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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디자인 오피스] JWL 고민은 깊게 생각은 명료하게 결과는 아름답게
    작동하는 공간을 고민하다 Just Working Landscape 많은 사람이 우리의 정식 명칭 JWL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한다. 이번 기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밝히자면 JWL은 ‘Just Working Landscape’의 약어다. 번역하자면 ‘놓아두면 알아서 작동하는 공간’ 정도일 것이다. 자칫 가벼워 보일 수도 있는 이 세 단어의 조합에 우리가 지향하는 공간에 대한 생각이 잘 담겨 있다. 보는 사람의 눈을 단번에 매혹시키는 화려한 조형 언어나 깊은 지적 탐구를 통해 도출한 형이상학적 설계 개념은 우리의 작업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특별히 설계한 것이 없어 보인다거나 너무 뻔한 혹은 소극적 디자인이라는 평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러한 평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소 심심해 보이거나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 디자인을 행하는 이유는, 그러한 디자인 행위가 결국 땅과 함께하며 가장 오래 갈 디자인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조경가의 디자인 행위는 본질적으로 땅과 사람의 속성을 잘 이해하여, 최적의 동적 평형 상태를 찾아 스스로 작동할 토대를 만드는 일이라고 믿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맛을 자아내는 좋은 술처럼, 우리가 만드는 공간도 잘 늙고(well-aging), 잘 숙성된(well-matured) 곳이 되길 바라며 오늘도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하고 있다. (원종호 소장) JWL과 함께 한 2년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어느덧 벌써 2년 차 사원이 됐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JWL은 어떤 회사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었는데, 이번을 계기로 우리의 일상을 공유해 보고자 한다. 처음 입사했을 때 일반적인 설계사무소와는 다른 업무 수행 방식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JWL은 사원 때 부터 PM을 맡아 프로젝트를 진행해 나간다. 그렇다고 모두가 서로에게 무관심한 채 독립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업무를 파악하는 네트워크가 형성돼 혼자만의 힘으로 벅찬 순간이 올 때는 도움을 주고받기도 하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설계사무소답게 현장에 대한 이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대상지의 초기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답사를 자주 나가는 편이다. 비록 야생의 상태일지라도. 답사를 통해 얻은 자료들은 적절히 설계에 녹아들어 좀 더 합리적인 설계안이 만들어지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종종 시공까지 이어지는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높은 완성도를 위해 직접 발품을 파는 등 사무실 밖에서의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시공 현장에서도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내가 설계한 시설물이 어떤 공정으로 진행되는지 확인할 수 있고, 직접 식재하면서 식물의 특성을 배울 수 있어 다음 프로젝트에서 식재 계획을 진행할 때 한번 더 고민하고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상당히 자유로운 사내 분위기다. 그래서 업무를 진행할 때도 모르거나 배우고 싶은 부분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를 나누는 편이다. 비슷한 나이대가 모여서 그런지 취미나 취향도 많이 겹친다. 퇴근 후 다 같이 클라이밍을 가거나 평소 가고 싶던 곳을 공유해 같이 소소하게 답사를 다녀오기도 한다. 이외에도 미식가의 회식, 운동 지원금, 해피아워, 생일파티 등의 소소한 복지가 더해져 지금과 같은 분위기의 JWL이 만들어진 것 같다. (이정화 사원) 본질을 고민하는 설계 구조화된 사고 ‘주 대리, 이제 이 정도는 할 수 있지?’라는 말과 함께 600만 평에 달하는 기업도시 도면이 책상 위에 놓였다. 너무 거대한 땅이다 보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땅의 잠재 가치를 발굴하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주는 방식으로 점차 진행하다 보니 결국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우리만의 답을 찾아나갈 수 있었다. 이런 일을 할 때마다 우리는 겉으론 디자인으로 설득하는 사람들이지만, 본질은 구조화된 사고로 설득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난무하는 정보를 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엮어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을 온몸으로 겪게 해준 이 프로젝트는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사랑하는, 애증의 프로젝트로 남을 것이다. (주민수 팀장) 본질에 닿기 위한 한걸음 최근 가장 깊게 발을 담그고 있는 프로젝트는 서초역 인근에 건축 예정인 한 공연장이다. 처음 맡아보는 중형 프로젝트인 데다 주변에 엮여 있는 이슈들이 많은 탓에 애꿎은 트레이싱지 낭비를 셀 수 없이 많이 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낭비는 진행 중이다.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는 한국의 문화예술을 담는 공연장,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어떤 경험을 기대할까. 건물의 모퉁이에 난 언덕길을 오르며 느낄 수 있는 기분 좋은 감상은 무엇인가. 그리고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조경 공간이 가져야 할 적정한 역할과 그 안에 담는 본질적 이야기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고민하면 할수록 머릿속 질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되고 나의 수많은 질문이 어렴풋이 해결된 어느 날 지금을 돌이켜보면, 조경가로서 한 걸음을 견고히 할 수 있었던 시간으로 기억될 수 있길 바란다. (박지현 사원) 여덟 명의 어벤져스 저녁 있는 삶 우리 회사의 장점 중 하나인 저녁 있는 삶이 나에게 다양한 취미를 경험하게 해 준 것 같다. 보통 직장인이라면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야근 때문에 한 가지 취미를 가지기도 힘든데, 입사 때부터 지금까지 퇴근 후 스무 가지 이상의 다양한 취미를 가졌다. 이런 활동이 가능했던 건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방법이 다른 설계사무소와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원부터 소장까지 개개인이 각자 프로젝트를 도맡아서 진행하기 때문에 스스로 기민하게 프로젝트 일정을 관리하고 조율한다.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정이 몰려 야근하는 일이 발생하면 나머지 팀원들은 하던 일을 잠시 중단하고 어벤져스가 되어 그 팀원을 돕는다. 이러한 방법 때문에 팀원 대부분은 저녁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요즘 퇴근 후 운동하는 재미에 빠져 있는데, 내년에는 첫 바디 프로필 촬영까지 계획하고 있다. 이러한 목표를 갖게 해준 JWL에 고마움을 표하며 오늘도 헬스장으로 간다. (박태영 대리) 배우면서 채워나가는 설계 6월 전체 회의에서 팀장님이 A 아파트 실시도면 납품에 대한 추가 인력을 요청했다. 당시 뭣도 모르던 나는 바로 팀장님을 찾아가 프로젝트 참여 의사를 밝혔다. 처음 도면 목록을 봤을 땐 ‘이걸 언제 다 하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래도 기본 도면부터 차근차근 진행하다 보니 상세 도면 순서가 되었다. 상세도 경험은 많이 없었기에 시작할 땐 막막함이 가득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배웠던 것을 적용하며 도면을 작성했다. 도면을 작성하면서 헷갈리는 부분이 생기면 주변 대리님에게 물어보며 디테일한 내용들을 채워 나갔다. 작성한 뒤에는 팀장님과 소장님의 검토를 받으면서 모르던 부분들을 배우고 내 도면에서 부족한 설명을 채워나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막막하기만 했던 작업이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해결되는 것을 느끼며, 다시 한번 팀워크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도 더 열심히 공부해 다른 팀원들에게 도움이 되어야겠다. (이정화 사원) 자연과 우리의 시선이 마주할 때 자연이 주는 울림 작년 가을부터 JWL과 함께하게 되었다.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경주시 일대의 산을 답사하게 되었다. 회사 구성원 모두 GPS 기반의 산악인 앱을 익숙하게 사용하는 것이 의아했다. 하지만 몇 번 답사를 하면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정 교수님은 언제나 사람의 손발이 닿지 않는 곳을 향한다. 이번엔 가시덤불과 발이 푹 빠지는 늪지대였다. 그 이후 직원들 사이에서 ‘황천길’이라고 불리게 된다. 답사 막바지쯤 공간을 압도하는 아름드리나무가 우거진 숲을 만났는데, 거친 숲길에서 겪었던 고생이 희미해질 만큼 큰 울림을 준 장소였다. 우리는 대지가 제공하는 순간들 속에서 아름다운 장면을 발견하는 눈과, 그 장면의 가치를 전달하는 목소리에 힘이 있는 설계사무소다. 현재 맡은 프로젝트에서도 대상지 답사 중 얻은 인사이트와 숲의 흐름을 대상지까지 연결하는 것을 주 전략으로 삼았다. 과정 중에 매끄럽지 않은 경험도 있지만, 이곳이라면 그 끝에 마주할 결과물에 대한 믿음이 있다. 앞으로 JWL과 함께 쌓아갈 자연과의 협업이 기대된다. (김제인 대리)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베트남의 광역 부지를 계획하는 마스터플랜 프로젝트 덕분에 해외 출장을 가게 되어 우리 회사 엄청나잖아? 라는 고취에 빠진 것도 잠시, 미개발된 베트남 오지에서 정글의 법칙을 찍었다. 하지만 고군분투해 조사한 자료가 쓰이는 것을 보며 뿌듯했다. 실내에 앉아 컴퓨터로 자료를 조작하는 일에만 익숙하던 내가 부지를 직접 탐방하고 이색적인 자연환경을 공부한 좋은 기회였다. 조경설계는 조사와 설계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실무에서는 현장에서 발로 뛰는 일보다는 사무실에서 단축키 두드리는 업무의 비중이 늘게 된다. 우리 회사에서는 기회가 될 때마다 원형에 가까운 자연을 답사하러 가곤 하는데, 시원한 바람을 쐬며 무성한 풀내음을 맡다 보면 아름다운 자연에 우리의 시선이 닿는 순간을 기대하게 되고 내가 이 일을 선택한 이유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정은혜 사원)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JWL)는 다양한 오픈스페이스의 계획·설계를 수행하는 디자인 오피스다. 대상지의 다양한 환경 조건을 세심하게 살피며 대지의 잠재력을 만개시키는 설계를 지향한다. 간결하고 심미적인 설계 언어를 통해 대상지의 공간적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격조 있는 문화적 산물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합리적인 경관 배치와 감각적인 공간 연출을 동시에 추구한다. 이용자 모두의 다양한 요구에 절묘하게 부합하도록 작동하는 장소 구현을 중요한 임무로 삼고 있다. www.jwlandscape.net, instagram(@jwlandscape_official)
  • [모던스케이프] 도시를 보살피는 위생 경관
    통계청 기록에 따르면, 한국의 상수도 보급률은 2021년을 기준으로 97.7%다. 1960년대의 보급률이 22%였다고 하니, 반세기만에 실로 놀라운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상수도上水道(waterworks)는 하수도나 공업용 수도와 구별할 때 부르는 용어이며, 일반적으로는 ‘수도’라 칭한다. ‘수도법’에서는 수도를 ‘관로管路, 그 밖의 공작물을 사용하여 원수原水나 정수淨水를 공급하는 시설의 전부’라 정의한다. 보건 위생과 소화消火를 목적으로 한 급수 설비 체계를 97.7% 갖췄다고 함은, 한국 대부분 지역에 깨끗한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90%에 이르는 도시화율과도 비례한다. 도시의 상수도 시설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양질의 식음수 공급이 우선되어야 하므로 정수장 설비 마련은 필수다. 열약한 환경에 놓인 근대기의 도시민에게 맑은 물을 생산, 공급하는 시설은 도시 공원보다 더 절실할 수 있는 중요 기반 시설이었다. 전통적으로는 우물을 파서 물을 끌어 올려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형편이 좋은 집에서는 개인 우물을 파기도 했지만, 대체로 마을마다 공동 우물을 파서 주민이 함께 이용하고 관리했다. 여름이면 충분한 비가 내렸고 계곡과 하천이 발달한 곳에 취락지가 있었기 때문에 식음수와 생활용수를 취하는 일이 비교적 손쉬웠다. 전국에 분포한 화강암반은 좋은 여과지가 되어 양질의 지하수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상하수도 분리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개항장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인구가 집중 증가하는 19세기에 이르자 식음수의 부족 문제와 수질 문제가 표면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다. 근대식 상수도 시스템은 하천수를 끌어와 침전과 여과의 정수 과정을 거친 뒤 동력을 이용해 배수지로 송수하고 배수관을 통해 급수하는 것이다. 이보다 간단하게는 차집관로를 설치해 물을 자연 여과하여 집수정에 모았다가 배수지로 송수하고 배수관을 통해 급수하는 방식도 있다. ...(중략)... 2년 간의 ‘모던스케이프’ 연재는 근대 도시의 가장 큰 근간인 ‘교통’으로 시작해 ‘위생 경관’에서 끝을 맺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단편적인 근대 경관의 소재를 동서와 고금으로 확장해 볼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소득이다. 독자들이 100여 년 전 이 땅의 모던스케이프를 상상하고 이해하는 데 이 지면이 조금이나마 도움 되었길 바란다. 더불어, 암흑기이자 단절기로만 단정해왔던 20세기 전후 시기가 사실은 지금을 자리할 수 있게 한 토대였음을 공감하는 기회가 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환경과조경428호(2023년 12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부산 중앙공원 홈페이지 www.bisco.or.kr/jungangpark 이연경, “도시위생의 수호자, 상수도”, 『도시를 보호하라』, 2021, pp.74~167. 김백영, “일제하 서울의 도시위생 문제와 공간정치: 상하수도 우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총』 68, 2009, pp.191~226. 김재호, “식수문화의 변화과정: 우물에서 상수도까지” 『한국민속학』 47, 2008, pp.235~265. 통계청 www.kostat.go.kr/ansk/ 그림 출처 그림 1. www.visitbusan.net
  • [에디토리얼] 조경 교육의 다음 50년을 위해
    조경 교육의 다음 50년을 설계할 시점이다. 교육인증이 조경 교육의 전문성을 키우고 조경 실무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2023년 8월호 에디토리얼에서 예고한 대로 이번 달 특집의 주제는 조경학 교육인증이다. 다면적 토론과 숙의를 초대하는 난제의 첫걸음을 떼기 위해, 이번 지면에서는 주로 인증의 필요성을 논의하고 주요 사례를 검토한다. 특집을 여는 글 “조경학 교육인증 논의를 시작하는 첫 질문”에서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는 인증의 필요성을 다각도로 짚는다. 그의 진단처럼 “‘지금의 조경 교육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50년 역사를 축적해온 조경 교육이 “전적으로 교수 개인의 역량에 내맡겨져 있”는 당혹스러운 현실은 조경(학)의 전문성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조경 전문가(의) …… 기술과 지식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이를 검증하는 시스템의 부재로 해마다 …… 쏟아지는 졸업자들의 자질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 자질의 일관성은 한 분야의 전문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러한 일관성은 전문가를 배출하는 일관성 있는 교육에 근거한다.” 김아연 교수는 조경학 교육인증 논의의 “지속성을 담보하고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은 곧 “기성세대로서 우리는 어떤 미래를 물려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성실히 응답하는 데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글 “설계 교육의 정도는 무엇인가”에서 최영준 교수(서울대)는 조경학 교육인증제의 “실현 여부에 대해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 조경설계 교육에 대해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몽타주가 정해진 답 없이 흐릿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설계 교육의 위상을 “교육인증제를 기회로 바로잡고 전국의 모든 학과‧전공들이 정도正道로 삼을 만한 설계 교육의 정도正度”를 논의한다. 그는 “교육인증제를 통해 조경학과 교과 과정에서 학습한 지식과 기술을 토대로 동시대의 문제를 스스로 정의하고 그 해결책을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는 통합적 틀을 제공하는 설계 과목의 쇄신이 이루어진다면, 조경학도 모두가 자기 브랜드를 갖는 조경 전문가로 성장해 나가는 큰 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김정화 교수(네바다주립대)는 글 제목처럼 “미국 조경학 교육인증제의 현황과 시사점”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직접 경험한 재인증 과정을 공유한다. 그가 상세하고 깊이 있게 소개하는 바와 같이, 미국의 조경 교육인증 주체는 조경인증위원회LAAB이며, 인증제의 목적은 “조경 학위 프로그램의 교육 품질을 평가하고 지지하며 발전시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교육과 직능의 밀접한 연결이 핵심으로, 학생들이 조경 직능에서 요구되는 지식과 기술을 갖출 수 있도록 조경 분야의 고품질 교육을 보장하는 데 있다.” 그는 전공 및 학위명, 학위 과정 기간과 요건, 정보 공개 온라인 플랫폼, 교수진 규모와 임용 상태, 소속 대학의 인증 여부, 관리자, 인증 지속을 위한 의무 사항 등 미국 조경학 교육인증제의 인증 기준을 소개한다. 또한 인증 신청. 자체 평가, 방문 평가, 평가 검토와 의견 수렴 과정, 인증 결과 공표로 이어지는 인증 절차를 설명한다. 김정화 교수는 교육인증의 효과와 의미를 1)인증제를 통한 조경 교육의 핵심 가치 공유, 2)통합적 데이터 구축, 3)확장과 네트워크 등 세 가지로 제시하며, 인증제는 “매우 체계적이면서도 동시에 느슨한 구석도 지닐 필요가 있”으며 “인증 체계와 과정에서 인증을 받으려는 주체의 역할과 권한이 중요하다”는 시사점을 끌어낸다. 김영민 교수(서울시립대)의 글 “IFLA APR의 조경 교육 방향과 기준”은 지난 2018년 세계조경가협회 아시아태평양지회가 마련한 ‘교육 정책과 기준, 그리고 인증 과정’의 틀과 내용을 소개한다. 교육 프로그램의 목표와 목적, 행정과 운영, 전문 교과, 교육 성과(10가지 세부 분야), 전문 성과, 시설‧장비‧정보 자원, 대외 활동 등으로 구성된 조경 교육 기준은 한국 조경 교육의 기본적 틀을 재정비하는 데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김영민 교수가 말하듯, 한국 조경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같은 조경학과이지만 대학에서 서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며 논의도 없다는 점”일 것이다. IFLA APR의 교육 지침이 우리가 당장“현실적으로 적용할 지침이 아니더라도 이 지침의 높은 기준과 정교한 조경 교육에 관한 규정은 우리의 교육을 뒤돌아보고 점검해 볼 ……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그의 주장처럼, “교육의 효과는 현실적이어야 하지만 교육의 지향점과 목표는 이상적이어야 한다. …… 한국 조경계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출발점은 분명 교육에 있다.” 이번 특집 지면이 조경학 교육인증제 논의의 기초 자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앞으로도 본지는 교육인증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를 담고 더 심도 있는 조사와 연구, 토론을 공유할 예정이다.
  • [풍경감각] 11월 저녁
    수능을 며칠 앞둔 날을 기억한다. 3년간 공부에 매달렸지만 성적은 목표에 비해 한참 부족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저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먹고 잠들며 수능 시간에 맞춰 모의고사를 풀었다. 점수를 더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평소의 점수라도 받기 위해서 이제껏 쌓아온 리듬을 이어가는 것뿐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수능 시간표에 맞춰 하루 종일 모의고사를 풀었고, 늘 틀리던 것을 틀렸고 늘 맞히던 걸 맞혔다. 채점한 시험지를 추슬러 가방에 넣고 저녁을 먹으러 급식실로 향했다. 급식실은 운동장 건너편에 있어서 조금 걸어야 했다. 항상 같은 시간에 똑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는, 늘 같았던 익숙한 길. 11월이 되자 해가 무척 짧아져 이른 저녁인데도 한밤중처럼 새카맸다. 문득 그 어둠이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11월을 처음 겪는 것처럼. 올해도 11월이 돌아왔다. 멋지고 대단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엔 늦었다. 다만 앞선 계절에 벌여 놓은 일을 올해 안에 마무리하기 위해 그저 묵묵히 일을 이어가야 하는 시간이다. 해가 짧아졌고, 아직 하루를 마무리하지 못한 시간에 이른 밤이 찾아온다. 이제 이 어둠이 더 이상 낯설지는 않지만, 여전히 너무 빨리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고 태양이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는 계절이 벌써 그립다.
  • [제도가 만든 도시] 다양성 그리고 통일성
    ‘다양성’은 도시가 도시일 수 있는 중요한 속성으로 많은 도시 연구자가 지속적으로 들여다 본 주제다. 물론 도시의 인구학적 다양성, 그에 기인한 사회문화적 다양성, 도시 경제를 구성하는 산업적 다양성 등 연구자마다 초점을 두고 들여다보는 다양성의 차원도 ‘다양’하다. 그러나 에드워드 글레이저(Edward Glaeser)의 주장(각주 1)으로 종합하자면, 도시의 다양성은 포괄적 의미에서 도시가 사회 그리고 개인에게 제공하는 ‘기회의 폭’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도시의 번영을 가져오는 ‘도시적’ 자원이다. 그렇다면 도시에서 공간 환경 차원의 다양성은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가질까? 제도는 도시 공간의 다양성에 어떻게 관여하고 있을까? 이번 글에서는 통일성과 짝을 지어 도시 공간의 다양성을 다룬다. 공간적 다양성의 의미 도시 공간의 다양성, 즉 도시 건조 환경을 구성하는 개별 요소들과 그 집합적 양태의 다양성 또한 마찬가지다. 일차적으로는 다양한 공간 환경은 다양한 도시민의 다양한 도시 활동을 가져올 수 있다. 1960년대 뉴욕 맨해튼과 교외 단독주택지를 비교한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의 주장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단독주택 필지 하나 없이 공동주택 100%에 아파트 단지 상가가 아니면 대형 상가, 쇼핑몰이 전부인 송도 신도시와 저층 주거지와 소규모 아파트 단지가 혼재하고 전철역 앞엔 대형 상가와 골목 시장이 나란히 공존하는 봉천동에서 가능한 공간 경험과 도시 활동의 폭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체감한다(그림 1). 또한 도시 활동과 공간 환경은 일대일로 대응되는 관계가 아니다. 같은 활동이라도 다른 공간 환경에서 일어난다면 다른 경험이 될 수 있다. 연남동 맛집을 찾는 것과 광화문이나 여의도의 대형 업무 시설 저층부 상업 공간에 있는 분점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개인에게, 그리고 사회적으로 같은 의미일 수 없다. 따라서 공간 환경적 다양성은 한 도시의 문화를 더 두텁게 만들고, 개인이 누리는 경험은 다채로워진다. 공간 환경의 다양성은 그 자체로 사회적 다양성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도시 공간은 결국 누군가의 필요를 담고 욕망을 투사하는 장치다. 케빈 린치(Kevin Lynch)는 잘 작동하는 도시 공간의 조건으로 시민들 각각의 공간에 대한 주체성이 보장되는 것, 즉 도시 공간의 구성과 활용 방식을 알고 있고 능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인식하는 것을 꼽는다.(각주 2) 따라서 공간 환경의 다양성은 해당 사회가 다양한 구성원의 요구를 수용하고 선택을 허용하는 정도를 드러낸다. 이때 개인은 자신의 삶을 위해 도시 공간을 주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고, 도시 공동의 자원인 공간의 활용은 극대화될 수 있다. 통일성이 있어야 하는 다양성 왜 다양성을 통일성과 함께 생각해야 할까. 일견 통일성과 다양성이라는 특성을 양립하기 어려운, 상호 대립하는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공간 환경의 인지에서 통일성의 가치가 작동하는 방식, 다양성의 가치가 작동하는 방식을 고려한다면 이 두 속성은 오히려 양립해야만 서로를 강화하고 드러내는 역설적 관계다. 예를 들어 첫 연재에도 나왔던 에익심플레(Exiample)라 불리는 바르셀로나의 격자형 신시가지는 크기와 높이가 일정하고 정사각형을 모치기 한 형태의 블록이 시가지 구역의 전체 형상에 관계없이 기계적으로 배열되어 전체 도시 경관을 지배한다. 하지만 동시에 각 블록은 오히려 다양한 변이를 보여준다. 모퉁이의 입면, 가로에서 보이는 중정의 형태, 블록을 구성하는 건물의 분절 등 어느 하나도 같지 않다. 통일된 외곽선 안에서 시가지가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개별적인 선택들이 누적된 결과라 하겠다. 그리고 그 과정은 어떤 것을 지키고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에 관한 바르셀로나의 합의이기도 하다. 일데폰스 세르다(Ildefons Cerda)의 계획안에서 보듯 블록 내 건물의 배치까지 완전히 통일된 모습으로 지어지고 그 모습이 시간이 지나도 강력한 통제로 고정되었다면 지금처럼 역동적이고 사람들의 삶이 느껴지는 흥미로운 도시 경관은 아니었을 것이다(그림 2). 이때 격자형 조직의 강력한 통일성은 각 블록의 차이, 즉 다양성을 인지하는 기준점이 되며 다양성은 통일성을 배경으로 부각된다. 반대로 다양성을 구성하는 통일성도 있다. 예를 들어 좁은 골목길 철공소 사이사이에 힙한 식당들이 위치한 문래동, 도시형 한옥이 밀집한 북촌, 한강변으로 판상형 아파트들이 도열한 압구정동, 원룸 골목이 즐비한 신림동 고시촌 등은 각 지역 내 필지와 도로, 건축물 등 물리적 요소와 그 배열의 유사성이 높고, 이와 결합된 특유의 공간 활동이 밀집하여 반복된다. 도시 안에서 구분되는 영역들은 이러한 내적 통일성이 강할수록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갖는 장소들 각각은 그 도시 전체의 다양성을 구성한다. 이렇게 통일성이 있어야 다양성이 드러나는 역설은 하나의 공간 대상에 통일성과 다양성은 중첩되어 작동하되 통일성과 다양성이 인지되는 공간 범위는 다르기 때문이다.3 따라서 통일성과 다양성은 양자가 동일선상의 양끝을 향하는 속성이 아니다. *환경과조경427호(2023년 11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에드워드 글레이저, 이진원 역, 『도시의 승리』, 해냄, 2011. 2. 현실적으로 모두가 광장의 형태와 시설물을 바꾸는 등 직접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도시 공간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그것을 반영하는 시스템이 있다는 것이고, 이를 구성원이 신뢰한다는 것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시위는 우리에게 그러한 시스템도, 신뢰도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Kevin Lynch, Larice, Macdonald ed., “Dimensions of Performance”, The Urban Design Reader , Routledge, 2007. 3. 김세훈은 『도시에서 도시를 찾다』(2017)에서 ‘지역 내 다양성’과 다른 ‘지역 간 다양성’으로 설명한다.
  • [어떤 디자인 오피스] CA조경기술사사무소 시간과 사람, 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장소를 디자인하다
    우리의 시간들 CA의 흔적들 2003년 12월 1일 혹독하게 추운 날, 13명의 사람들이 강남 어느 건물 4층에 모였다. 일부는 학교를 바로 졸업하거나 가르치는 일을 하다 오고, 일부는 다른 설계사무소에서, 또 일부는 설계와 전혀 관계없는 회사에 다니다 왔다. CA조경기술사사무소(CA Landscape Design Office)(이하 CA)의 처음은 일반적인 설계사무실의 고루한 루틴보다는 새로운 설계 접근을 원하는 진보적 사고의 사람들 13명으로 시작됐다. 그로부터 CA는 한국의 조경 분야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선도적이며, 때로는 실험적인 접근을 주저하지 않는 최고의 조경설계사무소의 하나로 성장해 왔다. 우리가 추구하는 독창성은 펜타 철학(Penta Philosophy)이란 기치 아래 철학이 뚜렷하고 소신 있는 설계 전략으로 발전하고 응용되어 왔다. CA는 건축이나 토목 등 인접 분야와 수동적이 아닌 대등하고 수평적인 소통의 설계를 통해 결과적으로 더 강하고 좋은 설계를 하는 스튜디오로 알려져 있다. 상당수의 저명한 건축설계사무소 및 스튜디오와 협업을 했거나 현재 하고 있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CA가 이룬 성과는 매우 많다. 몇 개만 열거해 보면, 청계천 복원의 총괄 조경가 수행, 건축설계사무소 KPF와 같이 작업한 세운상가 국제설계공모(2006) 당선, 무주 태권도공원 턴키설계공모(2007) 당선, 건축가 마크 맥Marc Mac과 같이 작업한 판교 월든힐스 아파트 단지 국제설계공모(2008) 당선, 진천 국가대표 제2선수촌 턴키설계공모(2010), 새로운 광화문광장 국제설계공모(2019) 당선 등 다 언급하기가 쉽지 않다. 공동주택에 집중하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주거 프로젝트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2017년 완공된 반포 아크로리버파크는 현재까지 한국 아파트 조경 중 가장 잘된 설계라는 평을 듣고 있다. 보다 참신하고, 보다 창의적이며, 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프로젝트를 보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7,250일차 진양교) 플러스 알파를 묻다 2003년 12월 1일 CA가 시작되는 날은 겨울이었지만, 개성 넘치는 13명의 열정이 함께 모여 있어서 그런지 그리 춥진 않았다. 보다 진지하고 치열했으며, 때론 고단하면서 즐거웠던 나날들이 어느덧 7,250일을 길고도 짧게 채워왔다. 이제는 플러스 알파를 고민해 본다. 대상지에 어울리는 그럴듯한 이름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보다, 또한 이제는 희미해진 장소성을 억지로 캐내고 만들어 내는 작업보다, 오늘날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유용한 행태를 담아내는 공간의 본질을 바탕으로 더 절제되고, 더 낯선 환경을 연출하는 것이 디자인이라 생각한다. (7,250일차 정문정) CA의 어제와 오늘 2003년 창립 멤버로 시작했고, 잠시 해외에 머물다 다시 돌아왔다. 내 기억 속의 CA는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멋진 CA의 모습도 있었지만, 부족했던 CA의 모습도 많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그 이야기를 몇몇 경험자들이 아닌 모두에게 들어보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준비했다. 지금의 CA는 어떤 모습일까. (5,060일차 조용준) CA 어게인 개인적인 일로 두 번 CA를 떠났다가 지금은 세 번째 CA에서 지내고 있다. 그 때문인지 간혹 이런 질문을 받는다. 왜 다시 CA냐 묻는다면 답은 간단하다. CA에 있을 때 편안하고 하는 일에 자부심과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CA가 나라는 사람을 잘 알고 감사하게도 기회를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바탕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각자의 자리를 무게감 있게 지키며 언제나 밝은 얼굴로 맞이해주는 곳, 그 안에서 깊이 있는 디자인 탐구와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한, 사람이 중심이 되는 그런 곳이다. (3,676일차 소진) 치열한 고민의 시간 2021년 여름 래미안 원베일리 수주전에 뛰어들어 당선되었다. 설계 기간 동안 시행사와 발주처를 설득하기 위해 팀원들과 공간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하면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던 기억이 난다. 최근 준공된 모습을 보니 설계하면서 고민했던 시간과 노력을 보상받은 것 같아 뿌듯했다. 설계에서부터 시공까지 모든 과정을 경험하며 결과물을 볼 수 있어서 이번 프로젝트가 더 인상 깊다. (1,910일차 권범영) 즐거운 일상 즐거운 일이 매일 있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옆자리 동료와의 수다도, 적지 않은 시간 함께하며 남은 사진 속 순간들도, 다 즐겁다. 그렇지만 가장 즐거운 순간은 나 자신이 제대로 쓰임 받고 있다고 느낄 때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 결과로 우리 팀과 회사가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고 느낄 때, 행복감이 찾아온다. (1,619일차 이주영) 공간의 감동 몇 년을 노력한 새로운 광화문광장 프로젝트가 끝나고, 처음으로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현장으로 갔다. 아내에게는 많은 에피소드와 현장 뒷이야기들을 풀어놓았고, 갓 돌이 지난 아이와 물놀이를 하며 그동안 못했던 아빠 노릇을 했다. 설계자로서 많은 사람들이 공간을 즐기는 모습을 보는 감동이 있었지만, 그중 한 가족이 되어 느낀 경험이 지금까지 소중하게 자리 잡 았다. (1,587일차 강인화) CA가 CA했다 다양한 특수부대가 서로 미션으로 경합하는 강철부대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거기에 나오는 말 중 특정 부대가 미션 수행을 잘 했을 때, “UDT가 UDT”했다는 말을 한다. 4년간 몸담으며 느낀 건 “CA는 언제나 CA”한다. 그만큼 믿을 만하고 잘한다는 이야기다. (1,380일차 엄성현) 새로운 휴식 시간 어느날 회사에 화분이 늘어난 것을 계기로 각 소별로 한 명씩 나를 포함한 총 세 명의 인원이 화분에 물을 주는 담당을 맡게 되어 새로운 식물 커뮤니티가 생겼다. 식물 키우는 걸 좋아하는 두 명의 친구와 함께 키우다보니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이 시간이 적당한 취미 생활이자 그 주의 새로운 휴식 시간으로 좋은 기억을 남긴다. (1,343일차 정윤석) 사람의 힘, 살아갈 힘 ‘딱 3년만 배우고 돌아가자!’는 굳은 결심으로 상경한 지 어언 4년차. 대리로 입사해 막내 팀장이 된 지금. 체력적, 정신적으로 힘든 날들도 있었지만 동료를 넘어 가족 같은 팀원들 덕분에 힘들지 않게 흘려 보낼 수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허물없이 저마다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며 언제든 발 벗고 나서서 나의 일처럼 마음을 써주는 열정 가득한 곳. 내가 오늘도 제자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이다. (1,313일차 박상희) 점심의 산책 긴 점심시간은 CA의 장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점심시간이 길어 산책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여름에는 시원한 느티나무 길을 왕복하고, 남은 계절에는 재개발 예정인 뚝섬과 성수동 일대를 걷는다. (1,125일차 이상민) CA와의 시작 잠시 쉬는 동안 CA란 회사의 가치관이 궁금했고, 새로운 택지 현장이, 새로운 사람과 조경을 위한 배움이 그리웠다. 그래서 CA에서 입사 제안이 왔을 때, 고민 없이 이민 가방을 준비하고 그렇게 3년간 주말 가족이 되었다. 입사 무렵 태어난 아기가 벌써 내년이면 4세가 되고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렇게 엄마로서, 조경가로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1,081일차 박주희) 그해 여름 약 3년의 시간을 돌이켜 보면, 첫 설계였던 광화문광장이 시공되면서 힘든 순간들에 대한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해 여름 KT 현장 식재 공사를 진행하며 느낀 노동의 만족감도 좋은 추억이다. 그리고 가을, 새만금 실시설계 도면을 작성했다. 완성될 그날이 기대된다. (1,006일차 이지현) 팀워크와 커뮤니케이션 1시간 30분이라는 긴 점심시간은 업무 중 나누지 못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팀워크와 커뮤니케이션에 큰 도움이 된다. 또한 성수동의 다양한 카페 선택지는 매일매일 새로운 공간에서 딱딱하지 않은 즐겁고 편안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다. (1,005일차 장시영) 고뇌와 성취 사이 CA에 다니는 것이 솔직히 쉽지는 않다. 자신이 가진 최선의 것을 쥐어짜내 최고를 만들고, 이를 평가 받는다. 또한 생각보다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나를 마주하는 날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프로젝트를 마주할 때, 심지어 그 결과가 좋을 때 밀려오는 성취감은 모든 고통을 잊게 한다. (886일차 신원재) 우리의 작업 방식 좋은 사람들과의 다양한 협업이 즐겁다. 인천계양, 고양창릉 같은 대규모의 택지 설계공모는 새로 공모팀을 꾸려 작업했는데, 팀원들과 아이디어를 나누며 같은 호흡으로 달린 기억이 있다. 덕분에 결과와 상관없이 과정까지 즐길 수 있었다. (660일차 오혜지) 디자이너에게 CA는 3D 모델링부터 렌더링까지 모형과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한 툴과 기술들, 챗 GPT, 미드저니mid journey와 같은 생성형 AI까지 CA는 뒤쳐지지 않고 발전하며 더욱 창의적이고 멋진 디자인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계속한다. CA는 열정을 가진 디자이너들에게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도전의 장인 것 같다. (542일차 김병철) 디테일과 열정 입사 후 현재까지 본 결과물들은 항상 완성도가 높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이는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 놓치지 않는 작업자들의 열정과 집착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처음에는 “이런 것까지 신경 쓴다고?”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를 보면 그 집착이 전체적 완성도를 높여준다는 걸 이제 안다. (461일차 홍병석) 입사 후 변화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과감한 시도를 격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유롭고 참신한 피드백을 해주는 팀원들과 함께 일하며, 일상 속 다양한 것에 대한 관심이 더욱 많아졌다. 그래서 여행을 다니며, 새로운 영감을 얻고 메인 콘셉트부터 사소한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으려 한다. (439일차 김성일) 입사 전과 입사 후 입사 전 소문으로 듣던 CA는 야근 많고 선임들이 무서운, 그렇지만 크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해 볼 수 있는 회사였다. 실제 입사 후 직접 느낀 CA는 크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해 볼 수 있는 회사는 맞지만 야근 많고 선임들이 무서운 회사와는 거리가 멀다. 불필요한 야근을 줄이고 합리적으로 일하며, 때마다 각자의 생일을 챙기고 계절별로 다 같이 소풍을 가는 충분했다. 언젠가 나도 나의 디자인이 담긴 공간을 바라보고 더 자부심 있는 조경가가 되고 싶다. (219일차 조혜진) 새로운 시작 여태껏 경험했던 프로젝트와 달리, CA의 다양한 프로젝트와 열린 아이디어 회의 그리고 완성 후 잘 만들어진 공간이 담긴 사진들은 지쳤던 내게 다시 설계를 시작할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됐다. 잠깐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진행한 강릉 디오션 259 복합개발사업의 외부 공간 설계는 CA 입사 계기가 되었다. (66일차 이지원) 이직할 결심 조경설계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이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세상에 기여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미지근하게 살다가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조경 시류를 이끄는 그 한복판에서 일하고 싶었다. 올여름, 나는 CA의 새 식구가 되었다. (65일차 이설화) 26일차 신입이 본 CA CA 합격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첫 사회생활이 조금 두렵기도 했다. 9월 11일, 두근두근 떨리는 CA 첫 출근 날! 회사는 생각했던 딱딱한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고, 경직된 나에게 모두 밝게 인사해 주었다. 많은 질문에도 차근차근 알려주시고, 화목한 팀 분위기에 입사 일주일 만에 적응했다. (26일차 노영현) 편안한 분위기 여러 가지 장점이 있지만 가장 좋은 점은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라 생각한다. 처음 입사했을 때도 예상보다 훨씬 편안한 분위기라 놀랐고, 덕분에 아이디어 회의나 질문이 있을 때도 편안하게 의견을 제시하고 피드백 받을 수 있다. (34일차 김예준) 최고의 무대 CA는 조경가에게 최고의 무대라고 생각한다. 대학생 시절부터 CA의 프로젝트들을 보며 설계가로 자라고 싶었다. 열심히 했던 학창 시절의 결과물로 CA에 들어왔다. 설계에 진심인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 감사하고 앞으로 설계 능력을 향상시켜 팀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싶다. (35일차 김진원) 2004년 설립된 CA조경기술사사무소는 작은 공간의 설계부터 도시 스케일의 계획에 이르는 국내외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창의적인 생각으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며, 공공을 위한 의미 있는 장소를 만들고자 한다. www.cadesign.co.kr
  • [모던스케이프] 미화된 전통, 또 하나의 경관
    광화문 월대(月臺)가 2023년 10월 15일 대중에게 공개됐다. 월대 복원 논의는 1990년부터 추진된 경복궁 복원 사업과 궤를 같이했다. 어느 학예사의 눈썰미로 동구릉 구석에 쌓여 있던 부재가 월대의 것임을 알게 되었고, 호암미술관 희원(熙園)에 있던 서수상(瑞獸像)을 기증받은 운까지 따라, 복원의 진정성 측면에서 큰 힘을 실을 수 있게 되었다. 월대 앞 공간은 경관적으로만 보면 나쁘지 않다. 기존에는 사직로가 광화문에 맞닿아 있어 궁궐 주변이 옹색했다면, 지금은 남북으로 48.7m, 동서로 29.7m에 달하는 월대 덕분에 궁궐 정문 주변에 여유 공간이 확보됐다. 광화문 좌우에 있다가 월대 앞으로 옮겨진 해치상은 어도 앞머리를 장식한 서수와 소맷돌, 월대 좌우의 동자주 등 과 함께 조선 정궁의 정 남문으로서 광화문의 위엄과 품격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광화문 월대 복원의 필요성이나 고증의 정확성 등 근원적인 문제를 비판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예부터 월대는 궁궐 전각 앞에 두는 것이지, 광화문처럼 문 앞에 두는 시설은 아니었다. 예외적으로, 1431년 음력 3월 29일, 예조판서가 중국 사신들이 출입하는 광화문 주변이 누추하고 관리들의 하마처(下馬處)가 마땅치 않음을 이유로 광화문에 월대를 조성할 것을 건의한 바 있었지만, 세종은 바쁜 농사철에 백성들을 동원할 수는 없다며 불허했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나도록 광화문 앞에는 월대가 없었다. 우리가 옛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월대는 1866년 음력 3월 3일(고종 3년)에 완공된 것으로,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사업과 맞물려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사업을 추진한 데는 왕의 권위와 위엄을 회복하기 위한 이유가 있었고 광화문의 월대 조성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광화문 월대가 위상을 지킬 수 있었던 시간은 길어야 30년 정도였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을 정궁으로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이번 복원 사업은 월대의 수명만큼이나 오래 걸렸다. 1923년 부설된 전차 선로만 아니었다면 불필요했을 일련의 논의는 도로망 변경에 따른 교통 문제까지 더하여 당분간은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하지만 월대는 경복궁의 온전한 시설로 자리매김하여 종국에는 국가 권위의 계승을 상징하는 요소로 안착할 것이다. *환경과조경427호(2023년 11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신형준, “光化門 ‘月臺’ 복원자료 찾았다”, 「조선일보」 1996년 8월 9일. 노주석, “광화문 월대는 여전히 미완성”, 「파이낸셜뉴스」 2023년 10월 25일. 박종인, “광화문 월대는 없었다: 가짜역사와 시민 편의”, 「조선일보」 2023년 5월 30일. 그림 출처 그림 1. 박세희, “‘왕건의 상징’ 48m×29m 공간…궁궐행사·백성소통 ‘다중 역할’”, 「문화일보」 2023년 5월 2일. 그림 2. 임소정, “100년 만에 다시 걷는 역사의 길…광화문 월대·현판 오늘 공개”, 「MBC 뉴스」 2023년 10월 15일.
  • [에디토리얼] 공간 문해력
    생태 문해력, 미학적 문해력이라는 표현까지 있듯 요즘 다양한 분야에서 ‘문해력(literacy)’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디지털 리터러시나 메디컬 리터러시처럼 번역하지 않고 그냥 리터러시로 쓰는 경우도 많다. 사전은 문해력을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 정도로 간략하게 정의하지만, 그 의미와 용례는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 사용 매체와 소통 방식, 사회 참여 등을 결정하는 데 관여하는 기본 소양이나 문화적 기술을 뜻하기도 한다. 텍스트의 해독을 넘어 그것을 생성하고 수용하는 모든 능력을 뜻하는 말로 확장되고 있기도 하다. 나도 어느 유튜브 강의에서 ‘공간 문해력’을 말한 적이 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어떤 공간이나 장소에 호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뭐가 왜 좋은지 물으면, 답변에 등장하는 표현이 정말 제한적이에요. 멋있다, 예쁘다, 대박이다 정도죠. 사용하는 어휘가 그것뿐이라는 건 곧 공간 문해력이 낮다는 거죠. 도시의 일상생활에서 좋은 공간을 구별하고 잘 경험할 줄 아는 능력, 즉 공간 문해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좋은 공간은 도시의 일상을 풍요롭게 합니다. 하지만 정부나 공공이 다 해주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공간을 둘러싼 이슈에 개입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공간 문해력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나는 이 도시를 어떻게 경험하고 감각하는가, 그 장소가 왜 좋은가, 저 경관의 어떤 면이 아름다운가, 그런 환경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어렵더라도 자주 생각해보고 구체적으로 표현해보면 공간 문해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설익은 의미로 공간 문해력 개념을 말했는데, 뜻밖에 많은 피드백이 왔다. 누군가는 “세상을 더 아름답게 살아가게 해주는 능력”이라는 댓글을 달았다. 누군가는 구체적인 의미와 사례를 묻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좋은 공간을 구별하고 경험하는 소양’이라는 뜻 정도로 쓴 말인데, 깊이 있는 연구와 토론을 거친 학술적 개념은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공간 문해력은 공간이라는 텍스트를 잘 이해하고 해석하는 공간 수용자/경험자의 능력이지만, 그러한 힘은 텍스트의 독해자―즉 공간 수용자/경험자―뿐만 아니라 텍스트 자체―즉 공간 자체―에서도 나온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으나 짐작에 가까운 거친 논리라 숙제로 남기기로 했다. 1차 리노베이션을 마친 목동 ‘오목공원’을 개장 첫날 둘러봤다. 설계공모 당선작 ‘도시의 공공 라운지’(디자인 스튜디오 loci)와 똑같이 완공된 점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옛 공원의 바탕 위에 산뜻하고 날렵하게 삽입된 ‘회랑 라운지’. 회랑의 넓은 그늘과 넉넉한 의자가 모두를 환대한다. 회랑 위 공중 산책로에 오르면 풍성한 숲과 도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오래된 숲에 간결하게 삽입된 ‘숲 라운지’는 공원의 시간감을 두텁게 한다. 빈 의자를 찾기 어려웠다. 스스로 의자를 옮겨 자신의 라운지를 디자인하고 오래 머물며 가을을 즐기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며 공원을 산책하다 여러 번 놀랐다. 공원 디자인과 경관을 품평하는 이들이 곳곳에 있는 것 아닌가. 한 노인은 “공원이 현대식이라 사람들이 공원을 다르게 쓴다”고 말한다. 어느 커플은 “회랑 위 산책로 덕분에 공간이 두꺼워졌다”는 평을 나누며 걷는다. 중학생 몇몇은 “예전 공원도 좋았는데 왜 새로 만들어야 했는지” 토론한다. 이날따라 공간 문해력 출중한 사람들만 모였을 리 없다. 평범한 이용자들이 전문가 못지않은 평가를 하며 공원에 머무는 상황, 뭐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텍스트(공간)의 구성과 형태가 수용자/경험자의 문해력을 높인 게 아닐까. 언젠가 『환경과조경』 지면에서 공간 문해력을 다뤄보기로 마음먹으며 오목공원을 빠져나왔다. 그간 서울과 수도권뿐 아니라 다양한 지역 도시의 조경 문화를 지면에 담아달라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편집위원들과 독자들의 이런 의견을 조금이나마 반영해보고자 이번 호 대구 특집을 기획했다. 특집 ‘대구의 도시 문법, 조경 문화로 읽다’는 대구의 도시 맥락과 경관 특성을 다각적 시선으로 독해한다. 정태영(경북대 교수)은 대구의 공원을, 최이규(계명대 교수)는 골목을, 양진오(대구대 교수)는 원도심을 읽는다. 편집자들이 꾸린 기사 두 편도 함께 엮었다. ‘편집부가 꽂은 대구 책갈피’는 1982년부터 2020년까지 『환경과조경』에 실은 대구 관련 기사를 요약, 소개한다. ‘대구 도시 공간 10선’은 유서 깊은 공원부터 새롭게 떠오르는 복합문화공간까지 주목할 만한 대구의 공간들을 살핀다. 이번 대구 특집을 계기로 본지는 1년에 한두 차례 지역 도시의 공간과 문화, 일상을 탐사하는 지면을 마련해볼 참이다.
  • [풍경 감각] 조각 하늘
    빨간 벽돌 다세대주택과 그 사이로 뻗은 전깃줄이 하늘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고 있었다. 그곳은 대학교 2학년, 틈새 정원 설계 수업의 대상지였고, 내가 살던 동네였다. 이름은 청량했지만, 시원하게 트인 하늘을 볼 수 없었던 곳. 나무를 심는 대신 전봇대보다 높은 곳에 닿는 공중 계단을 놓아보았다. 손바닥 정도의 공간은 예쁜 것도 없이 빙빙 도는 계단으로 가득 차버렸지만, 그곳에 오르면 하늘을 통째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빨간 벽돌 속 작은 방에서 나와 골목골목을 돌아 학교 옥상에 올랐다. 시선 저 끝까지 고만고만한 집들이 밀물처럼 들어와 있다. 그 위로 크고 작은 산이 섬처럼 떠 있고, 하늘은 까만 도자기같이 매끄러웠다. 먼 곳의 가로등 불빛은 공기에 일렁거렸는데, 별이 빛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괜찮아졌다 싶을 때까지 이 풍경을 보고 돌아오곤 했는데, 사실 뭐가 어떻게 괜찮은지는 몰랐다. 귀가 먹먹해지는 걸 모르는 호텔 엘리베이터는 침을 삼키지도 않고 층을 오른다. 모르는 사람들과 루프탑에서 내린다. 맥주를 계산하고 자리에 앉으니, 뜻밖에도 귀뚜라미가 운다. 21층 꼭대기에서 산딸나무와 억새가 살랑인다. 사람들은 작업실 보증금보다 무거운 가방을 끼고 있다. 작업실의 한 달보다 비싼 호텔의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일까. 밤하늘을 보며 이상하게도 오래전의 공중 계단을 계속 빙빙 돌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 [어제의 대화, 오늘의 재구성] 공간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풀어내다 박영석
    신출내기 에디터에게는 특집 ‘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2016년 5월호)에 등장한 사람들이 멀고 신기했다. 나와 그렇게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데, 모두들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고, 먹고 살기 바쁜 나와 달리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고, 무엇보다 굉장히 열정적이었다. 박영석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을 모이게 만들어 놓고 물러나 있었다. 가끔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개입해 농담이나 웃음으로 사람들이 이야기를 털어놓도록 유도했다. 몇 달 뒤 용산공원 라운드테이블 1.0을 이끌게 된 박영석을 인터뷰했다. 주요 골자는 용산공원을 만들기 위해 청년 활동가를 모아 다양한 활동을 벌이겠다는 것이었지만, 내 머릿속에 남은 건 ‘사람’이라는 키워드였다. 그의 말과 목소리에서 사람을 정말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좋은 공간이 필요한 이유도, 좋은 기획을 하려는 이유도, 모두 사람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박영석이 ‘유엘씨 프레스’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열었을 때에도 필진 소개란부터 뒤적였다. 사람을 좋아하는 발행인은 어떤 사람과 책을 펴낼지 궁금했다. 발행인인 그를 에디터로서 인터뷰하러 갈 때 가장 궁금했던 건 “계속해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지치진 않나요?”였다. 스스로 반성을 좀 할 필요가 있어 던진 질문이었는데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지치죠. 하루에 몇시간씩 워크숍 진행하고 나면, 그날 회식 자리에서 말 한 마디 안할 때도 있어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해도 업으로 삼으니 힘들 때가 있더라고요.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듣다 내가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면, 일부러 장난을 치기도 하고 농담을 하기도 해요.” 인터넷에 떠도는 다정은 노력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제는 뭐했나요? 질문지를 처음 받자마자 육아라고 메모했어요. 어제도 어김없이 육아를 했습니다. 요새는 삶이 제가 하는 일보다는 육아에 방점이 찍혀 흘러가는 거 같아요. 아이를 돌보는 일뿐 아니라 그에 관련한 공동체, 공동 육아를 지지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어요. 늘 기획자 역할을 하다가 이번엔 참여자가 되었네요.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나요? 공동 육아를 하는 엄마, 아빠들을 줄여서 ‘아마’라고 해요. 현재 26가구의 아마가 있는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참 많은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수행했는데, 제가 참여 워크숍에서 활동하는 모습은 생경하더라고요. 기획자일 때는 가장 좋은 이상적인 안, 현실적인 안, 경제적인 안, 합리적인 안을 도출하고,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해 대안을 만드는 프로세스를 너무 중시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안을 실천하는 건 해당 커뮤니티에 속한 참여자로서 플레이어인데, 그간 프로세스나 솔루션 그 자체에 더 공을 들인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워낙 다양한 일을 하고 있어서 어떤 질문으로 시작하면 좋을지 고민했어요. 오래 전 이야기부터 해볼까 해요. 석사과정을마친 후 독일 뮌헨에서 도시 공간과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접점을 탐구하려 했다고 들었어요. 일반적으로 택하는 유학 코스가 아니기도 하고, 연구 주제도 독특해요. 학부 때 독일에서 공부하고 온 은사님을 많이 만났어요. 고정희 대표님(써드스페이스 베를린), 정기호 교수님(당시 성균관대학교), 황재선 박사님, 이재문 박사님을 비롯해 일하면서 만난 분 중에도 독일에서 유학한 분이 많았는데 하나같이 비슷한 결이 느껴졌었어요. 독일은 코스워크 없이 스스로 연구하고 탐구하는 식으로 공부를 한다는 게 멋있기도 했고요. 그래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더 공부를 한다면 독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지역으로 알아보다가 뮌헨 공대에 있는 교수님과 연락이 닿아 비행기에 올랐죠. 연구 주제는 석사과정의 연장선이었어요. 석사 때 장소성 재생을 위한 미디어 공간 설계를 모바일 미디어를 중심으로 탐구했거든요. 이미 미디어 아트를 많은 곳에서 접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모바일 미디어가 급격하게 대중화되고 보급되면 개인이 어떤 장소에서 느끼는 감각과 그 방식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어요. 사진과 영상 콘텐츠를 더 쉽게 만들어낼 수 있고 공간이나 시간 제약 없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스마트폰은 신체 감각의 확장기, 도시의 광역적 이해 증진, 인간과 공간의 유희적 인터페이스-새로운 아카이빙 수단이라는 결론을 내렸죠. 어떤 지역이나 공간을 더 광역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했어요. 어찌 보면 평이한 결론인데 그때는 제가 노벨상을 탈 줄 알았어요(웃음). 2011년 무렵, 아이폰이 국내에 처음 출시됐어요. 스마트폰으로 인해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일상에 빠르고 깊게 침투할 거라고 생각했죠. 당시 독일 스마트폰 보급률은 유럽에서 가장 빨리 늘어나고 있었고 관련 기술도 발달해 있어서, 이 기술을 통해 공공 공간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기대했는데 제 예상이 빗나갔죠. 지금 되돌아보니 스마트폰이라는 게 결국 일상생활을 조금 더 편리하게 만들어주고 감각을 확장시켜주는 건 맞지만,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다르게 정의할 만큼 침투하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였는지 연구계획서가 수차례 바뀌었어요. 그 과정에서 다루고자 한 연구 내용도 조금씩 달라졌죠. 연구 주제를 새롭게 바꾸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한국에서 ‘노들꿈섬 운영구상 1차 공모’에 함께 참여해보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죠. 그때가 큰 전환점이 아닌가 싶어요. ‘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 특집에 노들꿈섬 공모 당시 이야기가 실렸더라고요.준비하며 여러 사람을 만났고 “이때의 만남과 대화는 조경가로서 도시를 공간적인 행위만으로 접근하려던 관점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했었죠. 그 변화가 무엇인지 늘 궁금했어요. 관점은 여전히 유효한가요? 당시에도 참여라는 키워드가 중요했고, 도시계획과 공간 계획 측면에서 이용자의 의견이 설계에 반영되는 게 큰 흐름이었어요. 오픈스페이스처럼 공공성이 대두되는 곳은 더욱 더 중요했죠. 노들꿈섬 공모 준비를 함께한 김연금 소장님(조경작업소 울, 이하 모두 당시 소속), 문정석 소장님(소셜디자인랩), 박혜리 소장님(KCAP)에게 많이 배우고 영향을 받았죠. 사람을 만나는 일과 여러 부수적인 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책이나 논문에서 읽은 것을 토론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진짜 사람들을 만나 도시에 대해 대화하고 함께 호흡한다고 느꼈어요. 그 과정에서 깨달은 점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소수의 엘리트가 설계하고 시공하고 관리하는 시대가 저물고 다수의 시민이 함께 이니셔티브를 구축하고 그 과정을 꾸리며 다 같이 무언가를 경험한다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는 거예요. 둘째는 결과적으로 실패할 수 있지만 과정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과정은 실패로 남지 않고 경험이 되더라고요. 지난 번에는 파란색을 많이 써서 이런 결과가 도출되었으니 이번에는 빨간색을 많이 써보자 하는 식으로, 과정 자체가 새로운 이슈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거나 전략이 되어줄 수 있더라고요. 마지막으로, 깊은 고민이나 오랜 연구도 중요하지만 우선 시작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점이에요. 생각은 크게 해야 하지만 작은 실천이 있어야 변화가 시작되죠. 노들꿈섬 공모 팀 이름이자 법인명인 ‘빅바이스몰(Big by Small)’이 그 의미를 잘 보여주죠. 이 관점은 지금도 견지하고 있습니다. 박영석이 하는 일의 핵심은 사람과 사람의 연결인 것 같아요. 특히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이를 풀어내는 일이요. “조 경가로서 공공 공간을 대하는 태도와 접근 가능한 전략을 바 탕으로 도시와 지역, 공간과 장소, 개인과 공동체, 기억과 표 현에 관한 모든 작업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했다”(『환경과조경』 2016년 5월호)고 말한 적도 있죠. 언뜻 쉬워 보이지만 다양한 목 소리를 담고 풀어낼 때 경계해야 할 점들이 있을 것 같아요. 저 스스로를 제일 경계해요. 약속을 잡고 누군가를 만나러 갈 때, 오늘 상대가 풀어내는 거 한 판 다 듣고 오자하고 마음을 다잡죠. 되도록 이야기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요. 사람들은 대부분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에 가득 품고 살더라고요.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것 같은 사람도 어떤 물꼬만 트여주면 술술 이야기를 풀어놔요. 모든 이야기가 영양가가 있는 건 아니지만, 충분히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나면 중요한 알맹이들이 나오기 시작해요. 우리 모두 바쁘게 살다보니 짧은 시간에 콤팩트하게 필요한 것을 뽑아내려 할 때가 많잖아요. 필요한 답변만 취하려 하면 결국 중요한 내용을 놓치게 되더라고요. ‘용산공원 라운드테이블 1.0’ 활동을 흥미롭게 봤어요. 그중 에서도 ‘공원산책’(2017)이 참 좋았는데, 공원을 조경가 혹은 전문가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대중의 관심과 공감은 저 렇게 끌어내는 거구나 싶었거든요. 기획 배경이 궁금해요. 참고한 사례가 있다면요? 2016년에 김연금 소장님과 함께 서울시에서 공원산책이라는 프로그램 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서울의 대형 공원 다섯 군데를 선정하고, 공원 을 설계한 조경가와 함께 걸으면 이야기를 나눴죠. 반응이 열렬했어요. 신청 페이지를 열자마자 30시간도 안되어서 모든 회차가 매진됐죠. 그 동안 왜 사람들을 공원에서 만나 이야기할 생각을 못했나 싶더라고요. 산책을 가기 전 시민들이 공원을 더 깊숙이 여행할 수 있도록 돕는 작업 도 진행했어요. 조경을 잘 모르는 일반 대중은 공원이 어떤 이유로 설계 되었는지, 벤치는 왜 이곳에 설치되었는지, 동선이 왜 이렇게 뻗어있는 지, 바닥 소재는 왜 돌인지 등 공원 설계의 디테일에 대해 알지 못하잖 아요. 공원이라는 공간이 전문성을 갖고 체계적으로 설계되고, 그에 따 른 이론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요. 조경가 역시 자신의 설계 의도를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었고요. 그래서 공원을 설계한 조경가를 먼저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정리해 워크북으로 만들었어요. 그 질문과 답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시민들에게 공원에 대해 설명하도록 했죠. 공원산책이 공원도 설계의 대상이라는 걸 알리는 데 효과가 있었다고 보나요. 결과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고 생각해요. 또 굳이 몰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20대에 겪었던 일인데, 친구를 만나러 가 다가 서울어린이대공원을 지나친 적이 있어요. 도로 한쪽에 차가 줄지 어 서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날이 어린이날이었어요. 그중 한 차에서 자녀와 어머니가 내리는데, 운전석에 앉은 아버지가 “가서 좋은 그늘 하 나 잡아놔”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때 좀 놀랐어요. 사실 우리가 공원이 나 공공 공간을 여러 이론과 전략을 통해 설계하지만, 실제로 이용자에 게 중요한 건 설계 논리보다 자신에게 편안하고 이용하기 좋은 쓸 만한 그늘 하나잖아요. 형이상학적 가치나 공간에 담긴 메시지보다 그 장소 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결국 사람의 기억에 남겠죠. 공원 설계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보다는 어떤 노력과 과정을 거쳐 공원이 만들어졌는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자신의 주변, 동네 공공 공간에 대한 관심이 생길 수 있을 테니까요. 도시와 공원 등 어떤 대상지를 이해할 때 다양한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잖아요. 세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작은 골목 단위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도시 맥락 차원에서 어떤 역할을 차지하는 곳인지에 먼저 집중하기도 하고요. 어떤 순서로 대상지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걸 좋아하나요? 앞서 답변한 공원의 그늘과 맥이 닿아 있는데, 결국 제게 와 닿은 건 장 소라는 개념이에요. 공간과 장소를 바라보는 관점이 굉장히 다양하지 만, 두리뭉실하게 정리해보면 공간은 물리적 경계의 끝이 있고 영역성이 확고하며 규격이 있는 곳이더라고요. 장소는 좀 더 인문학적 측면에 서 사람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거나, 형태가 없는데도 자신만의 감각으 로 인지되는 곳을 칭하기도 하고요. 졸업식을 알리는 현수막을 만들어 야 한다면, 장소와 일시라고 적지 공간과 일시라고 쓰지는 않잖아요. 어 떤 특별한 사건을 겪으며 공간이 나의 장소가 되는 거죠. 그 과정이 좋 아요. 그래서 어떤 공간이나 대상지에 갈 때, 이곳이 나에게 장소가 될 수 있을지 상상해보곤 해요. 반대로 컨설팅을 하러 갈 땐, 이곳을 누군 가에게 잘 팔리는 장소로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고민하고요. 2019년 유엘씨 프레스ULC Press를 창간했죠. ‘창간’이라는 표 현이 적당한지 조금 고민했습니다. 처음 홈페이지가 공개되었 을 때는 웹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을 지향한다 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필진이나 큐레이션 방식도 남달랐고, 영상 콘텐츠도 많았고요. 처음에 구상했던 유엘씨 프레스는 어떤 모습인가요? 가장 먼저 떠올린 코너가 있다면요? 대학원에서 지리학과 이정만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유엘씨 프레스 라는 형태의 플랫폼을 구성하게 됐어요. 그 수업의 모토가 완벽한 발표 가 아니더라도 괜찮으니, 주제와 관련된 자료를 읽고 한 사람당 한 마디 씩은 하고 돌아가자였어요. 서른 명 남짓한 학생이 듣는 강의였는데, 보 통 대학원 수업이면 서로 이야기도 잘 안하고 자기 발표와 질문 답변에 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런데 교수님이 계속 수다를 떨자며 분 위기를 편하게 만들어주니까 한두 명씩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죠. 잡 담처럼 꺼낸 이야기를 다음 사람이 받아주며 점점 두터워지고, 소위 말 하는 담론이 쌓이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템을 찾기도 하고 요. 엄청 흥미로웠어요. 다 같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많은 정보와 의견이 축적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죠. 이후에 같은 연구실에서 공부하던 임한솔 박사와 신명진 박사에게 ‘유엘씨 프레 스’라는 일을 벌여보지 않겠냐고 꾀었어요. 유엘씨 매거진에 꼭 들어가는 꼭지가 라운드 테이블이에요. 필진, 편 집진 모두가 모여 다 같이 대화하는 내용인데, 이 라운드 테이블이 유엘 씨 프레스의 모티브에요. 유엘씨는 어반 랜드스케이프 카탈로그(Urban Landscape Catalog)의 약자인데, 카탈로그에 나름 의미를 두었어요. 물건 을 팔기 위해 제작하는 게 카탈로그인 것처럼, 시민들을 소비자라고 상 정했을 때 도시에서 아직 팔리지 않았거나 또는 잘 팔리고 있는 상품으로서 공공 공간과 경관을 소개하는 잡지를 만들어보자는 의미를 담았죠. 많은 실험을 거치는 중이에요. 요새 잡지 에디터로서 공간을 보여주는 방식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해외 조경설계사무소에서 프레스 키트에 동영상을 포함해 보내는 경우가 많아졌거든요. 유엘씨 프레 스가 최종적으로 만들어내는 결과물 역시 ‘잡지’라는 형태의 인쇄 매체에요. 이야기를 전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글과 사진을 포함한 인쇄물의 형태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소위 영상 우점의 시대잖아요. 이미 영상 콘텐츠가 많은 상태에서 굳이 비슷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플랫폼을 만들 필요는 느끼지 못했어요. 미디어 종 다양성을 편협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영상이 대세가 된다하더라도 저는 텍스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극놀이에 프리텍스트pretext라는 개념이 있어요. 예를 들어, 테이블 위에 놓인 종 이컵이 해적의 망원경이 되기도 하고 인류에 마지막 남은 물을 담은 컵이 되기도 해요. 즉, 무언가를 상상하게 하거나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드는 최초의 물리적 소재를 뜻하는 말인데, 어미에 텍스트가 붙어있듯 이 용자가 개입할 여지를 준다는 점이 글의 성질과 비슷해요. 반면에 영상 이나 사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결된 형태를 제시하죠. 크리에이터가 원하는 곳만을 가장 예쁘게 다듬어서 보여줄 수도 있죠. 글은 좀 더 날 것의 느낌이 나고, 빈틈이 있어서 그 부분을 제 상상으로 채워 넣을 수도 있어요. 또 영상이 아무리 득세를 하더라도 리터러시literacy 측면에서, 공간을 이해하는 문화의 관점에서 텍스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간을 소개할 때 사진이나 영상으로 호도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근데 텍스트는 좀 더 건조하고 단순하기도 해서 오히려 사람들을 더 기대하게 만들고 덜 실망시키는 면도 있어요. 예쁜 사진과 영상으로 공간을 더 빠르 게 팔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는 그 공간의 가치와 의미, 재미를 더 빨리 소진시킨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잡지를 만드는 만큼 인쇄 매체를 읽는 것을 좋아하나요? 좋아하는 잡지나 책이 있다면 소개해주 세요. 『론리플래닛Lonely Planet』이라는 여행 가이드북이 있어요. 한 권에 하나 의 나라나 도시를 다루는데, 독특하게도 사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소 개해요. 대부분의 필진이 여행 작가들인데, 지도에 밥 먹을 곳, 놀 곳 등을 표시해놓고 간단한 설명을 달아놓아요. “이 도시에 와서 이 바에 가지 않으면 이 도시에 오지 않은 것과 같다.” “이 나라에서 이곳만큼 맛 이 뛰어난 핫도그는 없을 것이다.” 이런 문장을 읽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 공간을 떠올리게 되고 당장 가보고 싶어져요. 막상 가서 보니 설명과 다른 경우도 있었지만, 그게 실망이 아닌 경험의 증폭으로 느껴지더라고요. 도시와 지역, 공간 구조를 상상하게 만들고 걸어보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어서 좋아하는 책이에요. 잡지의 경우는 당연히 『환경과조경』을 좋아하고(웃음), 최근에는 공동 육아와 관련된 책을 많이 봐요. 필자와 배경이 다양해서 흥미로워요. 사실 공원이나 정원을 다루는 특집을 꾸리면, 걸어온 길이 비슷한 필자들을 섭외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공동 육아는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아본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에요. 그렇다보니 다양한 관점과 삶의 이야기가 다루어져 재미있어요. 필진 섭외는 어떻게 하나요? 편집위원들과의 회의에서 나온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누구의 글이 좋더라, 이번 포럼에서 발제한 누구의 발표 내용이 흥미롭더라, 하 는 얘기가 들리면 바로 연락을 해봅니다. 아는 사람을 건너 건너면서 필진 풀을 넓히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꼭 조경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분야를 넓게 보며 새로운 글쓴이를 발굴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티클 분류 기준이 숏, 톨, 그란데에요. 커피 사이즈처럼 글 분량에 따라 구분을 했는데 이유가 있나요? 분량에 상관없이 다양한 글을 싣기 위해 나눈 카테고리에요. 숏은 특히 짧은 글도 상관없으니 사람들이 많이 투고해주길 바라며 만든 분류이기도 하고요. 저는 사실 짧은데 울림을 주는 글을 좋아해서 숏 카테고리를 아끼는 편입니다. 기획, 편집, 발간까지 어떤 사이클을 통해 매거진을 만들고 있나요? 분기별로 발행되는 만큼 주제 선정에 공을 들여야 할 것 같아요. 트렌드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지만, 잡지가 완성될 때까지 그 관심이 계속되어야 하잖아요. 유엘씨 프레스 발간 주기가 좀 복잡해요. 봄과 가을에 발간되는 정규호에는 숫자가 붙어 나와요. 단행본처럼 기획되어 발간되는 특별호에는 알파벳이 붙어 나오는데 겨울에 내려고 노력하고 있죠. 발간은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세 달 전부터 준비하는데, 텀블벅이라는 클라우드 펀딩에 기반을 두고 발행하다보니 최소한 한 달 전에는 구성이 확정되어야 하 더라고요. 주제 선정의 경우, 월간지도 시기적인 이슈를 다루지 못하는 상황이 잖아요. 화제가 되는 이야기도 시시각각 빠르게 바뀌고요. 그래서 저희 도 목차를 구성해놓고 계속해서 바꿔요. 처음에는 고정된 섹션을 만들고 유지해볼까 하다가, 4호를 기획하며 조경 분야의 사람 이야기를 담아보자고 마음먹었죠. 그렇게 4호 ‘나의 조경 연구기’에는 조경 연구자 들의 이야기를, 5호 ‘조경 설계가의 하루’에는 조경 설계사무소를 다니는 사람들의 일상을, 6호 ‘조경 시공의 최전선’에서는 조경 시공자가 공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담아 일종의 조경 트릴로지를 만들었어요. 창 간준비호, 정규호, 특별호를 포함해 지금까지 발간한 책이 딱 열 권이더 라고요. 이 시점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어서 가을방학을 갖기 로 했어요. 그 성찰한 내용을 겨울에 나오는 특별호 ULC D에 담을 예 정입니다. 현재는 큰 틀에서 구성을 조정해나가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에게 리뷰만큼 기쁜 일이 없어요. 독자 에게 받은 리뷰 중 기억나는 말은 없나요? “조경을 전공하지 않아 공원에 대해 잘 몰랐는데 알게 되어 유익했다”, “공원과 정원이 이렇게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지 몰랐다”, “조경이 예술 등 여러 학문과 교점이 있어 보인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짜릿했습니다. 미디어 매체가 다변화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반드시 지키고 자 하는 유엘씨 프레스만의 기조가 있다면요? 만들어가는 중이에요. 아직 뚜렷한 색이 있다기보다는 실험을 거듭하고 있어요. 이 실험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어쩌면 안 끝날지도 모르죠. 실험의 중간 결과물을 통해 새로운 실험을 하거나 결과값을 보정하는 일을 계속하려 합니다. 유엘씨 프레스에 쓴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를 기록하는 일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특히 기억이 베어든 장소와 그곳에서 느낀 감상이요. 한 서평에서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을 특별하게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 삶을 두텁게 만드는 새로운 보물창고를 여는 것과 같다”(서평: 일상연습-당신의 일상은 익숙한가?)라는 문장을 읽고 나니 더욱 더요. 이런 성향이 언제부터 발현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릴 적부터 메모광이었어요. 중학생 시절에는 힙합에 빠져서 가사를 쓰기 시작했는데, 일상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좋은 표현을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 늘 주머니에 종이와 펜을 넣어 다니면서 기록하고 꺼내보곤 했어요. 시도 때도 없이 메모를 하니까 함께 성당에 다녔던 동생이 미사 시간에 뭘 그렇게 적냐고 물어보기도 했고요. 요새는 주로 스마트폰에 메모를 하거나, 어느 종이에든 적은 메모를 사진으로 찍어 자료화하는 식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어요. 박영석이라는 이름 뒤에 붙일 수 있는 직함의 종류가 굉장히 다양해요. 대표, 소장, 기획자, 퍼실리테이터, 발행인. 그중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직함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예시로 들지 않은 어떤 단어를 말해주셔도 좋습니다. 다양한 이름으로 활동해왔는데요. 종국에는 ‘커뮤니케이션 디렉터’로 불리기를 바랍니다. 공간과 사람 사이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 또는 풀어 낼 대화들이 있다고 믿고 있거든요. 특히 공공 공간은 조성하고 나면 많은 사람이 이용하고, 그 쓰임은 늘어나는 데 반해 그간의 과정이나 이후의 방향에 대한 소통이 늘 부족하더라고요. 그래서 공간과 사람 사이 대화의 물꼬를 트고 잘 흐를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설계하고 싶어요.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가 궁금합니다. 좋은 선배 같은 아빠가 되고 싶어요. 아이와 친구처럼 지내는 건 어 려울 것 같지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고 맛있는 음식을 사주는, 먼 훗날에는 술을 함께 마실 수 있는 선배 같은 아빠가 되고 싶어요. 아이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좋은 선배가 되고 싶은 마음도 커요. 주변의 좋은 선배에게 도움을 받아왔기 때문에 저 또한 베풀고 싶어요. 요즘 드는 생각 하나를 덧붙이고 싶어요. 가령 예전에는 백 명을 위 한 집을 지었고, 천 명의 끼니를 책임지는 식당이 있고, 일만 명이 오 갈 수 있는 공원을 만들었다면, 최근에는 오십 명 정도의 사람이 이백 끼 정도의 식사를 하고 공원에는 천 명 정도가 다녀가는 것 같아요. 다 시 말해 도시 경관의 이용성이나 유용성, 경험의 결과 폭이 대폭 축소 된 것 같아요.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일 수도 있지만, 생활 방식과 사 람들의 소통 방식이 달라졌어요. 그래서 대동대이(大同大異)라는 말을 열심 히 쓰고 있어요. 도시의 물리적 환경과 일상 공간은 외형적으로 비슷하 지만, 사회적 상황과 대중의 의식은 크게 변한 현상을 빗대어 지어냈어 요. 내 아이가 한창 도시와 동네를 쏘다닐 무렵에는 대동대이 사회가 한 결 성숙해져서 나름의 재미와 흥미로 가득한 도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막연하지만 제가 벌일 수 있는 흥미로운 일들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 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좋은 선배 같은 아빠가 되기 위한 노력 중 하나 일 거예요. 박영석은 성균관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공공 공간 공론화 설계, 놀이 환경 연구, 도시 문화 콘텐츠 기획, 정원 컨설팅 및 소재 연구를 하며 유엘씨 프레스(ULC Press)를 발행하고 있다. 빅바이스몰(Big by Small) 공동대표이자 플레이스온(Place_On) 소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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