등 그 종류와 방식은 어떠할까. 폴더와 파일을 어떤 방식으로 정리할까. 프로젝트별로 묶되 별도로 선별해 정리하는 자료는 없을까. 깨달은 점을 잊지 않기 위해 꾸준히 해오고 있는 기록법이 있다면 무엇일까. 홈페이지와 SNS는 기록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개개인의 아카이브 방식이 어쩌면 자질구레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작은 기록들은 조경가의 삶과 기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개인의 기록을 넘어 시대의 아카이브가 된다.
특집은 ‘기록 작업’과 ‘기록 생활’로 구성된다. 기록 작업에서는 작업 일지, 그 과정에서 떠오른 사유, 낙서, 도면, 전시, 아카이브 홈페이지 등 다양한 방식으로 꾸준하게 기록해온 조경가의 이야기를 듣는다. 기록 생활은 여섯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보통의 조경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작업을 정리해 남기고 있는지 들여다본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기록 작업
기록하다_이수학
그리기, 기록하기, 엮기_박승진
장면의 기록, 기록의 공유_안동혁
지어지지 않은 계획들, 설계공모 기록의 목적_정평진
기록 생활
중앙 집중 아카이빙_김기천
과정의 기록, 재가공의 기록_조용준
백업으로부터의 자 유_이홍인
생존 기록_김지환
조경가의 드로잉, 설계적 상상과 탐험의 기록_최재혁
숨 쉬듯 관찰하고, 꾸준히 기록하기_신영재
기록 생활 필자에게 던진 여섯 개의 질문
1 기록 루틴을 알려주세요.
2 아카이브하고 있는 기록물의 종류를 알려주세요.
3 폴더와 파일을 어떻게 정리하나요.
4 자 신만의 기록법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5 회사 공용 폴더와 개인 폴더가 따로 구분되어 있나요? 구분하 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6 SNS나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나요? 운영한다면 그 역할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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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기록하다
기록 작업
시작하다
처음부터 그것이 그리 되리라 생각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1999년 ‘한국정원 톺아보기’와 2000년 ‘조경공방나무’ 두 개의 누리집을 꾸리면서 두 해 정도 지났을 때 이것을 묶어 책을 내면어떠한가 생각했다. 책 말미에 밝혔지만,(각주 1)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과 뜻을 굳게 가다듬어 정하는’ 다짐의 의미로 만든 것이었다. 세상에 내어놓는 작업이 쌓이고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 때 묶어 책을 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헛것을 엮어 미래를 담보해 보자는 심산으로 만든 책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허공을 향한 날 선 비판과 자의식만 가득한 책이 됐지만, 그때 책을 묶으면서 앞으로 오 년에 한 권씩, 조경, 그중에서도 설계에 관한 책을 만들어보자 했다. 지금 보면 가당찮은 얘기였지만 그 취한 말醉言(취언)이 개인적인 기록의 시작이었다.
기록이란 무엇인가
기록의 한자를 살펴보면 마음 다듬어 쓰다 혹은 마음에 새기다의 ‘기(記)’와 중요한 일을 퍼 올려금속에 적다의 ‘록(錄)’을 합친 낱말이다.(각주 2) 그래서 다시 풀어보면 ‘수만 가닥의 말 중에서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할 말을 지워지지 않는 금속에 새기듯 남겨 둔다’는 뜻이 된다. 뜻풀이를 들여다보면 기록을 위해 ‘내용’과 ‘방법’에 앞선 두 개의 전제 또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무엇을 담아 둘 것인가 하는 내용에 대한 ‘가치 판단’의 문제와 어딘가에 그것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새기는 ‘실천 행위’를 전제로 한다.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 하는 자신의 지향점과 판단을 위한 기준이 필요하고, ‘새기다’라는 실천 행위는 꾸준한 마음과 부지런한 몸을 바탕으로 한다. 헛것을 엮어 미래를 담보했던 그 책은 자신을 향해 하나의 기준을 설정하는 행위였다. 그 기준은 앞으로 던져질 수많은 질문의 첫 번째 질문이고, 질문과 질문 사이의 간극이 큰 성긴 그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근 질문은 촘촘해지고 또한 정치(精緻)해지리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미로 같은 누리집에 남겨진 기록 혹은 질문은 이십여 년 시간의 중첩이 만든 착시다. 모두 육백여든한 쪽의 기록을 환산해 보면 달에 두 쪽 정도 글이나 그림을 남긴 것이 꾸준함은 인정하겠지만 부지런하다 할 수 없다. 꾸준함도 2021년부터 두 해 넘게 온전히 작파(作破)했다가 작년에 조금 보수 공사를 했다.
왜 기록하는가
작년 『ULC D: 도시경관 출판하기』가 던진 네 개의 질문에 답하면서 ‘누리집의 시작은 조경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었다’고 얘기했다.(각주 3) 1999년, 척박한 조경 문화의 환경 속에서 누군가가 무언가를 해주리라 기다리지 말고 비판의 칼을 너 자신에게 돌려서 너부터 시작해라. 그 시작이 한국정원 톺아보기에 있는 ‘창덕궁 후원 산책하기’(각주 4)다. “창덕궁 후원의 경관에 관한 소고_정조의 상림십경(上林十景)을 중심으로”(각주 5)라는 짧은 글(小考)을 쓰고 이전에 답사하며 찍어둔 사진으로 산책하듯이 웹을 어슬렁거리자고 만들었다. 그때 후원은 부용지와 연경당이 있는 애련지 주변만 개방하고 나머지 구간은 허가받아야 들어 갈 수 있었다. 글을 쓰면서 기록의 대가들이 살던 조선시대와 만났다. ‘궁궐지宮闕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그리고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만나고 ‘동궐도東闕圖’라 불리는 그림을 만났다. 당시와 달리 많이 변형되었지만, 땅에 각인된 후원의 흔적 사이를 걸으며 비로소 시간이 흐르고 그곳은 오백 년 동안 짓고 허물어지기를 반복하며 바뀌는 일상과 사건의 교직交織을 마주했다. 생각해 보면 그 모두가 그림과 글, 땅 위의 기록으로 인해 가능했다. 짧은 글에서 얘기했듯이 기록이 하나의 텍스트로 읽히고 각각의 텍스트는 상호 교차하면서 해석적 순환을 이룰 때 우리는 좀 더 풍부한 시선으로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 이때 과거는 지나간 망각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의식의 형태로 현존하는 감각적 인식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무언가를 기록하는 하나의 이유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하나의 시작에 불과하다. 태도는 설계설명서도 아니고 이론도 아니고 비평도 아니지만 조경에 대해 특히 그 중에서도 설계에 대한 최저생계비가 되었으면 한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이수학, 『태도_조경 | 행위 | 반성 | 시작』, 녹색나무, 2002, p.177.
2. “記(기)는 言(언)+己(기)가 합쳐진 형성 한자로 ‘己’는 실가닥을 가지런히 하는 실패의 형상으로 말을 다듬어 쓰다, 마음 새기다의 뜻을 나타나고, 錄(록)은 金(금)+록의 형성 한자로 ‘록’은 물을 퍼 올리다 그래서 중요한 일을 퍼 올려서 금속에 적다의 뜻을 나타낸다.” 민중서림 편집국 편, 『한한대자전』, 민중서림, 1998, pp.1900, 2134.
3. 이수학, “네 개의 질문에 답하다”, 『ULC D: 도시경관 출판하기』, 2024, pp.90~95.
4. www.ateliernamoo.xyz/jongwon_koreangarden/huwon/index.html
5. 이수학, “창덕궁 후원의 경관에 관한 소고_정조의 상림십경(上林十景)을 중심으로”, 『한국조경학회지』 28(1), 2000, pp.92~108.
이수학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이원조경에서 4년동안 일했다. 프랑스 라빌레트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 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받았고, 2003년부터 아뜰리에나무를 꾸리고 있다. www.ateliernamoo.xy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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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그리기, 기록하기, 엮기
기록 작업
골든 레코드
“안녕하세요?” 한국인 신순희 씨의 목소리로 녹음된 이 짧은 인사말이 담긴 골든 레코드는 지금도 지구로부터 200억km 이상 떨어진 우주 공간을 비행하고 있다. 1977년 8월 발사된 보이저호는 예정된 임무인 태양계 탐사를 마치고도 47년째 현역으로 작동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요한 또 하나의 임무가 있었다. 비행 중 조우할지 모르는 외계 생명체에 지구의 문명을 알리는 것. 이 12인치 크기의 레코드판 이름은 지구의 소리(The Sound of Earth). 지구의 자연과 문명, 과학 기술, 문학 작품, 음악 등 여러 분야의 이미지와 소리 정보가 담겼고, 한국어를 포함한 55개국의 언어로 녹음된 인사말이 함께 실렸다. 알루미늄 보호 케이스에 재생기가 함께 보관되었는데 10억 년 이상의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을 지닌다고 한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실제로 이 레코드가 외계 생명체에 전달될 가능성보다는, 다가올 인류 멸망에 대비해서 지구의 마지막 기록을 영원히 남기는 것에 더 주목했다고 한다. 잊히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책상 서랍
서랍은 늘 닫혀 있다. 무언가를 넣을 때 잠깐 열릴 뿐 대부분은 닫혀 있다. 서랍 속에 뭐가 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2층 혹은 3층으로 된 서랍을 나름 용도를 구분해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쓰다 보면 잡동사니가 쌓이고 분류도 엉망이 된다. 그래서 서랍은 작은 창고가 되기 쉽다.
창고는 보관이라는 순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선별하고 버리는 작업을 동반하는데, 가끔 이 창고 정리가 위로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서랍 안쪽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오래된 물건은 잊힌 기억들을 소환한다. 고장 나 멈춰진 손목시계, 닳아서 해진 지갑, 수십 년 전의 학생증, 쓰다만 메모장, 희미해진 영수증, 잘려진 비행기 탑승권, 정체불명의 USB.
그리고 지우기
설계 작업의 대부분은 생각을 확장하고 구체화하고 검증하는 것이다. 공간은 실존하고, 구현된 실체로 의미를 갖는다. 설계는 가상의 공간에서 진행된다. 빠르게 그리고 지울 수 있다. 지워지지 않는 펜과 잘 지워지는 연필의 궁합은 중요하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신속히 구분하는 행위는 설계 전략에 해당한다. 그리고 지우는 행위가 반복될수록 버려지는 종이의 무게도 증가한다. 살아남은 종이는 기록물의 지위를 획득한다. 책상 위에 놓이는 위치가 달라진다. 어제까지는 이면지였는데 오늘부터는 기록물이라니.
종이 드로잉의 힘은 강력하다. 생각이 실체적으로 구현된다. 대충, 빠르게, 정확히, 모호하게 그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려진 펜의 운행 궤적을 잘 보고 있으면 그린 사람의 마음이 읽히기도 한다.
종이 드로잉은 일종의 미니어처다. 높이 값을 생략한 모형이다. 고유의 스케일을 가지고 있으며 질감의 상상이 가능하다. 시선을 바꿈으로써 간단히 투시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고 줌인과 줌아웃도 손쉽다. 무엇보다 종이 드로잉은 대체할 수 없는 원본이다.
일 또는 일상
집안에서 이 방 저 방을 다니며 걷는다. 팔을 움직여 허공을 휘젓는다. 급기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초기 설계안은 대부분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결코, 책상머리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일과 일상은 태생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일은 일상의 일부분이다. 설계 작업자들한테는 더욱 그러하다. 일상을 기록하는 것은 일하는 것이다.
일의 순서를 정하고, 메모하고, 검색한다. 어떤 장소를 직접 찾아가 보고, 또 대상지를 답사한다.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자료를 탐색한다. 밥을 먹다가, 잠을 자다가, 걷다가, 운전하다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일상은 총체적인 설계 과정이다.
기록의 환경은 획기적으로 좋아졌다. 손안의 스마트 기기는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메모가 편리해졌고 검색도 빠르다. 손쉽게 이미지를 캡처하고, 저장하고, 불러올 수 있다. 위치와 시간 정보를 동시에 기록할 수 있다. 이미지의 변형과 편집, 공유가 자유롭다. 음성과 영상 같은 동적 정보를 실감 나게 저장할 수 있다. 스마트 기기는 우리 생활 대부분에 필수가 되었고, 설계 작업자들은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늘 기록하고 있고 또 기록되고 있다.
도큐멘테이션
디지털 방식의 기록물은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 디지털적 사고가 필요하다. 체계적인 정리 방식을 요구한다. 창고에 쓸어 담기와 같은 아날로그적 행동은 훗날 기록물을 다시 불어올 때 험난한과정이 수반된다. 드로잉 원본은 보관 자체가 의미 있지만, 정리되지 않은 디지털 자료들은 나열된 숫자에 불과하다.
『도큐멘테이션Documentation』은 저장된 디지털 이미지를 책이라는 실체로 묶어내는 작업이었다.이제 기록물은 3가지 형태로 남게 되었다. 드로잉 원본과 디지털 이미지, 그리고 책.
책을 디자인하는 것은 공간을 설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건은 공간을 점유하는 실체다. 크기, 무게, 부피, 질감을 갖는다. 디자인은 각각의 디멘션을 정의하는 것이다. 유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정의하는 작업은 순전히 작업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
가로 120mm, 세로 170mm, 두께 45mm는 공간 설계의 성과물이다. 효율적인 출판 규격을 벗어날 것, 크기에 비해 두께감이 있을 것, 책등의 제본 형식은 기록물임을 암시할 것, 몇 가지 설계 원칙을 더해 표지는 모호할 것, 직관적이지 않을 것. 책을 위한 평면도와 입면도, 투시도와 스케치, 스터디 모형과 실물 목업 작업이 이어졌다.
이미지들은 일과 일상을 넘나든다.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작업하면서 버려지지 않고 살아남은 이미지들이다. 해상도가 좋지 않아도, 일부가 잘려 나가도 괜찮다. 어떤 순간을 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모든 설계 작업을 마치고, 서문에 이렇게 썼다.
“작업은 늘 조심스럽고 늘 흥미진진하다. 모든 작업은 땅 위에 구축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좌뇌와 우뇌, 양팔과 양손 그리고 두 다리의 끊임없는 구동을 요구한다. 긴장과 이완의 지속적인 반복, 불안과 안도의 이상한 동거, 진척과 되새김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역행은 설계 작업자의 숙명이다. 여기에 더해 상습적 좌충우돌과 치명적 시행착오 또한 피해 갈 수 없다. 찢어진 메모지에, 혹은 값비싼 몰스킨에, 옐로 페이퍼의 구겨진 한 모서리에도 그 흔적은 남는다. 이제는 휴대 장치가 만들어내는 고해상도 이미지까지 가세하므로 기록들은 차고 넘친다.십 년의 작업 기록, 모든 순간을 기억할 수 있었으나, 모든 기록을 담을 수는 없었다. 500여장의 이미지를 따로 모아 묶는다. 작업과 일상은 뒤섞이기 마련이다. 구분하지 않았다. 친절하지 않다는 원망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정리라는 행위는 가끔 무의미한 과장과 무책임한 소거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대신 책의 말미에 기록된 이미지들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설계의 부산물 혹은 기록물
공간 설계의 종착지는 현장이다. 지구 위도와 경도, 고도의 교차점에 무언가를 만든다. 현장은 가시적이며 입체적이다. 모든 생각과 고민, 대화는 이 특정 지점을 향해 당당하게 출발하지만 모두 무사히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기록은 남는다.
설계 작업은 많은 부산물을 남긴다. 부산물은 둘 중 하나의 운명을 맞는다. 버려지거나 남거나,정연한 형태로 제본된 결과물은 수많은 부산물의 결과다.
남겨진 기록물은 아카이브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설계의 결과물이 도착한 종착지가 전혀 다른 목적지였을 때, 보존된 아카이브는 작업의 원형이 된다. 현장의 변수는 무궁무진하다. 예측 불가의 좋음보다는 생각보다 더 나빠질 확률이 다소 높다. 결과에 승복했을 때, 살아남은 기록물은 위안이 된다.
가끔, 서랍을 열어보거나 모여진 디자인 노트, 쌓아 놓은 드로잉 더미를 들춰본다. 해지거나 변색된 물건들, 번진 잉크 자국, 쓰다가 멈춘 연필의 필적, 아직 끈기가 남아 있는 테이프 흔적.수많은 물음표와 느낌표 또는 별표. 누구에게는 의미 없는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설계 작업자에게는 생생한 삶의 증언이다.
박승진은 경관, 도시, 정원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loci 대표소장이다.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를 거쳐 한국 1세대 조경설계사무소인 서안에서 설계 실무를 했다. 워커힐호텔, 서울아산병원,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2007년에 현재의 사무실을 열어 풀무원 물의 정원, 남해 사우스케이프 오너스클럽, 강릉 시마크호텔, 아모레퍼시픽의 기술연구원 및 오산 뷰티캠퍼스, 제주 오설록 티하우스,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 통의동 브릭웰정원, 대구 미래농원(mrnw) 등을 설계했다. 2018년에 10년의 작업 기록집 『도큐멘테이션』, 2021년에 글 모음집 『텍스트_북』을 독립출판으로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