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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면으로 말하기, 디테일로 짓기] 생성적 경계
    “대다수의 화가들이 자연의 모조품(simulacrum)을 만들기 위해 기교를 이용했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연의 작동 방식을 제대로 알기 전에는 회화에 자연을 가득 채울 수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들은 정확히 말하면 형태를 모방하려는 연구가 아니라, 실험과 다이어그램 사이의 무언가, 즉 작용하는 힘들을 꿰뚫어 보려는 시도들이었다.” _ 필립 볼『, 흐름』 중1 ‘마이애미 왓슨 아일랜드(Watson Island)프로젝트’에서 해수면 상승에 따른 해류와 파도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여, 이에 대응하는 생성적 경계를 만들었다. 이 경계는 선적인 콘크리트 방파제가아닌 해류의 흐름에 반응하는 지점들을 이어 엮은 넓은 표면이다. 움직임은 패턴과 흐름을 만든다. 물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마야(Maya)2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했다. 사각 박스 안에 기둥을 만들고 물을 흘려보았다. 기둥의 개수, 간격, 배치에 따라 물의 패턴과 흐름이 달라진다. 이 간단한 시뮬레이션이 디자인의 시작이었다. 움직임을 바꾸는 임의적 개입은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고, 이는 새로운 패턴을 형성한다. 이러한 과정은 형태를 만드는, 즉 디자인하는 행위 그 자체다. 그렇다면 이 기초적인 시뮬레이션은 어떻게 구체적 형태와 시스템으로 이어질까? 3D로 구현된 왓슨 아일랜드 대상지에 마야 프로그램을 활용해 마이애미 해안의 기본 해류 데이터를 시뮬레이션했다. 이 과정에서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경계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변화를 체크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영역인 육지(X)와 바다(Y)사이의 변수들을 찾고, 매개 변수를 설정해 도식화된 함수를 만들었다. 함수는 다음과 같은 순차적 구조를 가진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2호(2019년 4월호) 수록본 일부 조용준은 서울시립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진양교 교수의 ‘채우기와 비우기’ 설계 이론과 제임스 코너의 실천적 어바니즘을 기반으로 한 간단명료한 디자인에 영감을 받았다. 15년여의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질적 설계와 페이퍼 아키텍처를 추구하며, 독자적인 설계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깊이(invisible depth), 생성적 경계(generative boundary), 언플래트닝 랜드스케이프(unflattening landscape)를 탐구하고 있다. 최근 CA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으로서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설계공모 팀의 당선을 이끌었으며, 개인 자격으로 서울형 저이용 도시공간 혁신 아이디어 공모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그리는, 조경] 풍경을 그리는 드로잉
    조경이 다루는 대상, 즉 랜드스케이프(landscape)는 우리말 경관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풍경이나 풍경화를 가리킨다. 그래서인지 공간을 디자인하는 조경의 인접 분야인 건축과 도시설계의 드로잉과 비교해보면 조경 드로잉은 녹색의 자연으로 가득한 풍경의 이미지를 중요시한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그림 1). 특히 설계공모 제출물 중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그래픽 소프트웨어로 공들여 생산한 이미지에는 조경의 자연 애호(biophilia)경향이 잘 드러난다. 설계가가 고안한 경관을 인간의 눈으로 바라본 것처럼 그려낸 이러한 이미지는, 풍경화의 형식과 대체로 유사해 조경 드로잉에 익숙하지 않은 누구라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효율적 커뮤니케이션 도구다. 이처럼 풍경화 형식으로 그려진 드로잉을 투시도라고 부른다. 물론 첫 번째 연재(『환경과조경』 2019년 1월호)에서 말했듯, 선형 원근법에 기반한 투시도는 엄밀히 말해 평면도와 입단면도 같은 투사 드로잉 유형에 속한다. 다만 조경의 역사에서 투시도는 선형 원근법을 느슨하게 적용해 온 경향이 있고 이러한 드로잉 유형은 정원 설계의 양식과 직접적으로 관련되기도 했기에, 주요 드로잉 유형 중 하나로 다룰만하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해 유럽 전역에 유행한 풍경화식 정원 설계에서 투시도는 주요한 드로잉 유형으로 등장했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17세기까지 정원 설계에서 평면도와 입단면도가 주로 이용됐다면, 18세기 영국에서는 정원을 설계할 때 풍경화와 비슷한 스케치, 말하자면 투시도를 빈번히 이용하기 시작했다.1 전자가 과학적 도구성에 기반한 드로잉 유형이라면, 후자는 상대적으로 예술적 상상력이 강화된 시각화 방식이다. 물론 17세기에도 투시도는 경관을 시각화할 때 유행했다. 하지만 18세기에 이르러 바라보는 지점이 버드 아이 뷰, 즉 새의 시점에서 사람의 눈높이로 내려온다. 인간의 자연 경험을 시각화하기 위한 시도는 조경 드로잉뿐만 아니라 회화에서도 동시에 나타난 현상이었다.2 시점이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선형 원근법에서 풍경의 묘사가 보다 자유롭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드로잉의 변화는 정원 설계의 변화를 고스란히 반영했다. 지난 연재(『환경과조경』 2019년 3월호)에서 살펴본 프랑스 정형식 정원의 엄격한 기하학적 질서, 즉 직선의 중심축을 따라 마지막에 위치하는 소실점으로 인간의 시선을 이끌어가는 대신에 이제 곡선(serpentine line)이 정원 조형의 원리가 되었다. 방문객은 곡선형의 길을 걸어가면서 식재나 점경물에 가려졌다 다시 나타나는 일련의 풍경의 변화를 경험하게 됐다.3몇몇 전망점은 풍경을 한 폭의 풍경화처럼 바라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기에 이 시기의 정원을 풍경화식 정원(landscape garden)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풍경화식 정원의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스투어헤드(Stourhead)에는 17세기의 역사적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1600~1682)의 ‘아이네이아스가 있는 델로스 섬의 풍경(Landscape with Aeneas at Delos)’의 구성과 유사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점이 있다. 이러한 정원에서의 경험을 그려내는 데는 평면도나 입단면도보다 느슨한 투시도가 적합했던 것이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2호(2019년 4월호) 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투시도는 건축 드로잉의 역사에서 20세기 초반까지도평면도, 입단면도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건축사가 배형민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아카데미에서는투시도가 중요하지 않았고 실무에서 클라이언트를설득하는 수단으로 주로 이용되었다고 본다(HyungMin Pai, The Portfolio and the Diagram:Architecture, Discourse, and Modernity inAmerica, Cambridge, MA: The MIT Press, 2002,p.29). 제임스 코너 역시 건축 드로잉에서 투시도가평면도나 입단면도보다 열등하게 여겨졌다고 말한다.전자가 건축의 이념을 표상하는 존재론적 드로잉으로간주된 반면, 후자는 종이에 행하는 단순한 표현 정도로여겨졌기 때문이다(James Corner, “Representationand Landscape: Drawing and Making in theLandscape Medium”, Word & Image: A Journalof Verbal/Visual Enquiry 8(3), 1992, p.255). 2.John Dixon Hunt, Greater Perfections: ThePractice of Garden Theory, Philadelphia: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00, p.42;John Dixon Hunt, The Figure in the Landscape:Poetry, Painting, and Gardening during theEighteenth Century, Baltimore: The JohnsHopkins University Press, 1989, pp.201~204. 3.영국의 풍경화식 정원 설계에서 정원의 모델은 자연이었고,곡선은 자연의 형태를 표현하는 언어로 간주되었다(WilliamHogarth, The Analysis of Beauty, Ronald Paulson,e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7). 이명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경 설계와 계획, 역사와 이론,비평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박사 학위 논문에서는 조경 드로잉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현대 조경설계 실무와 교육에서 디지털 드로잉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고, 현재는 조경 설계에서 산업 폐허의 활용 양상, 조경 아카이브 구축, 20세기 전후의 한국 조경사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다. 가천대학교와 원광대학교,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조경비평 봄’과 ‘조경연구회 보라(BoLA)’의 회원으로도 활동한다.
  • [공간의 탄생, 1968~2018] 한국 도시화의 거시적 메커니즘, 계획 주체와 공간 지향
    한국의 도시화 50년은 어떻게 작동했는가 지난 두 달간의 연재에서는 한국 도시화 50년의 거시적 현황과 일상적 현황을 각각 ‘쏠림 현상’과 ‘밀도의 향연’으로 규정했으며, 이와 같은 현상의 원동력으로서 지난 50년 동안 끊임없이 지속됐던 정부 주도의 도시화와 대규모 물리적 개발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연재에서는 한국의 도시화 50년을 작동하게 한 거시적 메커니즘을 ‘계획 주체와 공간 지향’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나의 개인적 일화를 통해 한국 도시화의 단적인 특성에 대해 언급하며 시작하고자 한다. 2011년 미국 워싱턴 대학교의 도시설계 및 계획학과에 박사 유학을 갔을 때의 일이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도시설계학자인 앤 무동(Anne V. Moudon)교수의 도시형태론 수업을 듣게 되었다. 어느 날 무동 교수는 한국의 청계천 복원사업 사례를 소개하며 수업 말미에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서울 사람과 시애틀 사람의 유전자를 섞어야 한다. 서울의 청계천 복원사업은 불과 27개월 만에 완료됐는데, 시애틀의 알래스카 고가 도로 철거 사업은 10여년 이상 지지부진하다.” 당시 이미 칠순에 가까웠던 그는 교수 재직 기간 동안 여러 한국 학생을 지도했으며, 미국과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여러 도시 개발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고 있는 분이었다. 그런 그가 서울의 도시 개발을 상당히 중점적으로 다루고 일정 부분 긍정하는 것을 보며, 그때까지 너무나 익숙하기만 했던 우리의 도시를 다시금 바라본 적이 있다. 이와 함께 시애틀의 도시 개발에 대해서도 서울과의 비교적 관점에서 관심을 가지게 됐다.1 계획 국가의 형성과 플레이어의 구성 한국의 정부 주도 도시화와 대규모 물리적 개발은 1960년대 계획 국가의 형성과 함께 본격화됐다. 당시 계획의 출발은 경제 계획이었으며, 1차적 목표는 재건이었다. 일제 식민지기(1910~1945)와 미군정(1945~1948)그리고 한국 전쟁(1950~1953)을 겪으면서 경제 부흥과 재건은 1950년대 한국이 당면한 핵심 과제가 되었다. 실제로 정부 수립 이후부터 1957년까지 정부 기획처나 소관 부처에서 많은 경제부흥계획서가 작성됐으며, 196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경제 재건이 아닌 경제 개발을 목표로 하는 경제개발3개년계획(1960~1962)이 국무회의에 제출됐다.2 하지만 1960년 4·19혁명과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경제개발계획은 연이어 늦추어졌으며, 마침내 1962년에 이르러서야 군부에 의해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이 본격 시행됐다. 이를 통해 중앙 정부 중심으로 국가 발전 계획을 제시하고 행동하는 권위적 토대가 마련됐으며, 한국 사람들은 경제 개발을 통한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집단적 의식을 공유하게 됐다. 다시 말해, 1960년대 한국은 중앙 정부 중심, 경제 관료 중심의 권위적 계획 기구(planning agency)가 사회의 총체적 변화를 주도하게 됐다. 따라서 지방 정부의 인사, 예산, 행정 등에 미치는 중앙 정부의 영향력은 지금의 선출을 기반으로 하는 지방 자치제에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당시의 계획 기구가 연이어 발표하는 국가 주도 발전 계획은 소련의 스탈린주의 경제 개발을 연상하게 해 부정적 우려를 초래하기도 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계획 기구와 공무원 집단은 관료제와 순환 보직 체제였기 때문에, 이들을 지탱하기 위한 전문가 집단으로서 대학교수의 역할이 계획 국가 초기부터 상당히 중요했다. 이후 한국의 경제 개발 및 사회 발전이 더욱 진전되고 고도화되면서 중앙 정부의 국정 연구 기관과 지방 정부의 시정 연구 기관들이 점차 설립됐으며, 오늘날에는 다른 선진국에 손색없을 만큼 풍부하고 다층적인 정책 전문 연구 기관이 설립 및 운영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정책 전문 연구 기관은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학술 연구 기관과 달리 설립 주체의 의도 및 지향점을 제도, 정책, 사업, 사례 등을 통해 시시각각 반영하고 현실화하는 계획의 싱크탱크think tank이자 계획 기구에 준하는 역할까지 감당하고 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2호(2019년 4월호) 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김충호, “시애틀 알래스카 고가도로 철거와 지하 대체 터널 건설”, 『건축과 도시공간』 15, 2014, pp.48~52. 2. 최상오, “1950년대 계획기구의 설립과 개편: 조직 및 기능 변화를 중심으로”, 『경제사학』 45, 2008, pp.179~208. 3. 이종석, “한국경제 반세기: 경제개발계획 시동”, 「이데일리」 2005년 5월 5일. 김충호는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공학과 도시설계 전공 교수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워싱턴 대학교 도시설계·계획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삼우설계와 해안건축에서 실무 건축가로 일했으며,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와 워싱턴 대학교, 중국의 쓰촨 대학교, 한국의 건축도시공간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분야의 교육과 연구를 했다.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건축, 도시, 디자인의 새로운 해석과 현실적 대안을 꿈꾸고 있다.
  • [시네마 스케이프] 더 페이버릿 평면에서 입체로, 평범에서 왜곡으로
    삐이익 삑, 핸드폰이 이런 소리도 낼 줄 아나 싶은 괴상한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땐 전쟁이라도 난 줄 알았다. 폭설이나 태풍을 예보하는 경보였다. 요즘은 주로 미세 먼지로 굉음을 낸다. 여러 사람이 모인 카페에서는 동시에 울리며 더 큰 소리로 퍼지지만 이젠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몇 해 전 요르고스 안티모스(Yorgos Lanthimos)감독의 ‘더 랍스터(The Lobster)’(2015)를 보고받은 충격은 다음 작품인 ‘킬링 디어The Killing of Scared Deer’(2018)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The Favourite)’(2019)는 대체 어디까지 가게 될까.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하거나 신화에 기대어 멀쩡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도 봤는데, 어지간한 기묘함과 충격에는 눈 깜짝 안 할 자신감이 생긴 터였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역사극이라 분위기는 이전보다 편했다. 18세기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 분)을 중심으로 권력의 실세인 사라(레이첼 와이즈 분)와 하녀 애비게일(엠마 스톤 분)의 밀고 당기는 관계를 그리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았는가. 궁중 사극에서 시기와 질투로 죽고 죽이며 인형에 바늘을 꽂는 그런 장면 말이다. 아침 드라마는 또 어떤가. 재벌 2세 실장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싸가지 없고 경우도 없는 악한 강자와 외로워도 슬퍼도 웃음을 잃지 않는 콩쥐형 주인공, 사약을 드링킹하거나 해외 도피하는 악한의 파국, 바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초긍정적인 주인공은 끝내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이야기 유형. 이제 식상하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2호(2019년 4월호) 수록본 일부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원고를 쓰고 있는 카페의 창문 밖으로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인다. 해가 기우는 하굣길에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태극기를 봐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영화를 보기 전, 팝콘 봉지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 동해물과 백두산을 봐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운동장은 시간이 멈춘 듯 아득했고, 극장 안의 분위기는 생뚱맞았다. 같은 민족의 통일을 앞두고 언제까지 남의 나라에서 남의 나라 눈치를 봐야할까. 여전히 아득하고, 생뚱맞다. 유관순 열사가 이 땅에서 독립을외친 지 올해로 100년이 흘렀다.
  • [에디토리얼] 새 광화문광장, 토론은 이제 시작이다
    지난 1월 21일, 새 광화문광장 설계공모 결과가 발표됐다.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적 공간이 겪게 될 변화에 여론이 들썩였지만, 대부분의 보도와 기사는 광장 재구조화의 당위성이나 도시의 미래에 대한 심층 논의보다는 동상 이전, 촛불 무늬 포장, 정부청사 경계와 같은 표피적 문제에만 집중됐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지엽적 논란 덕분에 광장 성형 사업 자체는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10년이 채 안 된 광장을 왜 지금 고쳐야 하고 2021년 5월까지 완공해야 하는가. 사업의 근본적인 목적과 과정에 대한 치열한 토론이 생략된 채 정해진 일정대로 광속의 주행을 마친다면, 우리는 또다시 관 주도 졸속 도시 공간을 마주하게 될 뿐이다. 화려한 수사로 가득한 서울시의 선언처럼 “광화문광장이 오는 2021년 차 중심의 거대한 중앙분리대라는 오명을 벗고 역사성을 간직한 국가 상징 광장이자 열린 일상의 민주 공간으로 탈바꿈,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속도보다는 방향, 결과보다는 과정을 지향하는 긴 호흡의 토론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광장 재구조화의 당위성과 목적에 대한 근본적인 재론뿐만 아니라 당선작과 수상작들이 제시한 설계적 해법에 대한 전문적인 토론도 병행되어야 한다. 특히『 환경과조경』과 같은 전문지는 대중 매체가 소화하기 쉽지 않은 심층 토론의 마당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3월호에는 많은 지면을 할애해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설계공모’의 당선작과 수상작들을 실었다. 이번 설계공모에는 477팀이나 참가 등록을 했지만 정작 70팀(국내는 38팀)만 최종 작품을 제출했다. 역사 도시 서울의 핵심 공간이자 4·19 혁명, 1987 민주화 항쟁, 촛불 시민혁명을 이끌어낸 현대사의 산실이라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조경가와 건축가는 왜 이 프로젝트를 외면했을까. 이미 기본계획 단계에서 모든 구상이 결정된 공모전, 한 치의 상상력도 허용하지 않는 공모 지침이 새로운 해석에 대한 도전 의지를 접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당선작 ‘깊은 표면(CA조경+유신+김영민+선인터라인건축)과 여러 수상작들이 꽉 막힌 설계 가이드라인의 장벽을 지혜롭게 돌파하며 광화문 일대는 물론 서울의 미래 도시 구조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점은, 결코 가볍게 평가할 일이 아니다. 세간의 전망과 달리, 조경가가 주도한 작업들이 당선작뿐 아니라 다수의 수상작에 선정된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전문적이고 다각적인 토론의 밑판을 마련한다는 의도로 이번 호 지면에는 이례적으로 다섯 편의 비평을 초대했다. 조경비평가 최정민은 광장 재구조화 사업의 “동인이 정치적 의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동상, 촛불, 교통 문제를 둘러싼 당선작 논란을 반박한 후 오히려 당선작의 특징은 “한국적 경관의 재구성”을 시도한 데 있다고 해석한다. 건축비평가 전진삼은 “광장의 정치화”에 드리운 부정적 측면을 우려한다. “민주 사회를 관통하는 역사적 경관으로서의 완성품”이 기획자들의 구상이라면 왜 굳이 거대한 광장이 필요한가라는 근본적 의문을 던지며, 광장의 정치화와 그 스펙터클은 공간의 모독이라고 일갈한다. 조경가 이수학은 우리에게는 광장에 대한 합의가 없었고 “누구도 광장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광장이라는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작동 가능한 민주주의의 이행을 요구했을 뿐인 시민의 열망과 달리, 광화문 일대의 도시 공간은 “정치적 욕망과 식민의 유산을 벗어나지 못한 관료와 기술자들에 의해 착실하게 개조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조각 전공의 예술기획자 진나래는 동상 이전과 철거를 둘러싼 이슈를 세밀하게 조회한다. 충분한 이해와 토론 없는 여론 몰이를 경계하며 그는, 광화문광장이 동상으로 인해 “소통과 발언의 광장”이 아닌 “권위의 전시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매체 전문가 박상현은 현재 광화문광장의 핵심 문제는 접근성 부족이 아니라 “그 존재의 이유가 규정되지 않은 공간”이라는 점에 있다고 본다. 광화문광장을 새로 조성하려 한다면 “이곳에 왜 광장이 있어야 하고, 사람들은 여기에 왜 와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광장은 박물관이 아니고, 사람들은 메시지를 들으러 광장에 가지 않는다”는 그의 견해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독자들의 다양한 생각을 공유하고자 올해부터 마련한 꼭지 ‘이달의 질문’에도 광화문광장 설계공모에 대한 여러 의견을 모았다. 작지만 소중한 이 조경 공론의 마당에 담긴 독자들의 의견 또한 광화문광장의 미래를 위한 토론의 토대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새 광화문광장, 토론은 이제 시작이다. 새 꼭지 ‘도면으로 말하기, 디테일로 짓기’의 첫 3회분 연재가 이달로 막을 내린다. 나성진 소장(얼라이브어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다음 세 달은 조용준 소장(CA조경)이 이어간다.
  • 비평: 새 광화문광장에 관한 풍문들
    “인간은 그 자신의 밀실에서만은 살 수 없어요. 그는 광장과 이어져 있어요.” _ 최인훈의 ‘광장’ 중 우리는 미술 시간에 풍경을 스케치하러 경복궁에 가곤 했다. 같은 교복을 입은 우리는 서로 다른 장소를 그렸다. 우리는 동쪽 문으로 들어가고 나왔다. 그곳이 정문인줄 알았다. 한글로 ‘광화문’이라고 쓰인 대문은 늘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앞은 광활한 16차선 대로와 마주하고 있었다. ‘광화문’과 ‘광장’은 전혀 관련이 없었다. 교보문고는 지적 피난처였다. 『조경학개론』을 거기서 샀다. 그무렵 동십자각 인근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교보문고에서 동십자각으로 가는 길은 미국대사관 뒷길이었다. 그 길이 삼청동에서 청계천으로 흐르던 물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세종대로는 늘 질주하는 차들로 가득하고, 인도는 철창을 단 버스와 무장한 전경들이 점유하고 있었다. 내가 다닌 길은 일종의 피마길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교실에서 “서양에 광장이 있다면, 동양에는 길이 있다”고 배웠지만, 광화문에는 광장도 없고 길도 없었다. 차량이라는 밀실은 넘쳐났다. 역사적 장소를 밀실로 점령당한 우리들은 그 사실조차도 자각하지 못했었다. 정치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난폭한 시절이었다. 그 난폭함을 중앙분리대의 은행나무가 중화하고 있었다. 지금도 해마다 가을이면 광화문광장에 간다. 학생들과 함께 간다. 북촌과 경복궁, 광화문광장을 거쳐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역사 공간 루트를 답사하는 일정이다. 2009년에 광장이 조성되고 광화문이 열린 덕분이기도 하다. 밀실들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아쉽다. 광장에서는 광화문으로 가기 어렵고, 광화문에서는 광장으로 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서로가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장은 세종문화회관에서도, 미국대사관에서도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중앙분리대”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주요 고비마다 이 장소에 모였다. “광화문과 광장이 연결되면 참 좋겠다.” 이곳을 답사할 때마다 학생들과 나누던 이야기다. 이것만으로도 광화문 앞 공간을 재구조화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지 않은가.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다. 꽤 오래전부터, 꽤 많은 사람이 소망하고 궁리해 왔다. 그 궁리들을 모아 실행하려는 권력이 나타났다.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설계공모’가 열린 것이다. 그 동인이 정치적 의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치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도시 공간 구현 사례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간의 생산과 소비에는 권력과 계급, 정치, 경제 같은 힘들이 관계한다.1 조선의 건국과 함께 한 ‘주작대로’, 조선 후기의 ‘육조전로六曹前路’, 일제 식민지기에 왜곡된 ‘광화문통光化門通’, 군사 정권 시대의 16차선 세종대로, 2009년에 조성된 현재의 광화문광장 등은 모두 권력과 정치의 산물이다. 다만 새 광화문광장은 역사성을 회복하는 장소이면서 시민들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소망을 담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르다. 2019년 1월 21일, 설계공모의 당선작이 발표되었다. “이순신·세종대왕 자리 옮기나…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설계 당선작 발표”2라고 즉시 보도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부정적이고 자극적인 보도들이 쏟아졌다. “‘이순신’ 빼고 ‘촛불’이라니요”,3 “이언주 ‘박원순 뭐길래 세종대왕·이순신 동상 치우나’”,4 “물구나무서는 이순신장군?…‘광화문광장’ 길을 잃다”,5 “이언주 ‘박원순, 대권놀음 빠져 광화문 광장 좌파 취향 훼손’”6 등이 그것이다. 외부 공간 설계가 이렇게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하는 톱뉴스가 되었던 적이 있던가.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풍문의 지층은 두텁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_ 최인훈의 ‘광장’ 서문 중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 동상은 치워지나 가장 먼저 나돈 풍문은 “세종대왕·이순신 동상 치운다”7는 것이다. “이순신장군이 물구나무선다”8는 풍문도 돌았다. 이를 들은 이는 “우리의 가장 빛나는 역사적 유산의 상징을 박 시장이 뭔데 함부로 치우냐”9고 강력하게 비난한다. 풍문의 지층은 점점 두터워진다. 당선작 ‘깊은 표면(Deep Surface)’은 주작대로를 계승하고 북악산으로 열린 옛 경관의 복원을 위해 세종대왕·이순신장군상 이전을 제안한다. 그분들이 누구인지와 상관없이, 동상이라는 서구적 모뉴먼트를 그대로 두고 주작대로를 계승하고 옛 경관을 복원한다는 것은 설계자의 양심에 반하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서구적 모뉴먼트가 시선을 지배하는 공간을 대한민국의 대표 역사 경관으로 내세우는 민망함을 피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당선작은 수상작 10팀(본상 5팀, 가작 5팀) 가운데 유일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두 동상의 이전을 제안한다. 세종대왕상은 세종문화회관 옆으로, 이순신장군상은 옛 삼군부 터로 이전하여 동상과 공간적 맥락의 연계를 모색한다. 두 동상이 왜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를 수긍할 수 있는 공간적 맥락을 만들려는 것으로 이해된다. 풍문처럼 세종대왕·이순신장군상을 치우는 것이 아니고, 이순신장군상을 물구나무 세우는 것도 아니다. 역사적 유산의 상징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동상과 역사적, 공간적 맥락을 결합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이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을 그렇게 존중하고 아낀다면, 지금 동상처럼 이순신장군이 왼손잡이인지, 삼도수군통제사가 왜 15m 높이 기둥 위에 위태롭게 서서 매연을 뒤집어써야 하는지, 세종대왕은 왜 이순신장군 뒤에 앉아 있어야 하는지, 이분들은 왜 모두 경복궁을 등지고 있어야 하는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중략) 각주 정리 1. Lefebvre, H., The Production of Space, BlackwellPublishers, 1991. 2. 권영은, “이순신·세종대왕 자리 옮기나…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설계 당선작 발표”, 「한국일보」2019년 1월 21일. 3. 정지섭, “이순신’ 빼고 ‘촛불’이라니요”, 「조선일보」 2019년 1월 22일. 4. 김은빈, “이언주 ‘박원순 뭐길래 세종대왕·이순신 동상 치우나’”, 「중앙일보」 2019년 1월 23일. 5. 정우교, “물구나무서는 이순신장군?…‘광화문광장’ 길을 잃다”, 「일간투데이」 2019년 1월 23일. 6. 김도형, “이언주 ‘박원순, 대권 놀음 빠져 광화문 광장 좌파 취향 훼손’”, 「아주경제」 2019년 1월23일. 7. 4번 기사 8. 5번 기사 9. 4번 기사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최정민은 순천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설계 실천과 교육 사이의 간극을 고민 중이다. 대한주택공사에서 판교신도시 조경설계 총괄 등의 일을 했고, 동심원 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으로 다양한 프로젝트와 설계공모에 참여했다. 제주 서귀포 혁신도시, 잠실 한강공원, 화성 동탄2신도시 시범단지 마스터플랜 등의 설계공모에 당선되었다. 조경비평 ‘봄’ 동인으로 현실 조경 비평을 통해 조경 담론의 다양화에 기여하고 싶어한다.
  • 비평: 광장의 정치화를 모독한다
    나는 광장에 서는 것을 기피한다. 체질적으로 광장이 내 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내게 광장은 여러모로 불편하다. 광장은 크고 작은 행위를 담아내는 무대이며 동시에 객석을 포함하는 극장이다. 그럴 때 광장은 존재 의의를 찾는다. 그 안에는 여러 유형의 인간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어울리기로는 광대가 대표적이다. 더욱이 크라운(crown)을 머리에 얹은 광대가 있으면 광장은 더욱 빛난다. 광대와 광장이라니. 나는 지금 언어의 유희로 광장을 모독하려 든다. 오늘날 우리에게 광장은 진정성의 기표다. 민주 공화국임을 상징하는 신성한 곳이다. 더 이상의 신성 모독은 죄악이다. 고로 광장을 거부하는 것은 죄악이다. 나는 죄인이다. 광장의 시작은 한 인간의 작은 신체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자신이 광장의 시작점이라는 생각을 갖지는 못한다. 하나둘 신체들이 접촉하면서 만들어지는 물리적 광장 이전의 세포cell들은 언젠간 완성형으로 만나게 될 광장이란 이름의 바디body가 얼마나 위대한 장소가 되어 자신들을 선동하는 장치가 될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런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한 정치가 대부분은 위대한 광장의 빛나는 광대임을 자임한다. 광장에서의 소통이 민주 사회의 역군임을 보증받는 일이기에 그곳에서는 정치적 노선의 다름을 불문하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광대의 옷을 몸에 걸친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는 광장은 로마 시대 권력자들이 발가벗고 정치하던 대목욕탕과 같이 입바른 소리와 몸에 맞지 않는 위선의 행동으로 빨갛게 노랗게 파랗게 물들여졌다가 이내 썰물이 빠져나간 것처럼 텅빈다. 그래서 광장은 주조색이 없다. 그때그때 물들여지고 이내 지워짐을 반복한다. 광대가 아무리 많아도 광장을 지배하지 못하는 이유다. 광대의 진정성은 말하기를 멈추고 몸짓으로 말을 전한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광장에서 만난 수없이 많은 인파의 손에 들린 촛불과 팻말과 태극기는 각자가 시위하는 이유를 담아냄으로써 광대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것이 구호에서 몸싸움으로 번지면서 어느덧 광장은 광대의 손을 떠나 전투사들의 격전이 벌어지는 투기장으로 변한다. 누구도 이러한 광장에서 진정성을 찾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축제의 광장 이면에는 늘상 일그러진 풍경의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전진삼은 종합 예술지 『공간』 편집장, 건축 정론지를 표방한 『건축인 포아(POAR)』 창간인 겸 초대 편집인 주간을 거쳐 현재 격월간 『와이드AR』의 발행인 겸 편집인이다. 건축 비평서 『건축의 발견』, 『건축의 불꽃』, 『조리개 속의 도시, 인천』, 『건축의 마사지』 등을 썼고, 구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를 반대하는 건축과 미술, 고고학 전문가들의 생각을 모은 『건축은 없다?』, 『건축인 30대의 꿈』, 『건축 사이로 넘나들다』 등 30여 책의 공저자로 함께했다.
  • 비평: 광무11년 7월 31일 한성, 모든 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대체 광화문광장을 생각할 때 밀려오는 난감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장소 부정합성에 따른 무기력증을 동반한 직업병에서 기인한 것인지, 소실된 장소가 주는 망각과 삶의 표피의 간극에서 발생한 상실감을 동반한 우울증인지 가늠할 수 없어 스스로에게 몇 가지 사소한 질문을 놓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헌법이 말로 규정한 대한민국이라는 실체에 대한 정의라면 멀리 청와대와 정부청사,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세종문화회관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작동케 하는 정부와 문화가 있는 공간적 실체다. 광화문광장은 그 중심에 있다. 그것이 설령 조선 시대 오백 년의 역사적 공간과 중첩을 이룬다 하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지금의 광장 또 앞으로의 광장 어디에 임시 정부의 법통과 4·19의 기억이 있는가. 조선조 오백 년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역사로서 남아 있으면 아니 되는가. 이순신장군상이 가진 불순한 의도를 알면서 굳이 세종대왕을 앉히고, 월대를 넓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 그 모든 것이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면 이해하겠다. 광장은 원래 정치적 공간이다. 그들의 정치야 여전히 밀실에서 이루어지지만 인민2의 정치는 광장에서 이루어진다. 촛불이 그랬고, 명박산성이 그랬고, 6·10이 그랬고, 4·19가 그랬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광장이 아니었을 때도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광장에서만 가능하다는 논거는 성립할 수 없고, 민주주의는 어디서고, 어느 때고 작동 가능한 것이 되어야 한다. 다시 얘기하자. 광장은 정치적 공간이나 광장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굳이 광장을 만들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문제가 광장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묻게 된다. 광장 안의 문제라고 하면 광장의 형식과 기술적 해결이 문제가 될 것이고, 광장 밖의 문제라면 광장의 존재 이유와 인민의 합의가 아닐까. 광장 안의 문제는 경관이나 프로그램, 교통 같은 기술적 문제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광장은 그릇과 같아야 한다. 거기에 정치가 담기든, 축구공이 담기든, 노란 종이배가 담기든, 성조기가 담기든, 광장은 그 모두를 담는다. 내용이 정치냐 문화냐의 차이가 있을 뿐 광장 자체가 어느 한 시대의 정치색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촛불도 마찬가지다. 내용물이 흘러 쏟아지지 않게 그릇을 만들면 될 일이지 그릇에 광어회를 그려 넣거나 감자탕을 그려 넣고 배불리 드시라고 얘기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니 광장은, 그 형태나 형식은 광장 밖의 문제를 공간으로 풀어 수용하나 광장 밖의 문제에 갇혀 넘어서지 못한다. ...(중략) 각주 정리 1. “하지만 1907년 고종이 강제퇴위 당한 직후 일본의 압력으로 설치된 성벽처리위원회에 의해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면서 도성은….”, “내각령 제1호, <성벽처리위원회에 관한 안건> 제1조 성벽처리위원회는 내부, 탁지부, 군부 세 대신의 지휘 감독을 받아서 성벽을 헐어 철거하는 일과 그 밖에도 이와 관련한 일체 사업을 처리한다. …제5조 본 영은 반포일부터 시행한다. 광무11년 7월 30일 내각총리대신 훈2등 이완용”, 서울역사박물관 편, 『서울 한양도성』, 서울역사박물관, 2015, p.54 중. 2. 1919년 4월 11일 제정된 임시정부법령 제1호 ‘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 사용한 용어다.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이수학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이원조경에서 4년 동안 일했다. 프랑스 라빌레뜨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 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받았고, 2003년부터 아뜰리에나무를 꾸리고 있다. www.ateliernamoo.xyz
  • 비평: 새광장의 주인, 동상의 주인
    최인훈이 소설 ‘광장’을 통해 말하듯 우리의 존재 양태는 밀실만으로, 또는 광장만으로 충족되지는 않는다. 물론 ‘광장’에서 밀실과 광장의 개념은 사회주의, 자유주의와 같은 이념 추구와도 관계가 있겠지만, 굳이 이념적 입장이 아니어도 밀실을 개인주의적 삶, 광장을 사회적 삶과 발언의 비유적 표현이라 볼 때 역시 그러하다. 실은 머리로는 광장을 추구하지만 몸으로는 여전히 밀실을 추구하는 사람, 건물로 둘러싸인 커다란 공터나 폭발적 에너지로 넘쳐나는 군중 사이에 있는 것에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인 나는,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가 그리는 휴먼 스케일의 도시 내 커뮤니티를 추구하면 했지 그다지 광장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광장을 중히 여기고 그 존재 방식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밀실이든 광장이든 어떤 것이 필요할 때 그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고, 어느 한쪽의 존재가 없다면 이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광화문광장의 조각상을 둘러싼 논쟁은 조각과 출신인 나에게 관심이 가는 논제일 수밖에 없었다. 광장을 광장이게 하는 요소는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저 물리적으로 너른 공간을 확보한다 해서 그것이 광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광장의 의미는 사람들이 그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완성된다. 광장은 실재적, 물리적, 일상적 공간이면서 상징적 공간이고, 비워진 공간이면서 동시에 활동으로 채워지는 공간, 그리고 이를 위한 적당한 밀도의 물리적 요소가 필요한 공간이다. 같은 광장이라도 어떻게 디자인하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아고라가 되기도, 또는 반대로 제의적 공간이나 전체주의적 권력의 전시장이 되기도 한다. 10년 전 광화문 세종로에 광장이라 불리는 어정쩡한 공간이 생겼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하기도 했을뿐더러 그 형태나 내부 밀도를 생성하는 요소들의 배치 역시 광장이라 하기엔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면 군부 정권의 직선적 힘과 미학을 전시했던 쭉 뻗은 대로와 동상이 있던 공간에 사멸한 광장을 되살린다는 상징적 의미에 주안점을 둔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시민의 활동에 따라 아고라로서 광화문광장의 역할은 점점 더 커졌으며, 그만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요구도 생겨났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진나래는 조각과 사회학을 전공했으며, 사회와 예술, 도시, 인류학과 기술·문화 등에서 발생하는 타자성과 윤리의 문제에 흥미를 느낀다. 2012년 ‘일시합의기업 ETC(Enterprise of Temporary Consensus)’를 공동 설립하여 활동한 바 있다. 현재 학업과 작업을 병행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17년 2월부터 12월까지 『환경과조경』에 “예술이 도시와 관계하는 열한 가지 방식”을 연재한 바 있다.
  • 비평: 광화문 광장에 대한 논의, 이제 시작이다
    당선작이 현재의 공간에서 많은 진전을 이룬 디자인인 것은 분명하다. “세계 최대의 중앙분리대”라고 조롱받던 공간이 광화문의 월대나 해태상 같은 요소를 재현하면서 광장의 역사성을 회복·강조하고, 차도 한가운데 위치했던 광장이 서쪽 보행 공간과 온전하게 합쳐지면서 시민들이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공간으로 변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질문이 있다. 이 광장이 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느냐다. 그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이 있냐는 점에서 보면, 이번 설계안도 과거의 시도와 거의 다르지 않다. 즉 ‘수도 서울이 자랑할 수 있는 번듯한 광장을 가져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시민들이 왜 그 장소를 필요로 하느냐’는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노력에 앞서버린 느낌이다. 횡단보도나 지하도를 통해서만 갈 수 있는 ‘접근성의 부족’은 광화문광장이 가진 중요한 문제지만,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현재 광화문광장은 그 존재 이유가 규정되지 않은 공간이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는 시민과 관광객이 광장을 이용하는 모습을 조금만 관찰해봐도 알 수 있다. 대개 횡단보도를 건너 광장에 도착한 후 분수대나 세종대왕상 앞에서, 혹은 경복궁 너머 북악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전형적인 광장 이용 패턴이다. 그 밖에 노조나 관이 하는 성격이 짙은 행사에서 대형 스피커 탑과 무대, 간이 의자들을 광장에 늘어놓는 정도가 현재 광장의 용도다. 즉 대규모 집회가 아니면 일반 시민들은 광장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광화문 앞 세종로의 탄생, 서울 도심의 전통적 구조와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 서울 도심에서 사람의 흐름, 상업 공간의 배치는 종로, 청계천, 을지로 등에서 볼 수 있듯 동서의 축으로 이루어진다. 그에 비하면 남북으로 흐르는 도심 도로들은 빈약하고 보행량이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화문 앞 세종로 공간이 대형으로 조성된 이유는 그곳이 바로 왕이 행차하는 권력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즉 경복궁에서 출발하는 권력의 투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지, 백성 혹은 시민이 이용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공간이다. 물론 지금 경복궁은 권력의 공간이 아닌 역사적 유물이 되었고, 청와대가 인근에 있다고 해도 광화문 앞 도로를 권력의 과시용으로 사용하는 시절은 지났다. 하지만 세종로는 여전히 정부청사와 미국대사관, 세종문화회관 등 힘 있는 건물들이 들어선 공간일 뿐 시민들이 즐겨 찾는 시설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시민들은 그 자리에 아름다운 광장이 하나 있다고 해서 찾아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굳이 간다고 해도 그곳에 들렀다는 증명사진 한 장 찍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어 자리를 뜨게 되는 것이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박상현은 사회학과 미술사를 전공하고,현재 미디어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메디아티(mediati)에서 콘텐츠랩장으로 일하고 있다.「서울신문」등의 매체에 미디어와 테크놀로지,미국 정치에 관한 글을 쓰며『영국에서 사흘 프랑스에서 나흘』,『아날로그의 반격』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