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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식물에게
    조경의 특징 중 하나는 살아 있는 재료, 식물을 다룬다는 점입니다. 식물은 참 재미있는 소재입니다. 자라나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다시 지며 공간에 변화를 만들어내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합니다. 굵어지는 줄기와 점점 높아지는 수목의 캐노피는 세월의 적층을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식재가 조경설계의 핵심이라고 이야기하고, 어떤 이는 식물은 설계에 더해지는 요소일 뿐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공간을 만드는 조경가에게 식물은 어떤 존재일까요?” 이 물음을 토대로 식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내게 영감을 주는 식물, 좋은 나무를 고르는 법, 모두가 말리겠지만 꼭 한 번 써보고 싶은 수종, 식재 과정에서 겪었던 웃지 못 할 에피소드, 잘못된 식재 사례 바로잡기, 조경에서 식물은 꼭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 등 식물과 얽힌 다채로운 글감을 여덟 명의 조경가에게 건넸습니다. 식물에 대한 조경가들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신선하게 가 닿기를 기대합니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 식물의 가치를 설계 언어로 번역하다 _ 조혜령 불가피한 난제, 불가능한 애도 _ 허대영 식물의 감 _ 최재혁 아름다운 공간을 지키기 위한 고민 _ 박경탁 조경가, 식물을 얼마나 잘 알아야 할까 _ 이해인 나의 디자인 중심 _ 김태경 조경가와 식물, 조경가의 식물 _ 박주현 식물의 가치를 만드는 법 _ 김수린
  • [나의 식물에게] 식물의 가치를 설계 언어로 번역하다
    이성과 감성 사이 조경가에게 식물은 어떤 의미인가. 순간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영화화한 ‘이성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이 생각났다. 두 주인공 가운데 언니 엘리너는 침착하고 바른 판단을 중시하는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동생 메리앤은 열정에 자신을 맡기는 ‘감성’을 대변한다. 이들은 각기 힘든 연애를 겪으며 자신에게 부족한 일면을 보완할 기회를 만들어가고 결국엔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식물을 다루는 조경가의 역할과 입장은 어때야 할까. 식물의 이름과 특징 등 개체적 탐구로부터 확장해(각주 1) 첨단 소프트웨어와 장비로 대상지의 자연(식물의 집단)을 분석하고 데이터를 도출한다. 하지만 조경계획과 설계라는 직무 특성상 이를 바탕으로 이용자의 미적 경험을 상상하는 작업은 식물을 다루는 조경가의 기초이자 목표다. 조경을 과학과 예술이 융합된 실천적 종합 예술이라고 하지 않던가. 조경가는 이성과 감성 사이를 넘나들며 식물의 가치를 설계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한다. 조경 디자인 매체로서 식물 조경가에게 식물은 지형이나 바위, 물과 같은 자연 요소 중 하나다. 살아 있는 자연의 재료를 다룬다는 의미는 유사 분야의 직무와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낮과 밤, 날씨와 계절, 지형과 고도, 곤충과 동물 등 식물과 관계되는 모든 현상의 시공간적 함수가 추가된다. 단순히 식물이라는 재료를 나열하는 행위는 지양해야 한다. 적합한 식물을 선택하고 조합해 이용자들의 감각과 감정을 유발하는 재구성의 작업이 필요하다. 이때 식물은 비로소 조경 디자인의 요소가 아닌 매체가 된다.(각주 2) 디자이너로서 조경가는 식물학의 본질을 이해해야 하며 생태학의 기본에 친숙해야 한다. 원예학이나 농업학, 임업학으로부터 적절한 기술을 활용할 줄 알며 무엇보다 형태, 질감에 대한 안목과 화가의 기술이나 문학의 표현에 특별한 감수성을 지녀야 한다.(각주 3) 이처럼 식물은 조경 디자인의 매체가 되어 설계자와 이용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매개한다. 매체는 때론 정원, 공원, 초지, 숲 등의 ‘서식처 재현’의 형태로 해석되기도 하고 ‘문화적 메시지’로 안내되기도 한다. 필자는 영화나 소설, 시 구문에서 식물에 대한 문화적 콘텐츠 발굴을 즐긴다. 문학가들이 표현하는 식물은 어느 조경가의 수려한 식재 디자인 못지않는 경관을 선사한다. 특히 박완서 소설에서는 식물의 특징을 인물에 대입시켜 생명력을 불어넣는 묘사 글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롭다. 실제로 그는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 마을 노란 집에 거주하며 마당 가꾸기에 정성을 쏟을 만큼 식물을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봄이면 딱딱한 나무줄기 가장귀에서 꽃자루도 없이 선명한 홍자색 꽃을 터뜨리는 박태기나무의 특징을 복희의 첫사랑에 요동치던 떨림으로 묘사하는가 하면, 여름철 강렬한 주황색의 능소화는 팜 파탈 현금을 묘사하는 식물로 등장한다. 그밖에 싱아, 파드득나물, 며느리밥풀꽃 등 수십 종의 식물들은 그녀의 자전적 소설 또는 수필 구석구석에서 추억과 심경을 대리하며 독자와의 공감을 시도한다. 조선 최고 학자이자 개혁가인 다산 정약용은 어떠한가. 다산은 좌뇌와 우뇌, 이성과 감성을 두루 갖춘 정원가임이 틀림없다. 특히 다산의 풍부한 식물학적 지식은 정원에서 식물을 실용적으로 활용할 뿐 아니라 감각적으로 감상하는 태도도 제시한다. 국화의 아름다움을 남긴 여유당전서 1집 13권 『국영시서』에는 가을 밤 흰 벽 앞에 국화 화분을 세워 놓고는 촛불을 멀고 가깝게 비춰가며 벽 위에 어리는 국화 그림자를 감상하는 몽환적인 연출 방식이 잘 묘사되어 있다. “먹을 수 있어야만 실용이 아니라 정신을 기쁘게 해서 뜻을 길러주는 것도 가치가 있다.”(각주 4) 캐스팅과 연출 몇 년 전 건설사와 함께 주택 전시관 작업을 할 기회가 있었다. 최근 많은 브랜드가 팝업 형태의 체험 공간을 만들고 브랜드의 가치와 이미지를 담는 매체로 정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드림 하우스’란 이름으로 부산에 오픈한 견본 주택 전시관은 팬데믹 시대 새로운 트렌드를 반영한 단지 조경 콘셉트와 주거 문화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좁고 높은 입면의 정원 속에는 구불구불한 산책로와 시적인 교목의 캐스팅이 중요했다. 키는 8m, 수관 폭은 3.5m 내외, 2.5m 정도의 지하고가 확보된 나무가 필요했다. 3층 홀 복도에서 계단실로 내려가는 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는 수관고의 볼륨이 온전히 시선에 담겨져야 했으며 무엇보다 전체 공간에서 초점이 되는 구조로서 지배하는 힘도 필요했다. 수없이 많은 종류와 규격(미세하지만 다른 캐노피 형태)의 교목을 찾아다녔고 시뮬레이션했다. 주인공 나무가 결정된 후 빈 공간에도 몇 개 없는 테마 질서를 설정했다. 산책로의 시작은 향기가 은은한 은목서로, 수관 하부 주변은 온전히 비워둬 굽은 길과 빈 공간의 담백함을 살리고자 했고, 뾰족한 모서리 공간은 몇 개의 층위를 가진 식재 레이어를 두어 깊이감을 줬다. 정원의 채광은 유리를 커튼월 재료로 사용해 자연광을 충분히 들게 했지만, 자연 환기를 할 수 있는 폴딩도어 설치, 내부 덕트의 위치 등은 식물 유지·관리에 아쉬움을 줬다. 결과적으로 3년의 유지·관리 끝에 이 프로젝트는 건설사의 결정으로 철거 중이다. 나에게는 대형목 식재와 관리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해준 케이스다. 관리 도중에 중견 조경가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대형 교목을 심는 일은 마치 집을 떠서 옮기는 일과 같다”며 일침을 줬다. 윤리와 서명 몇몇 조경 현장은 관리를 통해 가까이서 두고 보고 있다. 내가 선택한 식물들이 어떻게 적응하고 변화하는지, 다음 작업에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가 시공과 관리 과정에서 깨달음을 준다. 그래서 반기지 않더라도 때로는 그곳을 암행해 식물을 살피기도 하고 비가 억수같이 쏟고 난 다음에는 집 주인에게 정원의 안녕을 묻곤 한다. 매번 나갈 수 없다는 핑계로 10년 가까이 내가 설계한 정원을 돌봐주는 고마운 한 시민 정원사가 있다. 그는 전문가다운 복장을 하고 식물이 심겨진 화단에 꿇어앉아서 시든 잎을 정리하고 진드기가 들끓으면 일일이 손으로 잎과 줄기를 훑어가며 박멸한다(F&B 시설 내부는 농약 살포를 되도록 지양한다). 지상부 식물을 육안으로 관찰하고 뿌리에 이상이 없다 싶으면 흙을 뒤집어 손으로 점검한 다음 내게 사진을 보낸다. 워터 컴퓨터를 다시 세팅하거나 일정 기간 잠가두라는 지시를 내린다. 때로는 그를 통해 쓰지 말아야 하는 수종과 토양 배합의 지침을 가르침 받기도 하고, 가지치기를 통해 살려 새롭게 형성되는 공간의 형태와 미(완벽한 타이밍의 전지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끊이지 않는 개화와 착과 능력)를 제공하며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 죽거나 병에 걸린 상처 입은 식물도 적절한 가드닝 스킬을 통해 정원의 건강성을 향상시킨다. 비로소 정원의 식물은 디자이너와 가드너가 함께 가꾸는 과정에서 재발견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잘못 심어서 그리고 운영한 나무들에게 고백한다. 앞으로 도면에 허식을 보이거나 콘셉트를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할 고민보다 앞으로 나의 식물에게는 생명력이 넘치는 부식토와 양토를 처방하고 너희들을 더 이해하리라. 땅을 더욱 진심으로 읽고 해석할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 **각주 정리 1. 『식물의 종(Species Plantarum)』(1753)을 집필한 스웨덴 식물학자 칼 린네는 “이름 없이는 영원한 지식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식물의 이름을 아는 것은 곧 조경의 대상인 자연의 시스템을 이해하는 첫걸음 아닐까. 2. 김아연 외 26명, 『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 도서출판 한숲, 2021, pp.212~223. 3. 닉 로빈슨, 『식재 디자인 핸드북』, 도서출판 한숲, 2018, p.44. 4. 성종상, 『인생정원』, 스노우폭스북스, 2023, p.68. 조혜령은 경희대학교, 그라니치대학, 서울대학교에서 원예와 조경을 공부했다. 정원이 갖는 문화적·사회적 가치를 믿으며 이론과 실무의 경계를 탐색하는 조경가로 현재는 조경하다열음의 연구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 조혜령
  • [나의 식물에게] 불가피한 난제, 불가능한 애도
    특별한 설계자 1990년 조경학과에 입학했고, 고향의 시골 어르신들은 “대체 조경이 뭐냐”며 물었다. 동네에서 그래도 세상 물정 꿰고 있다는 어르신이 먼저 나서서 “조경은 나무 심는 게지”라고 답하곤 했다. 당시에는 조경을 한낱 나무 심는 일로 잘못 알고 있다고 억울해하면서, 전체 배치도도 그리며 포장과 시설물을 섬세히 디자인하는 일도 조경이라고 애써 항변하기도 했다. 이제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 식물만을 다루는 건 분명 아니지만, 우리는 ‘식물’이라는 ‘특별한’ 재료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특별한’ 설계자들이다. 식물 재료는 탄생과 성장과 쇠퇴라는 삶의 여러 단계를 지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화한다. 개체가 처한 환경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모습을 지니므로 그 개별 형태는 실로 무한하다. 게다가 적절히 관리해서 무리 없이 자란다면, 식물은, 특히 나무는 살아갈 자리를 정한 설계자보다도 이 땅에 더 오래 살아남을 존재이기도 하다. 이 재료에는 내구 연한이 없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식물을 대하는 마음이 한없이 숙연해진다. 발췌한 마음, 난제 고백하자면, 천변만화하는 식물 재료에 대한 내 지식은 체계적인 공부와는 거리가 멀고 관심도 변변치 않아서, 설계사무소에서 함께 고생한 고수들이나 협의에서 만난 발주처 조경 담당들로부터 귀동냥으로 주워섬긴 게 대부분이다. “석류나 노각은 겨울 바람에 약해서 담으로 막힌 데 모아 심어라”, “산사, 마가목은 도시에서 잘 살지 못하니 다른 나무로 바꾸라”는 식으로 실제 식재 공사와 식물 성장, 유지·관리 과정을 지켜본 경험 많은 실무자들을 통해서 배운 것이다. 그래서 수종, 초종의 식물 리스트를 만들 때 언제나 조심스러운데, 그러다가도 읽던 책에서 불현듯 영감을 받기도 한다. 이를테면, 징그러운 묘사들이 있어 ‘호더(hoarder)’와 ‘호러’를 오가는 김인숙 작가의 소설 『자작나무 숲』의 도입부한 대목. “하얗게 서 있는 나무들의 숲이었다. 하얗고, 곧게. 그리고 빛을 뿜어내는 숲이었다.”(각주 1) 눈앞에 희부연 밤 풍경이 펼쳐지는데 껍질이 찬연한 이 나무들을 외면할 재간이 있겠는가. 하자 걱정일랑 잊어버리고 빛을 쏘아 올리기 위해서 식재 평면도의 표를 늘려서 자작나무를 넣고 무리 지어 심는다. 기본이 탄탄치 못한 잡지식과 뜬금없는 충동도 문제지만, 설계한 식물들을 현장에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실수와 오류를 보완하는 피드백 과정을 거치지 못한다는 게 무엇보다 뼈아프다. “초보들이 식재 도면을 그리나 봐요”(천만에, 초안은 내가 한 거야), “좁은 땅에 식물들이 자잘하게 뒤섞여서 너무 조잡해요”(맙소사, 또 빌어먹을 스케일 감이 문제로군), “중요한 공간이니까 소장님이 직접 신경 써주세요”(알았다고 이 양반아, 내가 그렸다니까). 별나게도 식물에 밝으시나 심사는 까탈스러운 자문위원이나 발주처 담당자를 만나게 되면, 볼 빨간 얼굴과 너덜너덜해진 심정을 애써 감추고 다스리면서 사무실로 돌아온다. 뭐가 문제인가, 괜찮아. 하지만 그런 날 밤이면 비평에 관한 책을 절로 떠올리고 남몰래 뒤적인다. 이를테면, 꾹 눌러 밑줄 친 이런 부분. “비평가들이란 하렘의 환관과 같다. 매일 밤 그곳에 있으면서 매일 밤 그 짓을 지켜본다. 매일 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 자신은 그걸 할 수가 없다.”(브랜던 비언)(각주 2) 물론 품위 있는 오십 대 쿨가이로서 맹세컨대 이렇게 야멸차고 한편으로는 애잔한 문장들을 즐기지 않는다. 다만 검토와 지적, 비판과 비평을 당하는 비슷한 처지에 공감한 나머지 그저 음험한 미소가 지어질 뿐이다, 라고만 해두겠다. 발췌한 마음, 애도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초·중·고교의 신축보다는 증·개축 사업들이 대폭 늘어나서 사무실 프로젝트 중에서 비중이 꽤 커졌다. 교사동의 증축, 개축은 수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게 무엇보다 앞서는 전제라서, 새 건축물을 운동장이나 녹지가 있던 자리에 짓고 원래 건물을 철거해서 운동장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달리 말하면, 식물을 새로 심는 일에 앞서서 원래 있던 나무와 풀들을 옮기거나 제거하는 일을 도맡아야 한다는 뜻이다.(각주 3) 우리가 설계한 대학 캠퍼스 강의동 신축 공사를 사례로 보면, 건축물 한 동을 짓기 위해서 평균 5,000~6,000m2 면적의 숲과 그곳에서 살던 교목 약 700~800그루를 거의 전량 제거하며, 여기서 임목 폐기물은 땅 위 줄기, 가지와 지하의 뿌리를 모두 합쳐서 적어도 100톤 이상 나온다. 도시지역 초·중·고교들도 증·개축 사업을 하면 학교 한 곳마다 교목은 평균 100~200주, 임목 폐기물 60~70톤을 처리해야 한다. 대지 전체를 파헤치니까 가식할 장소가 마땅치 않고 옮겨 심자고 해도 공사비가 빠듯해서 이식 수목의 유지·관리는 뒷전이다. 이런 프로젝트들의 설계 초반에 존치와 이식, 제거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 현장 조사를 다니다 보면 흔치 않은 나무들을 만나기도 한다. 작년 춘천의 학교에서는 이름만 들으면 왠지 별똥별 같은 위성류渭城柳(Tamarix chinensis)를 난생처음 봤다. 그다지 말쑥하지는 않지만 키 10m, 흉고직경 45cm로 우람하게 서 있는 유별난 모습. 화석으로만 남았던 메타세쿼이아가 1943년 7월 말 중국의 깊은 산속에서 무려 35m 높이의 커다란 나무로 살아있음을 기적처럼 목격한 학자의 충격에 비하면 새 발의 피가 되겠으나, 잎이 나질 않아서 처음 본 2월에는 그냥 버들일까 했던 그 나무가 바로 위성류임을 구글 렌즈와 수목 도감으로 거듭 확인하고 올려다보는 마음이 묘했다. 2023년 7월 말의 작열하는 여름 볕을 잠시나마 잊을 정도로. 하지만 이 나무도 갑작스레 죽음을 맞을 것이다. 위성류는 불운하게도 운동장으로 바뀔 건물 중정 귀퉁이에 서 있고, 이식해서 살리기에는 덩치가 너무 큰 나무다.(각주 4) 애도하며 반성한다. 시인 이성복의 아포리즘을 모은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의 제목 자체를 즐겨 인용하며, 그래도 내역 작업으로 고통스럽게 야근하면서 유기질 비료를 무수히 잡아줬기 때문에 “나는 예외다”라고 너스레를 떨어왔건만, 이제는 푸른 잎은커녕 나무를 통째로 없애는 일에 가담하는 처지니 말이다. 정작 식물을 사랑해야 할 사람은 놓치고 사는데 소설가 김연수가 일깨우는, 이를테면 이런 장면. “나무는 저마다 다른 나무인데 하나의 이름으로만 부르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은행나무니 향나무니 하는 이름 말고 그 나무만의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 여기 모였습니다.”(각주 5) 아파트 단지 철거를 앞두고 그곳에서 삼십여 년을 함께 살아온 나무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주민들이 스무 명 남짓 모여서 치르는 의식은 나무마다 각자 고유의 이름을 붙여서 함께 불러보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반려견 ‘궁금이’를 추억하며, 어느 칠엽수에게 ‘궁금이와 함께 웃는 나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식물들이 개별화된 자신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니, 순전히 우리가 세심하게 지켜보고 알아듣고 불러주어야 하는 일이다. 나에게 별다른 기억이 없는 개체, 개별적이지 못한 개체에 대한 애도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일하다 보면 식물을 아끼고 보호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이들이 식물과 나눈 교감을 찬찬히 새겨듣고, 커다란 나무는 공사 범위에 대해 설득하고 고쳐가면서 최대한 존치하며 작은 나무는 가식장을 잘 골라서 한 그루라도 더 옮기고 살려야 할 것이다. 학교 나무인 목백합 주변의 잘 가꾼 나무들까지 함께 동산으로 만들어 달라고 신신당부하던 교무부장, 원래 나무는 잘 몰랐는데 재산 대장 처리를 하느라 나무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정이 들어서 마냥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된다던 학교 행정실장, 캠퍼스 나무를 하나라도 건드리려면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소문이 난 교수. 모두 식물과 함께 한 추억들을 온전히 지켜내고자 설계자를 바르게 인도하는 든든한 후원자다. 나이가 들면서 야속하게도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일에만 유독 예민해진다. 그러니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지키기 힘들 것이다. 어디까지가 이웃한 생명이며, 어떻게 이웃의 고통을 지겨워하지 않고 그 삶을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한다. 조경설계는 식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공감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며, 이렇게 아름다움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조경 일의 속 깊은 본질이라고 믿는다. **각주 정리 1. 김인숙, “자작나무 숲”,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 북다, 2023, p.177. 2. 빌 헨더슨·앙드레 버나드, 최재봉 역, 『악평: 퇴짜 맞은 명저들』, 열린책들, 2011,pp.154~155. 참고로 브랜던 비언(1923~1964)은 아일랜드의 작가. 3. 전에는 주로 산림에 적용하는 ‘벌목’과 ‘뿌리뽑기’만 있었는데, 올해 『2024년 건설공사 표준품셈』은 유지·관리 부문에 ‘가로수 제거(1-2-20, 24년 신설)’를 추가했다. 도시에서도 가로수나 도시림 등 수목을 제거하는 공사가 많아졌다는 하나의 방증일 것이다. 4. 한국도로공사에서 이식한 약 2만 그루의 자생 수목을 대상으로 성공한 비율을 정리한 논문에 따르면, 근원직경이 커질수록 이식 성공률은 감소하며 예측 회귀 모형은 “Y=-0.811X+88.627(X=근원직경, Y=이식성공률)”이었다. 이 식에 따르면 흉고직경 45cm(근원직경 54cm)의 위성류를 이식해서 성공할 확률은 45%에 불과하며, 가식 후 다시 옮겨서 정식한다면 20%까지 생존율이 줄어들 것이다. 이상철 외 2인, “자생수목 이식 성공률에 관한 연구”, 『한국조경학회지』 43(2), 2015, pp.23~29. 5. 김연수, “나 혼자만 웃는 사람일 수는 없어서”, 『너무나 많은 여름이』, 레제, 2023, pp.25~26. 허대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1999년 이후 사반세기에 걸쳐 설계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으며, 조경설계 힘(studio HYMH) 소장이다.
  • [나의 식물에게] 식물의 감(感)
    공간을 만드는 조경가에게 식물은 어떤 존재일까. 질문에 내포된 의미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즉답이 망설여진다. 이 질문은 ‘조경가라면 꼭 식물을 다루어야 하는가’와 같은 직업 정체성에 대한 원론적인 물음이 담길 수도 있고, ‘조경가는 식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와 같은 태도나 방법론에 대한 물음이 담길 수도 있다. 광범위한 주제를 펼칠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원론적 주제를 다루기보다 조경가로서 일상에서 식물을 어떻게 감각하는지를 소개하며 나의 미적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조경가에게 식물은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공간 연출 소재다. 시시각각 변화하고 살아 있는 생명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특별한 감흥을 전달한다. 식물의 어떤 측면이 사람들에게 어떤 심상을 불러일으키는지, 또한 왜 그렇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세심하게 살피고 섬세하게 감각하는 것은 조경가에게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조경가는 그런 과정을 통해 식물을 하나의 미적 대상으로서 탐구하며 인식하기 시작하고, 주관적인 해석과 분류의 과정을 통해 종국에는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미적 재료로 주관화하기 때문이다. 식물이 전달하는 무수한 감각이 있겠지만 그중 네 가지 식물에서 느낀 양감, 색감, 질감, 형태감을 소개한다. 단편적인 미적 경험으로 주관적 관점에서 서술했음을 미리 밝힌다. 이를 통해 조경가가 식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과조경430호(2024년 2월호)수록본 일부 최재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 졸업, 동대학원에서 조경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정원과 조경설계 실무를 익혔다. 2017년 오픈니스 스튜디오(Openness Studio)를 창업해 생태적 관점을 바탕으로 정원, 공공예술 분야에서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 [나의 식물에게] 아름다운 공간을 지키기 위한 고민
    사람의 활동과 관계하는 공간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기능이 그 공간에 담겨야만 한다. 하지만 단지 태어났다고 계속 실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공간이 오래도록 세상 속에서 지켜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이유는 그 공간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을 이루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요소는 보이는 것부터 보이지 않는 것까지 꽤 다양하며 식물은 그러한 요소 중 하나다. 조경가로서 다루어야 하는 대상지를 만날 때 계획의 꽤 이른 단계부터 식물을 포함한 포괄적인 공간의 이미지를 구상하곤 한다. 어쩌면 식재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어떤 조경 요소보다도 다양한 관점과 의견이 있을 수 있는 이야기 꾸러미일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나는 많은 프로젝트에서 ‘어떤 식물을 어떻게 식재할까’ 고민했었고 지금까지도 고민해 오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면서 ‘어떻게 식재를 할까’가 아닌 ‘식재를 해야 할까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까’를 고민하는 순간도 많아졌다. 이 글 첫머리에서의 표현처럼 세상에 태어날 필요가 있는 공간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오래도록 사랑받게 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최소한의 식재만이, 때로는 그것조차 없어야 할 필요가 있다. 최소의 식재 작은 가게들이 모여 있는 꽃 시장을 가면 이 집 저 집 비슷해 보인다. 가게마다 분명 서로 다른 식물이 있지만 방문객이 특별한 목적이나 관심이 없다면 대동소이해 보일 것이다. 만약 단일 수종을 통일성 있게 진열해 놓은 가게나, 빈 공간에 하나의 아름다운 식물만 진열한 가게가 있다면 분명 꽃시장 안에서 상대적으로 그 존재가 잘 드러날 것이다. 정원박람회에서도 비슷한 스케일인 다수의 작가정원이 인접해서 위치하게 되면, 작품 간의 차별성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복잡한 박람회 속에서 작가가 전하려는 이야기나 경험의 순간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얼마 되지 않는 공간에 이용/가용 면적과 식재 면적을 모두 움켜잡고 있는 것보다 단순하고 과감한 방법으로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 더 잘 부합할 수 있다. 아무리 작은 스케일의 정원이라지만 하나의 공간을 계획할 때 주변 환경과의 관계는 결정적인 고려 사항이며, 그 관계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큰 스케일의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극단적으로 미로와 같이 수많은 경험의 연속을 모두 담을 수도 있겠지만, 반대의 극단으로 큰 스케일 전체를 하나의 경험으로 극대화할 수도 있다. 끝없이 펼쳐진 논밭 가운데 있는 큰 땅과 복잡한 도심 속이나 도시의 끝단 클라이맥스에 위치한 큰 땅에서 같은 방법은 서로 다르게 작동한다. 이러한 생각은 2017년부터 7년간 이끌어온 인스파이어 복합 카지노리조트(Inspire Entertainment Resort) 프로젝트에도 담겨 있다. 선택과 집중, 최소의 식재를 통해 사업비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면서 대상지가 가진 스케일과 주변의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했다. 최소의 비용을 수반하는 최소의 식재 그리고 최대의 효과로 작동하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면 어느 발주처나 품고 싶은 아이가 될 것이다. *환경과조경430호(2024년 2월호)수록본 일부 박경탁은 사이트닷(SITEDOT)의 공동 대표로, 서울시립대학교와 하버드 GSD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민우건축사사무소, O3SCOPE, SWA 샌프란시스코 오피스 등에서 설계 실무를 했다. 2022년까지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의 소장으로 팀을 이끌다 2023년 사이트닷에 합류했다. 현재 인스파이어 복합 카지노리조트, 하인즈 퀀텀 랜드마크 타워, 힐링 네이처랜드, 용산파크웨이 등의 조경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 박경탁
  • [나의 식물에게] 조경가, 식물을 얼마나 잘 알아야 할까
    조경이 식물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조경에 식물이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조경가가 다루는 공간이 자연을 배제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니 으레 자연의 한 요소로 식물을 다루게 되는 것인데, 조경가를 식물 전문가로 바라보는 시선이 종종 갑갑하다. 한편으로는, 식물을 다룬다는 점이 그래도 여러 공간 설계 분야 중 조경을 특별하게 만드는 게 사실이기에 많은 조경가가 식물을 잘 모른다는 점을 종종 불안해한다. 식물에 대한 식견이 부족한 사람으로서 나의 식물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려니 식물 지식, 식재 설계에 대한 노하우를 감히 내놓을 재간은 없어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몇 가지 식물에 대한 기억을 소소하게 적어본다. 객관적이지 못하고 개인적 선호가 드러나는 점은 양해를 구한다. 찔레 찔레는 꽤 어렸을 때부터 정확하게 이름을 알고 있던 식물이다. 원래 자연에 관심이 많아 농업대에 가고 싶었다는 아버지는 관찰력이 좋아서 (과장된 기억이겠지만) 운전하고 지나가면서도 “저기 대벌레가 숨어 있다”고 알려주었다.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에는 이런 것도 먹었다고 설명하며 찔레 껍질을 벗겨 그 속살을 먹어보기도 했다. 목으로 넘길 수는 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정도로 맛은 없다. 어쨌든, 먹어본 기억 탓에 이 식물이 꽃이 있든 없든 찔레인 것은 늘 알아봤다. 가시가 없는 민찔레도 있다. 탐조하는 사람들에게는 각자 ‘새 관찰에 대한 열정을 불꽃처럼 일으키는 종’을 뜻하는 스파크 버드(spark bird)가 있는데, 조경하는 나에게는 이 식물이 나의 ‘스파크 버드’다. 쇠뜨기 모두가 말리겠지만 써보고 싶은 식물이다. 뱀밥이라고 불리는 생식 줄기가 올라올 때는 조금 징그럽게 생겼는데, 녹색의 영양 줄기는 질감이 부드럽고 균일해서 들판에 쫙 펼쳐져 있을 때 햇빛을 받으면 꽤 예쁘다. 어릴 때 지나다니면서 보이면 쉽게 끊어지는 게 재미있어서 뚝뚝 끊고 다녔던 풀이다. 잘 퍼져서인지 대부분 잡초 취급을 받는다. 들판이라 쇠뜨기를 심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해 본 적이 있는데 비웃음만 사고 심지 못했다. 이 식물을 검색해보면 어떻게 없애는지에 관한 내용만 나온다. 붉나무 이름처럼 단풍이 많이 붉다. 사실 붉나무를 한국에서 설계에 써본 적은 없지만, 뉴욕 하이라인에 있는 붉나무의 사촌 격인 대가지붉나무의 특성을 좋아해 대체목으로 생각해두고 있는 식물이다. 너무 붉어서 투명한 느낌이 날 정도로 짙은 단풍이 들기까지 노란색과 주황색을 거치기도 해서 가을 풍경을 다채롭게 해준다. 대가지붉나무만큼 색이 붉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돈되지 않은 듯 거친 야생 느낌의 식물이 필요할 때 붉나무를 활용해 볼 계획이다. 수양버들 탄천을 따라 자전거로 하천변만 달려 출근할 수 있는 운 좋은 사람이다. 출근길 구간에 수양버들 커튼이 드리우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아침 해를 받아 투명해진 수양버들 커튼 뒤 탄천에 꽂혀 있는 한 배수구 끝 돌무더기에 앉은 민물가마우지를 찍는 게 일상이 됐다. 봄에 호흡기 질환을 일으킨다고 해서 수양버들을 점점 쓰기 꺼리는 추세라 물가 근처가 아니면 잘 안 보인다. 하지만 도심 한가운데 엉뚱하게 있는 수양버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크기가 좀 크다면 더운 지방의 후추나무 같은 느낌도 난다. 가로수나 정원수로 쓰이는 이 나무의 다양성이 적어서인지 이런 엉뚱함이 도시 경관을 다채롭게 하는 것 같다. *환경과조경430호(2024년 2월호)수록본 일부 이해인은 조경설계사무소 HLD 소장이다. 디자인을 통한 주장과 혁신이라는 철학 아래, 공간적 문제와 도전 과제에 대한 핵심적 개입 제공을 목표로 한다.
  • [나의 식물에게] 나의 디자인 중심
    내게 식물이란 석재, 목재, 철재, 콘크리트 등과 더불어 조경 디자이너로서 활용할 수 있는 수많은 소재 중 하나다. 다른 모든 소재가 질감, 무게감, 형상 등이 매우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듯이, 식물도 마찬가지로 땅에서부터 줄기가 하나 혹은 여러 개가 뻗어 올라가고 그 가지들을 따라 수많은 녹색의 잎이 붙어 있고, 그 형상, 크기, 질감, 색상 등이 다양한 소재일 뿐이다. 포장과 시설물로서의 식재 포장 설계, 시설물 설계는 소재에 의한 분류가 아니라 공간의 구성 요소로서의 분류 체계다. 하지만 식재 설계는 소재에 의해 분류된 설계 단계다. 실시설계 도면 작성을 위한 과정과 시공성을 고려한다면 식재 설계가 분류된 방식을 이해하겠지만, 디자인 단계에서 식재 설계를 별도의 단계로 분류하고 접근하는 방식이 유효한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잔디는 석재, 콘크리트, 벽돌 등과 함께 바닥을 표현할 수 있는 포장재가 되기도 한다. 나무 9주가 만들어내는 공간과 퍼걸러의 캐노피가 만드는 공간 모두 위요된 쉼터를 형성하듯이 나무는 때때로 퍼걸러와 견줄 수 있다. 다만 포장 및 시설물의 기능과 표현하고자 하는 분위기에 따라 어느 소재를 선정하는 것이 설계에 적합한가를 고려하게 되며, 이에 따라 콘크리트 포장과 철재 캐노피를 만들기도 하고 혹은 잔디와 나무를 심기도 한다. 따라서 식물이 조경설계의 필수는 아니라고 본다. 대학원 시절 조경가 마사 슈워츠(Martha Schwartz)의 설계 수업을 수강했는데, 그 수업의 주제가 ‘도시의 인프라스트럭처 설계를 통한 도심 재생’이었고 전제 조건은 식물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굳이?”라는 마음으로 시작했고, 수업을 들으며 식물을 배제한다는 것이 과감한 시도라 모종의 의구심을 가졌지만 그 수업은 조경가로서의 관점을 결정짓게 만들어준 인생 터닝 포인트와 같은 시간이었다. 글로는 어떻게 설명해야 당시의 내 감상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식물이 나의 손에서 없어지고 나니 주어진 대상지 본연의 가치와 사용자의 경험에 대해 더 많은 스터디를 하게 됐으며, 내게 조경이라는 분야가 예술이라는 분야와 더 가까워지게 되는 계기가 됐다. *환경과조경430호(2024년 2월호)수록본 일부 김태경은 고려대학교에서 생태공학을, 하버드에서 조경학을 전공했다. 미국과 한국의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2017년부터 얼라이브어스를 운영하고 있다. 디테일과 식재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섬세하게 다듬어진 공간의 미감에 주목한다.
  • [나의 식물에게] 조경가와 식물, 조경가의 식물
    독특한 디자인 소재 “식물이 없는 공간도 정원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질문의 본질은 맞고 틀림,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 ‘더 좋은 정원’ 혹은 ‘더 좋은 조경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각종 도시 환경 문제와 기후위기를 겪고 있는 현 인류의 입장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공간을 만드는 조경가에게 식물은 어떤 존재일까.’ 이에 대한 답은 ‘조경가가 만드는 공간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당위성에 대한 질문을 통해 명확해진다. 인류가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로 번창하면서 만들어 낸 도시, 공원, 광장, 정원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리고 자연과 공간을 바라보는 조경가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조경가가 만드는 공간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 조경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 고민과 더불어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조경인으로서 두 가지 중요 포인트를 담을 수 있다. 첫째 생태적으로 건강하며 지속가능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고, 둘째 미적으로 가치 있으며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쯤 되니 본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가능해진다. 첫째로 생태계 일부로서의 식물이고, 둘째로는 디자인 소재로서의 식물이다. 다시 말해 조경가에게 식물은 생태적으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기 위한 가장 중요하고 독특한 디자인 소재 중 하나다. 살아 있는 디자인 요소 식물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며 중요한 특성은 살아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살아 있기에 번식하고, 군락을 이루며, 병들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다른 디자인 소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개념인 생육 환경, 서식처를 디자인에 적용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겨준다. 이 개념은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식물을 관찰함으로써 오랜 세월을 거쳐 터득되어 왔다. 윌리엄 로빈슨에서부터 칼 푀르스터, 리하르트 한젠, 우르스 발저, 피트 아우돌프, 카시안 슈미트까지 자연 속에서 식물이 어떻게 살아가고 번식하며 적응하는지 관찰하고 실험하며 디자인에 적용해왔다. 식물의 개체와 군락이 스스로 번식하며 조화를 이루는 방법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생육 환경 및 서식처 특성을 파악해 그에 적합한 식물을 바르게 조합해 식재하는 것은 기후위기 시대 속에서 조경가가 만드는 공간이 생태적으로 건강한 환경으로 거듭나는 열쇠가 될 수 있으며 지속가능한 디자인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식물은 살아있기에 성장한다. 식물은 키가 자라고 부피를 늘리고 생육 영역을 넓히면서 경관을 변화시킨다. 이는 디자이너의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식물의 생장은 평면상에서 식재 위치, 간격, 밀도 등 많은 고려 사항을 만들어낸다. 입면을 생각하면 더 복잡해진다. 수종마다 유전적으로 정해진 수고와 초장, 가지치기와 적심을 통해 유지 가능한 수고와 초장, 꽃이 피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초장 등. 식물은 생존을 위한 번식 과정을 통해 계절마다 모습을 변화시킨다. 식물은 지구상에서 좀 더 오래, 넓은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새와 곤충을 유인한다. 꽃은 벌, 나비, 새가 날아들도록 하기 위해 더 크고 아름다운 형태와 색채를 만들어 낸다. 눈에 띄기 위해 꽃대를 높게 솟아올리기도 하고 꽃 개체 수를 늘려 수정 확률을 높이기도 한다. 바람에 잘 흔들리는 구조를 택해 자연 현상을 이용하고 향기를 통해 유인하기도 한다. 꽃의 형태(꽃송이의 형태), 크기, 꽃대 구조와 높이, 색, 밀도, 꽃이 피는 시기, 열매 색과 형태 등은 식재 디자인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시간이 만들어 내는 찰나의 경관은 그 시간과 장소에만 존재하는 아쉬움이 되지만 그래서 감동을 배가시킨다. 그 외에도 상록성과 낙엽성, 1년생과 다년생 등 생육 습성, 단풍과 낙엽과 같은 계절 변화(온도)에 대한 적응 등 식물 고유의 특성은 조경가의 공간을 다른 분야 디자이너의 공간과 구분하게 한다. *환경과조경430호(2024년 2월호)수록본 일부 박주현은 서울여자대학교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더 올림 플라워와 가든 스튜디오(The Ollim Flower&Garden Studio)에서 자연과 인간을 연결하는 정원을 중심으로 실내외 공간의 기획, 설계, 시공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 [나의 식물에게] 식물의 가치를 만드는 법
    직립형 느티나무를 찾아서 광화문광장 공사가 한창이었을 때 CA조경기술사사무소(이하 CA조경)는 설계 의도 구현이라는 용역으로 공사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조용준 소장은 수목 답사에 참여하지 못할 때마다 팀원 중 한 명을 번갈아 답사를 보냈고, 나 역시 팀원으로서 서울시 공무원, 공사 감리 담당자, 식재 공사 담당자와 함께 지방 곳곳을 돌아다녔다. 2021년 12월 23일, 충청북도로 답사를 갔다. 광화문광장 설계 도서를 작성할 때에도 수목 농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시공 단계에서 수목 농장을 방문한 건 처음이었고 전문가들이 나무를 선별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먼저 서울시 공무원이 도면과 자재수급현황표를 보고 오늘 선별해야 할 나무의 수종과 규격을 파악했다. 그 다음 식재 공사 담당자가 농장주에게 전화를 걸어 방문 허락을 받고 해당 농장을 찾아갔다. 농장에서 괜찮은 나무를 발견하면 둘레를 재서 규격을 확인하고 설계사에게 설계 의도에 적합한 나무인지 확인했다. 특별한 이견이 없으면 나무를 끈으로 묶어 다른 현장에 팔리지 않도록 표시를 해놓았다. 이때 전문가들이 좋은 나무를 판별하는 기준은 나무의 수형이었다. 농장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수형이 아름다운 나무를 발견하면 모두가 “이 나무 참 잘생겼다”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 나무가 광화문광장에 식재될 만한 나무인가”라는 물음에는 조금씩 의견이 달랐다. 서울시 공무원은 공기에 차질이 없게 수급 일정을 맞출 수 있는 나무가, 공사감리 담당자는 수피에 상처가 없고 옹이가 없는 깨끗한 나무가, 식재공사 담당자는 규격에 맞는 나무가 좋은 나무라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그럼 나는 어떤 것을 기준으로 좋은 나무를 선별해야 했을까. 그 답을 2022년 2월 15일 전라북도로 답사 갔던 날 찾았다. 조용준 소장은 내게 직립형 느티나무를 찾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잎이 높은 지점에서부터 나고 수관 폭이 좁은 느티나무를 구해오는 것이 요구 사항이었다. 수목 답사에 참여했던 다른 관계자는 그런 나무는 없다며 차라리 다른 수종으로 변경하라고 말했지만, 조용준 소장은 직립형 느티나무를 본 적이 있다고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직립형 느티나무를 고집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광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해 주기 위해 느티나무여야 하고, 멀리서도 광화문이 보여야 하기 때문에 직립형이어야 한다. 직립형 느티나무는 식재 담당자의 수소문 끝에 발견됐고, 지금은 해치마당과 광화문광장을 잇는 화강석 스탠드 일대에 식재되어 있다. 좋은 나무란 무엇이며 좋은 나무를 고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광화문광장 프로젝트를 통해 내가 배운 교훈은 단순하다. 수형이 아름다우면서도 설계가의 의도를 구현해낼 수 있는 나무가 좋은 나무이며, 좋은 나무를 찾기 위해서는 발품을 많이 파는 수밖에 없다. 직립형 느티나무는 없다고 말렸던 관계자의 말에 더 이상 발품을 팔지 않았다면, 광화문광장 설계 의도를 구현할 수 있는 좋은 나무를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환경과조경430호(2024년 2월호)수록본 일부 김수린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과 조경을 복수전공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2018년 CA조경기술사사무소에 입사해 새로운 광화문광장 기본 및 실시설계, 디지코 KT 기본 및 실시설계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해 실무를 익혔다. 2022년 LH 작가정원으로 정원설계 활동을 시작했고, 2023년 순천만국가정원에 LH 공공정원을 조성했다.
  • 조경가 김영민
    설계 철학을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김영민은 조경설계에 앞서 설계를 하는 이유와 설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되물어왔다. 그 고민의 뿌리는 교수라는 직업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사회는 교수에게 설계를 하라고 하면서, 동시에 설계를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한국에서 겸직이 금지된 교수가 설계를 하려면 타인의 이름이 필요하다. 그것이 형식적이든, 실체적이든, 교수 조경가는 설계 과정의 부분이 될 수 있을 뿐이다. 학의 영역에서 교수가 설계를 한다면, 업에 있는 조경가들과는 달라야 하며, 그것이 무엇이냐는 답을 제시하기를 원한다.” 김영민은 그 답으로 “이론을 정초하는 설계”를 내놓고, “이는 당위라기보다 일종의 자발적 결단에 가까운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번 특집의 초점은 김영민의 이론을 정초하는 설계인 ‘모순지도’에 맞춰져 있다. 모순지도의 의미를 설명하는 에세이, 그가 설계하며 발견한 다섯 가지의 모순, 비슷한 길을 걷어온 동지와 함께 설계하고 있는 동료가 바라본 그의 모습과 인터뷰를 담았다. 김영민이 설계하는 법이 더 궁금하다면 『스튜디오 201, 다르게 디자인하기』(한숲, 2016) 탐독을 추천한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자료제공 김영민 -- 모순지도 _ 김영민 다섯 가지 모순 _ 김영민 이론이 죽은 시대의 설계 _ 김모아 젊은 그대에게 _ 김아연 뜨거운 심장을 가진 육각형 조경가 _ 이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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