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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땅에 쓰는 시
    2024년 봄은 1941년생 여성 조경가, 정영선(조경설계 서안)의 계절이다. 지난 4월 5일, 그가 직조해온 수많은 경관의 설계 도면과 모형, 사진과 영상, 기록과 자료를 한자리에 모은 전시회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24년 9월 22일까지)가 개최됐다. 4월 17일에는 그의 조경 인생과 대표작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감독 정다운)가 전국 주요 극장에서 개봉됐다. “선유도공원, 양재천, 예술의전당 등 내 인생의 중요한 공간들이 정영선 선생님의 손길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운명과도 같았다.” 전작 ‘이타미 준의 바다’(2019)와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2020)를 통해 건축 다큐멘터리스트로 자리매김한 정다운 감독은, “자연의 생명력을 전하고 지키기 위해 줄곧 노력해온 조경가 정영선의 철학”에 큰 감명을 받아 영화를 통해 “자연의 복원과 치유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영화의 주연 역할을 하는 장소는 정영선 조경의 정점인 선유도공원이다. 영화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다시 봄으로 계절을 순환하며 선유도공원의 공간감과 시간성을 포착한다. 영화는 선유도공원을 플랫폼 삼아 계절마다 들고나며 정영선의 다른 작업들, 이를테면 호암미술관 희원, 서울 아산병원, 여의도샛강생태공원, 경춘선숲길,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에 펼쳐진 경관 미학을 재구성한다. 선유도공원은 폐기된 정수장의 구조와 기억을 살린 ‘발견의 디자인’으로 한국 공원 설계의 새 지평을 열었다. 선유도공원에서 우리는 한숨에 다가오는 한강의 풍경과 냄새, 살갗에 와 닿는 서걱한 강바람, 울퉁불퉁한 시멘트 기둥의 생살과 지워지지 않는 물 얼룩의 물성, 옛 시간의 흔적과 새로운 녹색 생명체가 동거하며 빚어내는 경이의 미감을 마주한다. 역동하는 선유도공원의 정동을 담아내면서 영화 ‘땅에 쓰는 시’는 대지에 얽힌 이야기를 읽고 경관의 맥락을 엮는 정영선 특유의 작업 태도에 주목한다. 관객의 시선을 붙드는 또 다른 주연 공간은 정영선의 검박한 들풀 마당이다. 영화는 그에게 위로를 건네는 내밀한 정원이자 야생 풀꽃의 성장을 돌보고 가꾸는 개인 실험실이기도 한 양평 집 마당을 계절별로 관찰한다. 자신의 시그니처 식물 소재인 미나리아재비, 병아리꽃나무, 쑥부쟁이와 대화하는 할머니 조경가의 일상. 이 영화가 아니라면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나는 ‘연결사’라고 보면 돼.” 양평 집 처마 밑 탁자에서 식재 디자인 개념을 파스텔로 스케치하면서 그가 던지는 이 짧은 문장은 자신의 조경론을 요약하는 표현이자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다. “조경가는 연결사”라는 간명한 정의에는 ‘지사(地史)’와의 관계, 시공간적 맥락과의 관계, 주변 경관과의 관계, 도시 조건과의 관계를 연결하는데 남다른 가치를 두는 그의 태도가 압축되어 있다. 연결의 태도는 생각이나 말에 머무르지 않는다. 지형과 식물을 매개로 현실의 경관에 실천된다. 영화 제목으로 쓰인 ‘땅에 쓰는 시’는 관계와 맥락을 읽고 잇는 ‘연결의 조경’의 다른 표현일 테다. 자칫 낭만적으로 해석될 법한 이 표현은 조경가가 젊은 시절 시인을 꿈꾸었다거나 감성적 디자인을 지향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음에 인용하는 정영선의 글 몇 구절에서 우리는 그의 조경이 ‘땅에 쓰는 시’인 까닭을 헤아릴 수 있다. “[경관은] 글자의 선택과 배열, 호흡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시’처럼 세심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환경과조경』 137호, 131쪽).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듯, 우리가 섬세히 손질하고 쓰다듬고 가꾸는 정원들이 모든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치유와 회복의 순간이 되길 바랍니다”(『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 107쪽). 『환경과조경』은 한국조경가협회와 함께 오는 7월 3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조경가 정영선의 삶과 작업을 통해 한국 조경 50년의 성과를 조회하는 심포지엄,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를 연다. 발제문과 토론은 8월호 지면에 담을 예정이다.
  • [풍경감각] 소란한 스크린
    한적할 것 같은 오후 버스에 의외로 사람들이 꽤 있다.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 맨 뒷좌석에 올라 앉는다. 곧바로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켜 친구와 만날 장소로 가는 경로를 비교한다. 지하철로 환승해 빨리 도착할 수 있는 루트와 지금 이 버스를 타고 쭉 가는 느린 방법이 있다. 지하철 배차 시간을 확인한다. 열차를 놓치면 오히려 더 늦을 것 같아 버스에 남기로 한다. 친구에게 도착 예정 시간을 알려준다. 이제야 고개를 들고 버스 안을 찬찬히 살핀다. 바닥에는 햇살이 나른히 내려앉고 라디오 DJ의 웃음이 엔진 소리에 섞여 든다. 승객들은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에 눈을 고정하고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폰을 본다. 알록달록한 게임이 뿅뿅거리고 카카오톡의 노란 말풍선과 인스타그램의 빨간 하트가 오간다. 유튜브 썸네일 속 굵은 글씨들이 손가락을 따라 쭉쭉 미끄러진다. 액정 위로 창밖 풍경이 비친다. 어느새 무성해진 가로수의 녹색 그림자가, 파란 하늘과 하얀 양털 구름이 소란한 스크린 위를 스쳐간다. 예쁜 계절이 와 있었구나. 친구에게 산책을 하자고 톡을 해야지. 다시 휴대폰을 꺼내든다. 노란 말풍선을 보낸 뒤, 습관처럼 인스타그램 피드를 살피고 트위터에 답 멘션을 달고 새로 올라온 웹툰을 본다. 아차, 내릴 정류장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 음성이 들린다. 내 휴대폰 위로 어떤 풍경이 스쳐갔을까. 궁금하지만 나를 향해 달려들던 풍경들은 등 뒤로 질주해버린 다음이다. 하차벨을 누르자 빨간 불이 들어온다. 버스가 멈춰 선다. 계단을 내려간다.
  • 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조경을 흔히 식물을 다루는 장르로 한정하지만, 실은 돌, 물, 철, 유리 같은 유형의 소재부터 빛, 소리, 바람 같은 무형의 소재가 경관을 구성한다. 마운딩, 데크, 루버, 포장 등 소재와 결합된 설계 세부 요소도 빼놓을 수 없다. 소재의 작은 차이는 전혀 다른 공간을 만들어낸다. 재료 그 자체가 때로는 실험적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하는 자극제, 풀리지 않는 문제의 독특한 설계 해법이 되기도 한다. 소재는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공간의 콘셉트와 내용이 되기도 하고, 색다른 구조와 분위기를 만들어 조경의 완성도에 영향을 미친다. 좋은 설계는 도면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조경가는 자신의 창조성을 어떤 재료로 표현하고, 어떤 방식으로 공간에 구현하고 있을까. 차별화된 공간의 한 끗을 만드는 소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소재를 선택한 이유, 재료를 다루는 방식, 그 소재만이 주는 감각, 설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재료 가공 방법, 새롭게 발견한 소재 설계 방식 등 소재와 관련한 경험과 고민을 통해 소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작은 길라잡이를 제공하고자 한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 표면의 부활 _ 장혁준 보이지 않는 바람들 _ 조용준 조경의 웜톤 _ 최영준 물의 모양 드러내기 _ 이호영 경관의 깊이와 질감을 만드는 돌 _ 이형석 철의 선명한 음색 _ 강한솔 공간에 깊이를 더하는 미스트 _ 김용희 나무를 다루는 손 _ 최윤석
  • [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표면의 부활
    포장은 결과물을 지칭한다. 과정의 단어라기보다는 결과의 단어다. 그러므로 설계를 하면서 포장을 따로 떼어내 사고하지 않는다. 후행적으로 납작한 표면의 단단한 일부를 포장이라고 규정할 뿐이다. 이미 단단해진 결과물을 논할 땐 도구적 관점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기능이 무엇인지, 가격은 저렴한지, 공사 속도는 빠른지, 충분히 튼튼한지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유연한 논의가 아닌 딱딱한 정답이 기대되는 질문을 하기엔 포장에 내재된 기능이 아쉽다. 논의를 확장하기 위해 포장이 단단해지기 전으로 돌아가 과정의 단어인 말랑말랑한 ‘표면’을 이야기해보자. 설계 과정에서 표면을 대하는 태도(사실 설계 태도와 다르지 않다)와 물화된 의지의 단편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인류는 인간을 재발견하면서 대성당의 시대를 종결했다. 나아가 데카르트가 영혼의 세계에서 물질의 세계를 분리해내자 주술의 신앙이 아닌 합리적 이성이 세상을 다스리는 근대가 시작됐다. 근대는 구텐베르크로부터 시작된 인쇄술을 날개 삼아 폭발적으로 정보를 교환했고 마침내 계몽의 시대가 도래했다. 근대는 실로 괄목할 만한 과학적 발견을 이뤄냈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은 더 이상 의학의 참고서가 아니라 관찰과 이해의 대상이 됐다. 산과 바다는 두려운 미지가 아니라 정복의 대상이 됐다. 인류는 지구와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진보의 미래를 꿈꾸었다. 근대가 선사한 이성이라는 빛은 프로메테우스의 불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근대의 마지막은 전쟁과 독재였다. 인류라는 함선의 등대 같았던 빛은 실로 화염이었다. 옛날이야기를 한 이유는 지구를 뒤덮었던 화염의 불씨가 우리의 일상 공간과 더 나아가 표면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성, 정확히 말해 도구화된 이성은 공간 영역에서도 과학적 합리성과 효율성을 제일의 가치로 설정했고,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지역, 신화, 개인, 역사, 전통, 장식, 감정, 자연과 같은 것들을 거세시켰다. 그리하여 도시는 자동차를 연료로 하는 기계가 됐고 주거는 아파트라는 화폐가 됐다. 그리고 우리가 딛고 있는 표면은 한 변이 200mm인 정사각의 투수형 콘크리트 블록으로 수렴하고 있다. 사실 콘크리트 블록은 잘못이 없다. 싸고 제작이 쉬우며(그러나 다른 규격을 쓰긴 어렵다. 물량이 많지 않은 이상 새로운 규격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시공이 쉽고 빠르다. 게다가 물 순환에 도움을 주지 않는가. 나쁜 게 하나도 없다. 단지 두려운 것은 이 합리성 뒤에 숨은 폭력이다. 감성을 미천한 것으로 취급해온 근대의 불씨가 표면에도 남아 있다. 콘크리트 블록은 정답이 되어가고 있다. 인구의 60% 이상이 아파트에 살면서 똑같은 표면을 걷는다. 공간은 행동을 지시한다. 남들과 다른 것을 참지 못하는 지금 한국 문화에 대해 표면의 도플갱어들도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도구적 이성이 다스리는 사회에서 대중문화는 필연적으로 비참해진다고 했다. 내일의 표면은 오늘보다 슬퍼져야만 하는 것일까. 연약한 개인이자 공간 문화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전투원으로서 내일의 표면을 상상하며 소소한 저항을 시도하고 있다. 합리적 설계안과 재료에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 그다지 이성적으로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원탁 위에 함께 올려두자, 스테인드글라스가 강화 유리로 진화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우리 주변엔 쓸데없어 보이지만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이 많다. 직물을 모방한 화강암 집합 주택인 에테르노 청담의 표면은 카펫이다. 운 좋게 서울 초호화 집합 주택 프로젝트 몇 가지를 연달아 하게 됐다. 그 중 두 번째 프로젝트가 에테르노 청담이다.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가 건축에 참여했고 아이유와 송중기가 분양 받았다고 해 세간에 오르내렸던 곳이다. 물론 수백 억의 분양가가 더 큰 화제가 됐지만. 설계를 시작하고 기존 도서들을 확인해 보니 생태 면적 확보를 위해 지상 모든 표면이 투수형 콘크리트 블록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이걸 걷어내지 않는다면 화제성에 걸맞은 표면을 선사하기 어려워 보였다. 표면을 제외하고 생태면적률을 높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검토했다. 먼저 건축과 토목 분야에 간절한 호소문으로 협조를 구해 각자 영역에서 마른 수건을 짜내 최대한의 점수를 선물 받았다. 그리고 분양자들에게 사전 고지를 하고 분양된 각 세대의 테라스와 옥상 녹지까지 포함한 모든 종류의 녹지를 법이 요청하는 면적으로 삽입해 겨우 자유로운 표면을 만들어 냈다. 상상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초호화 주택의 조경에 대해 조금 솔직히 말해 보자면, 사치품이다. 학계와 산업의 최전선에서 외치고 있는 도시의 역할, 나아가 전 지구적 기후위기의 구원자로서의 역할이 명품백 구매의 이유가 되긴 어렵다. 물 순환과 탄소 순환을 위해 수억 원을 들여 정원을 조성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이용률이 높지도 않고 특별한 기능이 있지도 않으니 말이다. 명품백은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고 싶어 사는 것이다. 아름답고 누구나 쉽게 가지지 못하는 물건을 당신에게 선사한다는 게 여기에선 더 중요하다. 타 분야에 협조를 구할 때 이런 식으로 말했다. 걸어 다닐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한 번을 걷더라도 그 한 번의 경험이 우리 집 정원의 인상을 좌우할 수 있지 않을까. 근대는 개인적 취향이 깃든 사치품을 필연적으로 사멸한다 했지만 과거의 낭만적인 사치품이 지금의 예술품이 되지 않았는가. 사치품은 잘못이 없다. 가능성을 닫아버린 우리의 오만함을 되돌아볼 시간이다. 사실 처음부터 화려한 카펫을 깔고 싶었다. 카펫은 중동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실내 온기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으나 권력과 무역의 발달에 힘입어 예술적 가치를 얻게 됐다. 레드카펫은 도구가 아닌 상징이다. 카펫에 내재된 아우라를 장소화하고 싶었다. 넓은 외부에 진짜 카펫을 깔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직물이 갖는 패턴과 섬세한 디테일을 두 종류의 석재로 번안했다. 큰 면적에서 읽히는 패턴을 짜고 직물을 자세히 볼 때 눈에 들어오는 실 한 올의 유려함까지 번안하기 위해 5cm 폭의 얇은 돌을 패턴 사이에 교차시켰다. 남은 과제는 어떤 실을 사용해야 하는가다. 국내에서 흔히 쓰이는 화강암은 대부분 회색톤이다. 어디에나 무난하게 어울리고 때도 덜 타며 비교적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다. 건축 외장으로 사용된 흰색 세니아 스톤을 보니 내 직관은 초록색 카펫을 떠올렸고 석재상에 초록빛이 나는 화강암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2주가 지났을까, 저 멀리 북유럽에서 건너와 은은한 초록빛을 발사하는 화강암 샘플이 사무실로 도착했고 곧이어 현장에도 깔렸다. 에테르노 청담의 카펫은 그렇게 석화되어 물건에서 장소가 됐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장혁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도시조경설계연구실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짓기 욕망에 충실하고자 조경을 하고 있다. 이야기와 형태의 합주에 관심이 많다.
    • 장혁준
  • [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보이지 않는 바람들
    누구나 설계 과정에서 바람에 대해 한번쯤 고민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은유적 경관을 위한 소재로, 때로는 미세먼지, 미기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람은 보이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예측이 어렵다. 바람의 특성을 잘 아는 것이 필요하지만, 잘 파악한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2018년 72시간 도시생생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바람 때문에 난감했던 경험이 있다. 상가 일대에 위치한 면적 120m2의 작은 대상지는 요란한 간판들과 관리되지 않는 녹지와 포장 상태 때문에 편안하게 쉴 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중앙에 자리 잡은 느티나무 정자목 앞에는 눈꽃 조형물이 달린 조명 구조물이 계절과 동떨어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주변의 어지러운 풍경을 가리기 위해 눈꽃 조형물을 철거하고 노란색 아크릴 소재의 블라인드 스크린을 달았다. 그런데 이 스크린이 바람이 세질 때마다 심하게 흔들려 대상지가 잘 보이는 카페에 앉아 계속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한번은 자리를 비운 사이 강한 바람으로 일부가 파손되기도 했다. 대상지를 관찰하며 바람의 세기에 따라 움직임의 정도를 파악하게 됐고, 이를 기록하면서 바람에도 다양한 명칭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골칫거리가 관심거리로 바뀌게 되었다. 바람을 표현하는 매체들 바람은 대기의 흐름이다. 대기의 흐름에 반응하는 매개체만 있다면 바람을 시각화할 수 있다. 그래서 매개체는 바람에 움직일 만큼 충분히 가벼워야 한다. KT 디지코 가든에 설치한 윈드 웨이브에는 3×5cm 알루미늄 소재의 작은 패널이 달려 있다. 패널의 무게는 매우 가벼웠고, 패널 상단에는 패널을 고정하면서도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고안한 장치를 설치했다. 3,000개 패널들이 움직이면서 바람의 흐름을 연출하는데, 다이내믹한 경관을 연출하기 위해서는 패널의 전체 흐름이 느껴질 수 있는 꽤 넓은 면적이 필요하다. 이 부분은 설계자의 의도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구조물이라 공사비 예산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초기 제안에서는 필로티 하부의 꽤 넓은 면적을 스크린으로 가리면서 내부에 시크릿가든을 제안했다. 높이 8m, 폭원 30m 정도였는데, 현재 조성된 규모와 비교할 때 4배 정도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결국 공사비 여건을 반영하여 환기구 주변으로 규모를 축소해 설치했다. 또 매개체의 소재가 바람의 세기에 어느 정도 저항성을 가져야 한다. 너무 가볍거나 파손이 쉬운 소재는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에 적합지 않다. 2009년 반포한강공원을 조성하면서, 반포대교 교량 하부의 경관을 개선하기 위해 교각을 따라 곡선형 철판을 설치했다. 그런데 한강의 강한 바람으로 인해 철판이 결국 구겨져 못쓰게 됐다. 꽤 두꺼웠다고 생각했는데 한강의 거센 바람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작년 반포한강공원 내 물방울 놀이터를 조성할 때 침수와 바람 부분을 특히 많이 고민했다. 놀이 공간 중심에는 높이 3m의 7개 마법 지팡이(각주 1)가 있는데, 상부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철판에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풍향계처럼 돌아가는 7개 철판은 미스트와 함께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로 연출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는 게 좋을지 고민이었다. 새겨진 글자를 읽을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무게가 있는 철판으로 디자인했다. 다행히 작년 겨울철 한강의 강한 바람에도 잘 버텼지만 생각만큼 많은 회전이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조용준은 서울시립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CA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으로 새로운 광화문광장 기본 및 실시설계를 이끌고, 워커힐 더글라스정원 기본 및 실시설계, 이스탄불 하천 회복 프로젝트, 종로구 통합청사 설계공모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개인 자격으로 즉흥적인 기획, 전시하지 않는 그래픽 작업 등을 즐기기도 한다.
  • [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조경의 웜톤
    우리 발밑에는 데크가 많다 동네 뒷산을 오르는 길도 데크, 캠핑장에서 텐트를 치는 바닥판도 데크, 잠시 쉬러 가는 옥상과 테라스에도 데크가 있다. 데크는 우리 발밑에 널려 있다. 항만 분야에서 갑판을 칭하는 용어에서 유래된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실외의 특정한 높이에 만들어진 평평한 판을 뜻하지만, ‘목재’ 데크를 대신하는 말이라 할 정도로 목재 소재의 데크가 대중화됐다. 목재 널판의 연속된 마감이 주는 자연스러운 갈색 결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말이 된 지 오래다. 데크는 때로 수직으로 서 있다. 건물 외벽을 마감하기도 하고, 목재로 된 펜스는 데크가 서 있는 꼴이다. 루버 또한 목재로 된 부재의 연속된 마감이 주는 나뭇결의 질감이 기본이다. 차이점은 띄어진 널판 사이 간격에서 강조되는 평행선의 질서가 세련된 정연함을 강화해주고, 그 벌어진 간극에 드리우는 명과 암의 균형이 깊이감을 부여한다. 따뜻하고 가벼운 비바람과 사계절의 매서움을 견뎌야 하는 외부 공간에 무언가를 만들 때, 목재 면은 조경의 유일한 ‘엉뜨(엉덩이를 따뜻하게 해주는 기능)’ 옵션과도 같다. 열전도율이 낮은 목재는 여름엔 평상처럼 시원하고, 겨울엔 피부를 접촉할 만한 유일한 조경 소재다. 난간 등의 손스침과 벤치의 상판이 목재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부에 닿기 전부터 목재 데크의 온화한 나무색 톤이 시각으로 다가오고 만지면 더욱 편안한 감각을 준다. 데크는 가볍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적으로 무겁지 않다. 옥상에서 데크를 자주 만나는 이유가 비중과 경도가 큰 하드우드가 석재나 콘크리트 등 여타 조경 재료에 비하면 훨씬 가볍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에서 따뜻하고 가벼운 데크는 조경 팔레트에서 웜톤의 큰 축이 된다. 상하이 쇼핑몰 옥상부에 덮어야 할 시설이 있어 중부를 높인 데크 면과 기준면을 잇는 도구이자 편안한 라운지 의자가 되기를 의도했던 옥상 정원의 한 가구는 편안함에 신남이 더해져 미끄럼틀로 더 잘 쓰였다. 가구 단면의 유선형이 한몫했지만, 넓게 드러난 목재 면이 주는 온화한 감각이 기여한 바가 더 컸다. 살짝 비트니 살짝 설렜어 널(판), 장선, 멍에는 데크를 구성하는 구조적 삼요소다. 장선과 멍에를 엮은 데크 하부의 가지처럼 뻗어 있는 격자형 구조를 하지라고도 한다. 최하단에 멍에가 기초 구조를 잡고, 그 위에 장선이 멍에와 직교 방향으로 깔리고, 직교 방향으로 널판이 깔린다. 장선은 널 바로 아래에서 데크 면을 고정시키는데, 널판 표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박힌 결합나사못, 소위 피스 자국들은 그 아래 장선의 자취를 드러낸다. 일반적인 데크 면은 하지 구조 질서의 한 방향으로 평행하게 뻗어가는 ‘데크 깔기’라는 방식으로 깔리며, 널판이 펼쳐져야 하는 구조를 최적화하고 비용과 공기를 모두 고려할 때 합리적이다. 데크 길과 같은 좁은 영역에서는 한 방향의 반복과 수평 확장이 문제가 없지만, 넓은 영역에서 단 방향의 반복은 단조로운 공간이 되기 십상이다. 체커보드 패턴이나 헤링본 같은 무늬 배치의 고려도 필요하다. 무한한 반복성을 수평적 확장의 도구로 활용한 장소가 일본 나오시마 예술 섬 베네세 하우스(Benesse House) 앞 수변 데크다. 수평선을 향해 곧게 뻗은 널의 평행선은 데크 면을 해수면과 동등한 위치로 느끼게 한다. 데크 깔기의 각도를 중간에 한두 번만 살짝 비틀어 주거나 서로 다른 두 각도의 시작을 교차시키면 살짝 설레는 지점에 도달한다. 작은 개인 프로젝트에서 널 방향을 지그재그로 비트는 디테일을 제안했다가 데크 기술자에게 노여움을 잔뜩 샀다. 한 번의 작은 회전으로 만족해야 했던 기억도 있던 반면, 적극적인 회전과 조합으로 기대 이상의 감각적 효과를 만든 적도있다. 데크 면의 질서가 만드는 결의 무늬로 조합할 수 있는 패턴과 중첩은 예상 못 할 새로운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최영준은 조경설계를 가르치고 조경 디자인의 성능을 연구하는 교수지만, 정체성의 중심에는 외부 공간을 그리고 만들어가는 조경가가 자리한다. 매년 다시금 찾아가고 싶은 장소를 하나씩 만들어 이웃과 공유하는 기쁨을 위해 설계하고 짓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 [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물의 모양 드러내기
    물은 상당히 동적이다. 조금만 기울어져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흘러가버리기 때문이다. 물은 스며들고 흐르기 마련이라서, 자연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물은 사실 멀리서 바라보는 바다와 호수가 아닌 이상 찾기 쉽지 않다. 그래서 고요한 리플렉션 폰드나 인피니티 풀은 우리에게 생경한 경관이고, 많은 조경가가 그 경관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는 물의 수평성만을 보여준다. 물의 동적 특성을 잘 볼 수 있는 곳은 계곡이다. 빠르게 흐르고 떨어지고 휘감아 돌아가고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다가 어느새 느려지기도 하고 자갈 위를 스치듯 흐르는 다양한 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계곡을 바라볼 때, 물 자체보다는 계곡을 이루는 지형, 암반, 식생 등 전체적인 공간과 경관으로서 인식한다. 그래서 아파트 조경으로 계류를 만들 때는 물의 다양한 동적 특성을 전달하기보다는 계곡의 바위와 식생같은 자연 요소를 미니어처로 구현해 경관 경험을 전달하게 된다. HLD에서 최근 만든 몇 개 프로젝트는 물의 순수한 본연의 특성, 질감에 더 집중하려 했다. 전달하려 한 물의 경험은 계곡, 폭포, 연못 같은 자연을 재생하는 방식의 경관 경험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를테면 계곡의 경관을 떠올리게 하기보다는 물의 역동성을 느끼게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직접 목격하며 좋다고 느꼈던 수경 시설을 몇 가지 이야기 해보자면, 미국 보스턴 노스엔드 공원과 뉴욕 하이라인에 흐르는 얕은 물이 있다. 2% 정도의 경사가 있는 포장면 위에 5~10mm 두께의 얇은 물이 요동치지 않고 깨끗하게 흐르는데, 손으로 만지거나 발을 담그면 바로 물이 갈라지면서 역동성을 드러낸다. 사람이 들어가지 않으면 정적으로 주변 경관을 거칠게 반사시키고, 사람이나 나뭇잎이 수면에 닿는 순간 동적인 속성을 보여준다. 도시 환경에서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쾌적함,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한 성공적인 물의 설계다. 20년 전쯤 봤던 시드니 올림픽 공원의 대포 분수도 잊을 수 없다. 하그리브스가 설계한 이 물은 스펙터클하다고 할 만큼 강한 에너지를 보여준다. 자연에서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데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냥 경관의 일부로 여겨진다. 이 대포 분수가 뿜은 물 역시 완벽하게 물리 법칙을 따르며 10m가 넘는 궤적을 따라 물방울을 흩뿌리지만, 짧은 순간 굉장한 재미를 준다. 뉴욕 그라운드 제로에 있는 메모리얼의 물도 감동적이다. 물의 소리, 시각뿐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면 부서져 부유하고 있는 작은 물방울들이 몸에 닿으며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시각, 촉각, 청각을 다 자극한 공감각적인 물의 활용이다. 스위스에서 방문했던 프리트호프 회른을리(Friedhof Hörnli) 묘지의 물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계절은 낙엽이 모두 지고 황량함이 느껴지는 겨울이었다. 묘역으로 올라가는 경사진 길의 한쪽에 덮개가 없는 콘크리트 배수로를 따라 물이 졸졸 흘러 내려온다. 만약 그 물 요소가 없었다면 묘지라는 점 때문에 축 가라앉는 일관적인 감정밖에 들지 않았을 텐데, 계속 들려오는 물소리의 경쾌함이 공간의 감각적 균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간 여러 설계 프로젝트에서 물을 다뤘다. 도쿄 오테마치원 정원에 있는 수경 시설처럼 디테일을 아주 치밀하게 고민해야 하는 훈련을 하기도 했다. 화성 동탄 국제작가정원인 워터리본은 캐서린 구스타프슨과 그가 이끄는 GGN과 함께한 작업으로, 그 과정에서 물의 강력한 잠재력을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적 측면을 배웠다. 특히 수로의 기울기 변화에 따른 물의 속도와 물결의 변화를 테스트하는 과정과 수로를 구성하는 수천 개의 석재 가공을 위한 스터디를 통해 새로운 노하우를 쌓을 수 있었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이호영은 고려대학교에서 원예학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을 전공했으며, 조경설계 서안, 미국 에이컴(AECOM), 오피스 ma(officema)에서 조경과 도시설계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조경설계사무소 HLD를 설립해 광범위한 분석과 접근 방법을 통해 대상지의 공간적 가치를 향상시키고, 그 장소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인문·사회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해법을 제공하고 있다.
  • [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철의 선명한 음색
    조경과 조형 설계를 얼마나 드러나게 할 것인가 혹은 얼마나 드러나게 하고 싶은가에 대한 입장은 설계자마다 미묘하면서도 확연하게 다르다. “자연스럽게 해주세요”라는 말은 조경가가 가장 많이 요청받는 표현이다. 결코 쉽게 정의될 수 없는 자연, 자연주의라는 단어가 동시대의 흐름 속에 묘하게 자리 잡은 모습도 보인다. 물론 모든 설계가는 프로젝트의 성격과 본인 앞에 놓인 상황에 따라 자연스러움의 농도를 달리 할 것이다. 그럼에도 조경을 대하는 근간의 입장이 꽤나 확고함을 인지한 순간이 적지 않다. 하물며 자연스러운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마치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자연스러운 자연의 모습을 구축하는 방식에 대한 선호가 적지 않다. 나 역시 의도적으로 그러한 설계를 하는 경우가 꽤나 있다. 다만 공간을 방문한 사람에게 이곳이 누군가의 의도로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점을 인지시킬 수 있는 방식을 조금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조경 공간에서 설계가의 의도와 개입을 표현하는 효과적 수단 중 하나는 조형이다. 내게 조형은 직선이냐 곡선이냐 비정형이냐를 가르지 않고 포괄하는 것이다. 본연의 자연에서는 보기 어려운 디자인적 조형을 사용하는 것은 천연의 자연과 조경의 작업을 차별화하는 데 효용이 크다. 식물이라는 가장 든든한 소재를 등에 업고 있음을 잘 알고 있고 식물 자체로 조형을 빚어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식물과 조합해 사용하는 의도적 조형은 조경가의 손길이 닿았음을 알리는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 그 조형은 돌이나 콘크리트, 목재, 철 등 다른 소재와 만나 각 공간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중 철은 꽤 목소리를 잘 내는 소재다. 대비의 소재 철은 차갑고 단단하며 이지적이다. 조경이라는 분야가 지닌 전반적 심상을 떠올릴 때나 조경이 다루는 식물이라는 소재를 함께 고려했을 때, 철은 많은 측면에서 조경이 내포한 이미지의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하다. 돌이라는 소재가 철과 어느 정도 유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철이 조금 더 먼 지점에서 본연의 특성을 발현하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철은 자연 소재이지만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모습이 되려면 일련의 가공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지점에서 철의 고유한 특성이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태생적으로는 자연물이지만 자연스럽다는 표현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소재인 것이다. 그렇기에 조형과 연계해 설계 의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주는 소재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철은 특히 식물과 함께 사용했을 때 가장 즉각적인 대비의 효과를 자아낸다. 바람이 일어 나뭇잎과 가지가 서서히 흔들릴 때에도 철재 요소들은 그 곁에 굳건히 서 있다. 손가락 틈으로 빠져나가면서 느껴지는 식물 특유의 부드럽고 포근한 질감과 달리, 만지지 않더라도 알고 있는 철재의 차가운 표면은 이미 반대의 지점에 위치한다. 식물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감상과 낭만을 선사하지만, 철로 만든 무언가는 고정된 상과 함께 프로젝트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명료하게 전달한다. 병치와 대비를 통해 한 장면의 조화를 구상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철재는 그 구상을 가장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소재 중 하나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강한솔은 현대 도시를 만들어가는 건축, 조경, 도시재생, 문화 기획에 기반을 둔 디자이너 그룹 얼라이브어스(ALIVEUS)의 조경가다. 대규모 어바니즘부터 중소 규모 공간에 이르기까지 조경 디자인 실무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해왔다. 도시 공간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바탕으로 큰 아젠다와 세심한 디테일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
  • [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경관의 깊이와 질감을 만드는 돌
    돌을 잘 아는 친한 몇 사람이 있다. 이들은 자신을 자칭 돌쟁이라 일컬으며 돌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다. 이들을 알게 시점이 카스카디아 CC를 설계하며 이끼와 돌을 가지고 씨름할 때였다. 발주처는 늘 세상에 없던 것, 단 하나뿐인 경관을 요구한다. 그에 걸맞은, 세상에 없던 설계비를 주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새로움에 대한 짜릿함은 언제나 과한 도전정신과 창조의 고통 사이로 나를 내던진다. “멋진 거 한번해 보죠”라고 큰소리치고 온 마당에 뭔가 해내야지 어쩔 수 없다. 바로 이 세상에 없던 걸 만들던 시절, 나의 구세주 돌쟁이들이 돌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국의 돌은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한 패턴을 보이고, 특히 절단면이 자아내는 신비로움이 엄청난데 이를 바로 보여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 애추사면(바위가 부스러져 쌓인 돌더미의 사면)에 대한 과도한 집착까지 보이기도 한다. 역시 한국인은 돌을 좋아한다며, 돌에 대한 예찬은 밤새 술잔을 기울여도 끝이 나질 않는다. 덕분에 나는 원하는 돌을 구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던 불안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돌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카스카디아 CC는 자연의 압도적인 힘에 인간이 도전하는 상징적 공간이다. 조경 콘셉트는 태초의 자연이었다. 거침없는 암석과 땅의 지형, 지질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 자연을 향한 경외심을 느끼게 하고 한편으로는 두려움의 존재가 된다. 여기에 도전하는 골퍼들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 때 느끼는 쾌감은 가히 독보적일 것이다. 진입 도로에서부터 클럽하우스까지 펼쳐지는 조경은 인간이 만들어낸 피조물과 조화를 이루어 자연을 회복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장엄한 바위, 이끼, 안개, 거대한 팽나무와 느티나무로 표현한 태초의 자연은 클럽하우스 건축의 절제된 디자인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대비된다. 곳곳에 조성한 정원은 홍천 숲속의 감동을 이용객에게 전한다. 고목, 이끼, 안개, 숲속을 연상시키는 식재, 암석 등으로 자연의 신비와 편안함을 표현했다. 세 개 골프 코스의 조경 콘셉트는 돌, 물, 나무(숲)였다. 부지의 암반 지형을 그대로 드러내 표현한 거친 암석 경관은 카스카디아의 도전정신이고, 케이브 폭포를 따라 내려오는 7단 폭포에서 퍼지는 생명의 기운은 카스카디아의 역동성을 상징한다. 구만산 수림대를 받아들여 코스 내로 연계한 트리 코스는 자연에 순응하는 카스카디아의 철학이다. 거친 대지의 틈에서 생명이 움트는 형상을 구현하기 위해 수많은 돌과 인조암을 사용했다. 이렇게 많은 돌을 설계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덕분에 나와 돌쟁이들은 강원도 산골에서부터 전라도 하천까지 전국을 돌며 적당한 돌을 구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이형석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풍경디자인, 현대건설, 해안종합건축사사무소를 거쳐 오지영 대표, 김건영 실장과 함께 본시구도를 열었다. 환경이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킨다고 믿으며, 지금보다 더 나은 꿈을 꾸며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조경을 인간의 생활과 삶의 터전을 바꿀 수 있는 직접적인 작업이자 세상을 바꿀 힘으로 여긴다.
  • [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공간의 깊이를 더하는 미스트
    시각적 깊이, 기능적 깊이, 내용적 깊이 촉촉한 안개를 뿜어내는 미스트는 조경 공간에 다양한 종류의 깊이를 만들어 낸다. 미스트가 공간에 부여하는 ‘시각적 깊이’는 다양한 공간의 켜를 보여주는 스크린이다. 식물, 바위, 점경물, 사람 등 공간 속 크고 작은 개체 사이에 스며들어 공간에 다양한 깊이가 있다는 걸 알게 해준다. 미스트의 ‘기능적 깊이’는 생물 공간으로서 가진 생태적 기능과 인간 활동 공간으로서 가진 체험적 기능을 말한다. 미스트의 수분은 공중 습도에 영향을 받는 식물과, 수분을 필요로 하는 나비와 같은 작은 곤충에게 훌륭한 서식 환경을 만든다. 갑자기 뿜어 나오는 미스트는 정원을 걷는 사람들에게 시원함, 신비함, 청량함 등 다양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미스트는 특별한 이야기와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서사적 도구로서 공간에 ‘내용적 깊이’를 더욱 짙게 만든다. 다양한 시도 조경설계를 하면서 다양한 시설, 식물, 공법을 시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2018년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의 작은 녹지대 정비 설계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 안개 시설을 현장에 우연히 접목한 게 미스트를 설계에 활용하는 계기가 됐다. 우리가 설계한 작은 녹지대 주변에 여름철 관람객에게 시원함을 제공하기 위해 미술관에서 자체적으로 미스트 시설을 설치했다. 미스트가 관람객뿐 아니라 식재 공간에도 다양한 시각적, 기능적 영향을 미치는 걸 보고 그때부터 설계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스트를 설계 단계부터 반영한 첫 작업은 2021년 해운대 수목원 생명의 숲 프로젝트다. 임시 개장을 앞둔 해운대수목원에 새로운 숲 체험 방식을 제공하기 위해 설계를 진행했다. 수목원에 다양한 식물이 어우러진 숲속을 걷는 체험을 제공하고,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수목원의 정체성을 전달하는 특별한 경험 요소를 담고자 했다. 촉촉한 안개와 함께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는 정원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다. 흐린 날, 맑은 날, 바람 부는 날 흔히 조경 공간에 미스트를 적용할 때 낮게 깔린 안개 사이를 걷는 분위기, 바위와 야생화 사이에 안개가 스며들어 만들어지는 여려 겹의 스크린 효과 등을 기대한다. 하지만 정작 연출된 장면은 생각과 다른 경우가 많다. 특히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야외의 열린 공간의 안개가 생각보다 금방 사라지고, 안개의 일정한 영역 유지가 힘들뿐더러, 수분 입자들이 제각각 갈 길을 찾아서 공중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날씨의 영향을 덜 받기 위해 미스트 발생기를 조작해 수분 입자를 무겁게 만들면 뽀얀 안개의 느낌이 만들어지기 전에 미스트들이 물방울로 결합된다. 바람이 불지 않는 맑은 날에는 원하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연출되지만, 그마저도 건조하거나 고기압일 경우에는 물 분자가 금세 증발되고 공기 중으로 산란된다. 차분하게 낮게 깔린 안개가 오래도록 지속되는 때는 저기압의 흐린 날이나, 아침과 저녁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안개가 깔린 분위기 좋은 풍경을 담기 위해 이른 아침이나 해가 저무는 시간을 염두에 두고 설계하지만, 정작 안개를 즐기는 아이들은 빠르게 사라지는 안개를 잡기 위해 허우적대거나 물 분자가 피부에 닿는 체험 자체를 즐긴다. 그래서 미스트는 흐린 날, 맑은 날, 바람 부는 날, 태양이 사선으로 비추는 때 등 시간마다 특별한 경험을 제공해준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김용희는 동아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CAT 조경설계사무소 소장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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