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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집요와 집착 사이
    1. 며칠 전, 두어 달 가량 설계가 진행되고 있는 장소에 다녀왔다. 상하이는 비행기로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비교적 가까운 도시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현장을 자주 방문하기가 쉽지는 않다. 도면으로 구조를 파악하고 사진으로 현장을 살펴보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따른다. 준비해 간 도면을 펼쳐보는 순간 ‘아, 이건 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면에서는 그럴듯했는데, 현실 공간을 마주하다 보니 뭔가 설계안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디자인(혹은 설계 작업)은 항상 어렵고 두렵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시작된 그 작업에 대한 여러 가지 복잡한 궁리는 긴 밤까지 이어졌고, 골똘한 생각에 결국 그날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2. 설계 작업은 실재하는 어떤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연속적인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창작 행위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창작 행위는 때때로 얼토당토않은 어떤 궁리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태동된 궁리(窮理)는 작업하는 내내 집요(執拗)와 집착(執着) 사이를 무한 반복하다가 결국은 그 사이 어느 지점에서 지쳐 멈춰 서게 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차츰 정리된 설계 도면으로 진화한다. 그러면 모든 설계 작업(적어도 나의 경우에 있어서)의 시발점인 ‘궁리’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내가 이 말을 좋아하는 것은 우선 그 어감이 가지는 소박함에 있다. 권위적이지 않고, 어떤 발칙한 생각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그저 궁리일 뿐이니까). 정리되지 않은, 아직 불확정적인 생각들을 이리저리 상상해 보는 것이므로, 아니다 싶으면 누가 눈치 채기 전에 간단히 포기해 버릴 수도 있다. 아무도 내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궁리에는 장소의 제약이 거의 없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회의장에서도, 하염없이 막히는 도로 위에서도,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가능하다. 그런데 궁리는 가만히 한곳에 멈추어 있지 않고 집요와 집착이라는 두 지점을 부지런히 오간다. 이게 문제다. ‘집요함’은 때때로 좋은 에너지를 유발한다. 반면에 ‘대충’ 혹은 ‘대강’이라는 말은 생활 현장에 있어서 지혜로운 단어로 이해될 수 있지만, 디자인에서는 독이 되는 단어들이다. 좋은 디자인은 집요함이라는 동력을 필요로 한다. 이에 반해 집착은 집요함이라는 동력이 너무 세게 작동한 경우다. 집착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너무 멀리가면, 혹은 너무 오래 머물면 되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완전히 그 아우라에 장악되어 폐인이 되기 십상이다. 인간관계에서나 디자인에서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거기에 치명적인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중에는 비상(砒霜)처럼 경우에 따라 약이 되는 것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관성(慣性)이다. 이것은 제어할 수 없는 힘이다. 집착에 갇힌 궁리는 좋은 디자인으로 진화하지 못하고, 고사하고 만다. 얼핏 보면 그냥 낙서 같은 드로잉이지만 때로는 아주 중요한 설계의 단초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이렇게 기록된 이미지들은 그 자체가 동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호작용을 통해서 더 발전된 생각으로 진화한다. 3. 이쯤에서 다시 정리해 보자. 설계 작업에 있어서 궁리는 아주 유용한 행위이며 그 주체는 전적으로 디자이너 자신이다. 이것은 충분히 즐길 만한 가치를 가지지만 집요함이라는 동력을 얻어야 하고 집착을 경계해야 한다. 집요와 집착 사이를 이리 저리 오갈지라도 최종 종착지에서 집착까지의 거리는 멀수록 좋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들이 기록되고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천재가 아니므로. 4. 나는 ‛design’, ‛incubator’라고 새겨진 두 개의 스탬프를 가지고 있다. 십여 년 정도 된 것 같다. 작업 과정을 메모하고 여러 가지 생각들, 그러니까 ‘궁리’들을 모아놓은 노트에 부여하는 작은 별칭인 셈이다. 몇몇 학교에서 설계 스튜디오를 진행하면서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에게도 이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design incubator’에는 덜 익은, 날 것 같은 생각에서부터 설계 치수가 제법 구체적으로 명시된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이미지들이 두서없는 텍스트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어차피 인큐베이터의 속성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정상적으로 출산된 아기에게 인큐베이터가 필요 없듯이, 이 노트는 잘 정리된 책자와는 완전히 격(格)이 다른 물건이다. 지면에 기록하는 이미지들은 가장 기본적인 도구들, 즉 연필 혹은 펜으로 생성된다. 무엇보다 간편하기 때문이다. 용도가 단순한 물건일수록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드로잉들이 무슨 예술적인 가치를 가지거나 그래픽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럴필요가 없다. 집요와 집착 사이를 부지런히 오고 갔던 생각들을 그저 형상화해서 기록하면 되는 것이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오래된 노트들을 다시 열어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이미 시공 단계를 거쳐 준공된 작업들도 여럿 있지만, 열정적인 작업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한 이유들로 인해 사산(死産)된 작업들, 어정쩡한 집착과 치기어린 객기 때문에 좋은 디자인으로 진화되지 못한 채 지면에 감금된 작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민낯을 공개하는 것 같아 민망하다. 5. 작업의 초기 드로잉은 대체로 간단한 메모로부터 시작된다. 상상 속에서 사이트를 대략 가늠해보고 중요한 키워드 혹은 기호 비슷한 것들을 끼적여본다. 작업의 순서는 전혀 의미가 없고 생각나는 순서대로 기록한다. 몇 십만 평의 대지를 다루는 작업에서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철제 펜스의 기둥 두께를 가장 먼저 메모하기도 한다. 그래도 어느 정도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평면도 비슷한 드로잉이라도 생산해 낼 수 있었다면 그날의 궁리는 성과가 좋은 셈이다. 6. 평면과 단면은 공간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드로잉이다. 조경 설계는 기본적으로 공간을 구축(構築)하기보다는 공간을 직조(織造)하는 행위에 가깝다. 여러 조형 요소들이 수직적으로 적층되어 있기보다는 수평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를 이룬다. 그것들은 빈틈없이 하나의 평면을 긴밀하게 구성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 구성이 가지는 기능을 잠시 삭제해 보면 남는 것은 패턴뿐이다. 평면도라는 것은 결국 패턴으로 시각화된다. 물론 도상의 모든 패턴들은 단순한 그래픽이 아니라 기능을 가진 형태로서 기능하지만, 어떤 요소들은 동일한 성능을 발휘하면서도 다양한 패턴으로 형상화될 수 있는, 그러니까 기능보다 형태가 좀 더 중요한 디자인 요소로 해석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 경우 어떤 형태(혹은 패턴)를 만들지는 전적으로 디자이너에게 우선권이 있다. ‘우선권’이라기보다는 ‘책임’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겠다. 아무튼 디자이너가 생산해내는 드로잉의 대부분은 바로 이 작업에 집중되어 있다. 7. 공간을 직조하는 행위, 즉 최종적으로 패턴을 디자인하는 작업 방식에는 대체로 두 부류가 있다. 첫 번째는 드로잉을 우선하는 부류다. 이들은 대부분 설계 경험이 많은 사람들인데, 손이 빠른 사람들이다.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대안들을 생산해 낸다. 편차가 많기는 해도 그 속에 썩 괜찮은 대안이 존재할 확률은 대단히 높다. 두 번째 부류는 궁리를 우선하는 부류다. 나도 이 부류에 속한다. 머릿속에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기 전까지는 가급적 드로잉을 시작하지 않는다. 많이 망설이면서 작업하는 스타일이다. 생산되는 대안의 수는 지극히 제한적이지만 궁리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시행착오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그런데 이 부류가 가지는 치명적 단점은 궁리가 길어질수록 집착이 강해지고 결국은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8. 편의상 ‘W프로젝트’라고 부르겠다. 작은 지방 도시에 있는 오래된 온천장을 제법 규모가 큰 온천형 리조트로 조성하는 작업이었다.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이 프로젝트는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드로잉과 설계 도면만 존재할 뿐이다. 온천욕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참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업이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조경 설계의 중요한 작업은 야외 스파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 나라의 노천 온천이나 스파 리조트 같은 곳들을 다녀보긴 했지만, 설계 작업을 해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초기안의 디자인 제안은 스파(spa)와 식물원(botanic garden)을 결합하는 아이디어로 출발했다. 이른바 ‘보태니컬 스파(Botanical Spa)’. 여느 워터파크나 스파 리조트에서 보듯이, 식물 요소들은 대체로 수 공간 주변을 치장하거나 기능적으로 공간을 구분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반면에 우리가 제안한 W프로젝트는 마치 식물원 안에 야외 스파를 만드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어떤 새로운 개념을 잘 설명하려면 적절한 도구가 필요하다. 특히 건축주가 경험이 없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드로잉은 디자이너의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유용한 도구가 되지만, 의사소통을 위한 최적의 도구는 아니다. 좀 더 친절하고 읽기 쉬운 그래픽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진화된 드로잉’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W프로젝트를 위한 진화된 드로잉은 좀 더 구체화된 평면 이미지(패턴 이미지)와 그것을 입체화한 개념 모형이었다.이 개념 모형은 우리가 설계 작업 과정에서 생산해내는 ‘스터디 모형(study model)’과는 좀 달랐고 상당히 사실적인 표현이 가미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드로잉들이 건축주의 공감을 끌어내는 것에 실패했다. 그것은 이미지, 패턴 혹은 디자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왜 식물원과 스파를 결합해야 하는지를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건축주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이 개념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두 번째 대안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직선은 공간을 장악하는 힘이 강하다. 아무리 가는 선이라도 시점과 종점을 단번에 거침없이 연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막강한 힘을 가진다. 직선은 곡선과 반대되는 말이지만 ‘자연’과도 대척점에서 있는 말이기도 하다. 두 번째 대안은 주변의 자연과는 사뭇 구분되는, 직선이 강조된 형태였다. 다양한 높이에서 야외 스파 영역을 부감할 수 있는 조건에서는 공간이 가지는 조형적 질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면도는 공간을 가장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기는 하나 주관적인 시점을 상실하기 때문에 공간을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모형을 만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형은 설계자의 생각을 검증하는 유용한 도구이면서,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효과적인 장치다. 여기에 더해 다양한 카메라 작업을 통해 그 효과를 배가 시킬 수 있다. 아무튼 두 번째 대안은 건축주의 동의를 얻음으로써 설계안으로 발전할 동력을 얻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첫 번째 안에 대한 미련을 접을 수 없었다. 이런 것이 집착이다. 그런데 집착도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본 설계가 어느 정도 정리될 무렵, 우리는 또다시 세 번째 대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건축주도 참 집요하다. 적게 잡아 이번이 세 번째 대안일 뿐 그동안 소소한 조정안까지 포함하면 열 번 이상의 조정 과정을 거치는 중이었다. 설계 작업이라는 것이 원래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번 대안은 직선 요소를 대폭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자연과 분리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완전히 다른 대안이 되어 버린다. 이 지점에서 디자이너는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진다.작업은 여기까지만 진행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정리된 설계안은 결국 현실 공간에 등장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사업이 중단되었다고 들었다. 9. 설계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집착이라는 수위를 넘나들면서 집요하게 ‘궁리’를 지속시키는 과정이다.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흥분과 걱정이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금전적 대가는 바로 그 과정을 견디고 지나는 수고에 대한 보상인 셈이다.이 시간에도 수많은 조경가들이 이 지난한 통로를 지나고 있다. 드로잉을 생산하고, 설득하고, 목청을 한껏 높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디 이것뿐이랴. 재미가 있지 않은가. 고요한 작업실에 앉아 백지를 잠자코 바라보는 순간이 행복하다. 이 궁리의 끝이 어디인지를 상상해보는 것도 즐겁다. 우리는 이렇게 산다. 박승진은 아직까지 조경 설계라는 마당을 떠난 적이 없으며, 이 마당에 맞닿아 살고 있는 다양한 이웃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조경이라는 특징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가치 있고 정교한 작업을 늘 꿈꾸지만 그것도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읽고, 쓰고, 가르치며, 배우는 일상에 감사하고 있다. 1965년 서울 생으로, 성균관대학교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 디자인을 공부했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조경설계 서안에서의 설계 실무를 거쳐, 2007년에 디자인 스튜디오 loci를 열었다.
  • [에디토리얼] 성큼 다가온 광주 IFLA 2022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IFLA 2022)가 반년 앞으로 다가왔다.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광주광역시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릴 이번 행사의 주제는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다. ‘다시, 조경의 공공성’을 소환해 기후 위기 시대의 조경을 논의할 IFLA 2022는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통과한 국내외 조경가들의 열띤 토론장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3월호에는 IFLA 2022의 주제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미리 만나보는 특집을 마련한다. 더 상세한 내용은 대회 공식 홈페이지(ifla2022korea.com)에서 살펴볼 수 있다. 기획 의도를 밝힌 조경진 조직위원장(한국조경학회 회장)의 글에서 볼 수 있듯, IFLA 2022는 전 세계 조경가들이 모여 조경의 미래 좌표를 구상하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국내 조경계의 활로를 여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가 말하듯 이번 행사는 세계 조경의 최신 흐름과 글로벌 의제를 공유하는 기회이자 한국 조경의 성과를 알리는 기회이며 조경 문화의 과거와 미래를 잇고 엮는 역할을 할 것이다. 배정한(조직위 학술위원장)의 글은 대회 주제의 의미를 짚어본다.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동시대 도시가 마주한 기후변화, 인구 감소, 도시 쇠퇴와 재생, 도시 정의와 형평성, 라이프스타일과 미감의 다양성 등 복합적 난제를 풀어갈 조경의 사회‧문화적 좌표라고 할 수 있다. 김아연(조직위 기획위원장)은 IFLA 2022의 일정과 장소, 강연, 답사 등 다양한 사전 행사와 본 행사, 사후 행사의 주요 내용을 꼼꼼히 소개한다. 2월 말로 마감한 논문 초록 접수는 추후 연장될 예정이므로 마감 날짜를 놓친 독자들은 홈페이지의 공고문을 꼭 확인하시기 바란다. 오화식(조직위 산업‧재정위원장)은 대회 기간 중 한국조경협회 주관으로 개최될 조경산업전(K-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 엑스포)의 방향, 프로그램, 조직을 안내한다. 이번 산업전은 한국 조경 업계가 내일을 향해 ‘리:스타트’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은다. 김영민(조직위 학생위원장)의 글은 IFLA 학생설계공모전과 학생 샤레트의 주제, 진행 방식, 의의를 소개한다. 그의 말처럼 IFLA 2022의 학생 프로그램은 다음 세대 조경의 새로운 향방을 미리 그려보고 지역의 한계를 넘어 세계적인 비전과 안목을 공유할 기회가 될 것이다. 서영애(조직위 홍보위원장)는 IFLA를 비롯한 여러 국제 행사 참가 경험을 되돌아보며 초록 접수와 등록, 개회 행사와 기조 강연, 발표와 포스터 전시, 폐막식 등의 이모저모를 살핀다. 김태경(한국조경학회 수석부회장)의 글은 30년 전 가을, 서울, 경주, 무주에서 열렸던 IFLA 1992의 추억과 에피소드를 재생한다. 많은 독자들이 기억하듯, 1992년은 세계조경가대회 개최를 계기로 한국 조경이 도약한 해였다. 편집부 이수민 기자가 옛 잡지를 다시 펼쳐 IFLA 1992의 다양한 장면과 기억을 재구성한다. 아울러 이달 지면에는 IFLA 2022의 기조강연자 중 한 명인 단 로세하르더(Daan Roosegaarde)의 최근 연작, 드림스케이프를 싣는다. 네덜란드 출신의 아티스트이자 글로벌 혁신가인 단 로세하르더는 사람, 기술, 공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상상력 넘치는 작업을 선보이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디자인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든다는 그의 작업 태도를 관통하는 핵심 가치는 ‘스혼헤이트(schoonheid)’다. 김모아 기자의 인터뷰에서 볼 수 있듯, 이 네덜란드어 단어는 “창조성에서 나오는 아름다움, 공기와 에너지에서 비롯된 깨끗함”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품고 있다. “내게 디자인은 의자나 램프를 제작하는 일이 아니라 삶을 개선하는 일이다. 상품이든 도시든 경관이든 디자인을 할 때 스혼헤이트를 기준으로 삼아 아름답고 사용하기 좋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을 창조해야 한다.” 그로우, 어반 선, 시잉 스타, 스파크로 이어지는 연작 드림스케이프는 로세하르더의 작업에서 우리가 풍부한 상상력의 예술가, 머릿속 아이디어를 구조화하는 건축가, 디자인과 기술을 융합하는 엔지니어, 환경 문제를 고민하는 환경운동가의 면모를 동시에 느끼게 되는 이유를 생생히 보여준다. 그의 작품을 종이 잡지에 온전히 옮기기란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면에 첨부한 QR코드에 접속해 드림스케이프에 담긴 로세하르더의 상상과 실험을 마음껏 감상하시길 권한다. [email protected]
  • [풍경 감각] 님도 즐!
    2000년, 온라인 게임이 유행이었다. 집에서 ‘라이온 킹’이나 ‘고인돌’ 같은 걸하던 나와 친구들은 같은 게임, 같은 서버에서 캐릭터를 만들어 함께 모니터 속을 여행했다. 그런데 레벨이 높아질수록 초등학생이 아닌 척 해야 했다. 고급자용 사냥터에서는 ‘그룹사냥’이 필수였지만 어린이를 잘 끼워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딩’은 ‘노매너’라서 같이 사냥할 수 없다고 했다. 그곳에는 일종의 규칙이 있었다. 때론 불만족스러운 역할을 맡더라도 공격수는 공격하고 보조자는 보조하면서 던전 끝에 다다를 때까지 각자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파트너의 실력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욕을 하면 안 된다. 욕심이 나도 다른 사람의 아이템에 손대지 않는다. 다른 던전을 찾아가기 귀찮더라도 다른 유저가 게임 중인 사냥터에 난입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룰을 어기면 다른 유저들은 게임 룰을 알려주는 대신 “님 초딩이셈? 즐!”을 외쳤다. 요새는 ‘노 키즈 존’ 팻말이 걸린 공간을 자주 마주친다. 대개 ‘죄송하지만 다른 손님들의 편의를 위하여…’로 시작하는 안내문은 곱게 윤색한 버전의 “님 초딩이셈? 즐!”로 보인다. 시간과 돈을 들여 방문한 곳에서 ‘즐겜’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우리가 어린이에게 줄 것은 “즐!”이 아니라, ‘그룹사냥’에 끼워주고 ‘룰’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은 아직 어리기에 철이 없고 규칙을 모를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우리가 그랬고, 또 우리의 조카나 아들딸이 그렇듯이. 이 사실을 잊은 안내판을 보며 혼자 말해본다. “님도 즐!”
  • [어떤 디자인 오피스] 본시구도 삶의 터전, 그 본래의 구도를 추구합니다
    선릉 경치를 즐기기 위해 지하철 9호선 선정릉역과 2호선 선릉역 사이에 있는 본시구도 사무실. 처음 찾아오는 이는 몇 호선 열차를 타야 할지 잠시 고민할 것이다. 어느 역이라도 좋다. 역에서 내린 다음 선릉을 둘러싼 돌담길을 잠시 걸어보자. 돌담 뒤로 자리 잡은 언덕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의 왕릉이다. 길에서 왕릉을 제대로 감상하기는 쉽지 않지만, 4층에 있는 본시구도 사무실에서는 왕릉의 봉분은 물론 그 앞에 늠름하게 서 있는 문인석과 무인석까지 전부 시야에 담을 수 있다. 건물 4층에 올라오면 다시 한번 목적지를 확실히 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복도의 중간쯤에서 멈춘다면 ‘본시건축’ 간판을 보게 될 것이고, 복도 끝까지 가게 될 경우는 ‘본시구도’ 사무실에 도착할 것이므로. 파트너사인 본시건축에 특별한 용무가 있다면 복도 중간에 멈추는 것을 말리지는 않겠다. 그러나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본시구도 사무실에서만 선릉 경치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사실, 4월부터 본시건축과 이 경치를 함께 볼 수 있게 됐다). 본래의 구도를 찾다 “본시구도(本是構圖)입니다.” 처음 회사 이름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하다. 회사 이름이 어렵다고 하거나, 무슨 뜻이냐고 되묻는다. 창립 전 회사명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길었다. 수십 번 회의를 하고 수십 가지 대안을 만들었다. 조경을 전공하고 10여년을 현업에서 종사했지만, 언제나 가지게 되는 근원적인 질문. 조경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본래의 구도를 추구한다는 의미의 ‘본시구도’에서 찾았다. 본시(本是, origin)는 ‘처음’, ‘근본’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본질이나 본바탕. 즉 원래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 구도(構圖, composition)는 시간과 빛을 비롯한 재료, 형태, 색채 등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조합하여 하나의 통일체로 완성하는 것을 뜻한다. 본시구도는 땅이 말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따른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이상적인 인프라를 구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고, 지문(地紋), 미기후, 인문, 심리 등 자연과 사람을 배우고 이해하며 공감을 바탕으로 한 통찰력을 토대로 한 환경을 설계하고자 한다. 공간에서 느끼는 가치가 극대화되도록 시간과 공간의 융합을 추구한다. 생태, 도시, 건축, 토목, 구조 등의 기술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모든 생명체의 삶이 번영하도록 그 본래의 구도를 찾아가고자 한다. 과거 건물을 지을 때 터잡이가 건물의 위치와 방향을 잡고 간잡이가 건물을 설계했던 것과 같이 조경, 설계에 국한하지 않고 마스터플래너로서 본래의 구도를 지향하는 것이다. 거침없이 달려온 지난 3년의 기록 본시구도 설립 후 3년 정도의 짧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동안 다양한 전문가들과 함께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좋은 성과를 남겼다. 이 과정에서 조경 분야에서 축적된 노하우가 풍부한 우리 구성원들의 노고가 가장 컸지만, 파트너인 건축사사무소 본시와 협력 분야의 긴밀한 네트워크의 도움도 컸다. 또한 도면 작성 단계에서 단순 작업을 효율적으로 줄여준 자체 개발 프로그램이 큰 역할을 했다. 동부간선도로(창동-상계구간) 지하차도 상부 공원화: 서울 주요 간선도로 중 하나를 지하화하고 상부를 공원화하는 프로젝트의 첫 단추였다. 창동-상계구간을 대상으로 하였고, 기술 제안으로 당선되었다. 근처 케이팝 공연장의 문화, 중랑천의 흐르는 물결을 모티브 삼아 서울 웨이브(Seoul Wave)를 콘셉트로 정했다. 홍대 앞 걷고 싶은 거리: 이형석 소장이 예전 회사에 다니고 있을 때 실격의 아픔을 주었던 프로젝트. 제출 당시 서류에 오류가 있어 심사 과정에서 실격 처리되었다. 본시구도를 창립하고 나서 다시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을 때 감회가 남달랐다. 양평 국수리 전원주택단지: 양평군 국수역 인근에 있는 약 50세대에 이르는 전원주택단지 조성 프로젝트로 시행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측량에서부터 시작해 전체적인 콘셉트를 잡고 단지 계획, 조경 계획에 이르기까지 마스터플래너로서 마음껏 역량을 발휘했다. 카스카디아 CC: 지형의 제약을 발상의 전환으로 새롭게 탄생시킨 27홀 규모의 하이엔드 골프장 프로젝트다. 국내 골프장들은 코로나 이후 경쟁 시기를 대비하여 코스 및 클럽하우스뿐 아니라 조경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클럽하우스와 거대한 폭포 주변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홀마다 특색 있는 경관을 만들기 위해 27홀 전체를 3D 시뮬레이션을 해 아이디어를 도출했다. 앨리웨이 인천 쑥골광장 활성화 계획: 부지 중앙에 있는 공공 기여 광장 특화 설계 및 시공을 경쟁 방식으로 맡게 되었다. 당선 후 특화 설계는 김건영 실장이 담당하고, 그의 친형 김건우는 현장 소장으로 시공을 담당했기에(당시 조경디자인 이레에 근무하고 있었다)김건영 실장에게 의미가 깊은 프로젝트다. 하동지구 두우레저단지 개발사업: 우리가 마스터플래너로서 이끌어갔던 프로젝트로 건축사무소 선정부터 단지 전체 콘셉트 및 건물 배치까지 약 80만 평에 이르는 부지에 골프 코스, 콘도, 테마파크, 상업 가로 등을 계획했다. 순천만 국가정원 식물원(온실) 건립사업: 전시 온실 설계는 흔한 프로젝트가 아니기 때문에 설계자로서 욕심이 나고 더 의미가 있었다. 450여 종 이상의 식물 종류를 선별하는 과정이 고생스러웠기에 기억에 남는다. 2023년 국제정원박람회 마중물 사업으로 의미 있는 작품을 남겼다는 것에서 더욱 감회가 새롭다. 송산GC 물 순환 마을 개발사업: 국내 최초의 물 순환 주거 단지를 만드는 프로젝트로서 조경이 주도하여 그린 인프라 주거 환경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향후 한국 도시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선도적인 지침이 될 공간을 만들어나간다는 생각에 책임감과 설렘을 느꼈다. 공간 크리에이티브 집단을 표방하다 최근 건축과 인테리어로 집중됐던 일반인의 관심이 점차 외부 공간으로 향하고 있다. 조경에 국한된 사고로는 공간을 다루는 데 한계가 있고, 이러한 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 공간을 다룰 때 건축, 토목, 구조, 경관, 생태, 도시의 맥락까지 이해해야 하며, 나아가 인간의 행동을 알기 위해 역사, 철학 등 인문학적 사고까지 필요하다. 우리는 좀 더 진보적인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한다. 계획 설계를 할 때 크게 세 가지의 키워드를 생각하는데, 시간, 공간, 가치다. ‘시간’은 시간과 계절의 변화에 따른 디자인, 인간의 일생을 담는 공간을 뜻한다. ‘공간’은 비움과 채움, 군더더기가 없는 쓸모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가치’는 맥락을 고려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하여 가치 있는 공간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전문적인 디자이너가 모여 있는 집단을 형성한다. 직원과 회사가 상생한다면 시장에서도 인정받을 것이다. 건축, 골프, 작가, 가드닝, 미술 등 다양한 방면에 강점을 가진 인력을 품어왔으며, 폭넓은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시행사, 건축사무소 등과의 협력 관계도 강화해왔다. 소비자에게 공간에 대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솔루션을 제공하여 삶의 질을 높이는 것. 우리가 공간 크리에이티브 집단을 꿈꾸는 이유다. 진화하는 조경, 함께 성장하고 싶은 회사 임인년 본시구도에 새로운 부서를 만들었다. 식물을 연구하고 실무에 적용하기 위해 만든 가든랩(정원사업부)이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김지영 이사와 서정완 이사가 주축이다. 이들이 만드는 정원이 어떤 모습일지 기대된다.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조경 수목의 탄소 계산기 개발 및 BIM 연동 프로젝트도 연구 중이다. 탄소 계산기는 수목의 환경 성능을 계획 과정에 적용하여 식재 설계 시 설계안의 탄소 저감량을 계산해내는 방식으로, 전 세계적인 탄소 이슈에 직능적으로 동참하면서 추후에는 BIM과의 연동을 통해 더욱 효율적으로 풍경을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현재 조경 BIM은 그 자체만으로도 도전 과제지만, 새로운 저작 도구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조경 설계의 영역과 차원을 한 단계 향상시켜 줄 시스템이라 확신한다. 본시구도는 반복적이고 기능적인 업무로 디자이너의 역량이 정체되는 것을 지양하며, 체계화된 디자인 시스템과 자체 프로그램 개발에 지속해서 투자하고 있다. 진화하는 외부 환경에 선구적으로 대응하고자, 끊임없이 트렌드를 연구하고 워크숍 등 내부교육을 통해 회사의 핵심 동력인 직원들이 체화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신구의 조화로 전문 지식이 누적되고 심화되어 깊이 있는 디자인, 조경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범위의 디자인을 추구하는 회사. 최고의 디자이너가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환경, 그 환경의 구도를 잡는 것이 바로 본시구도가 추구하는 경영 철학이다. [email protected] 이형석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풍경디자인, 현대건설, 해안종합건축사사무소를 거쳐 오지영 대표, 김건영 실장과 함께 본시구도를 열었다. 환경이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킨다고 믿으며, 지금보다 더 나은 꿈을 꾸며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조경을 인간의 생활과 삶의 터전을 바꿀 수 있는 직접적인 작업이자 세상을 바꿀 힘으로 여긴다.
  • [모던스케이프] 두 개의 공원, 독립공원과 탑골공원
    대한제국기를 거치며 탑골공원과 독립공원, 두 개의 공원이 계획되었다. 자주적 시도였지만 미완에 그쳤고 공원을 매개로 근대화를 실천하려 했다는 점이 닮았다. 그런데 접근 방식이나 구현하고자 하는 내용은 사뭇 달라서 이 두 공원을 비교하듯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차이를 알 수 있다. 탑골공원보다 앞서 조성된 독립공원은 서재필, 윤치호 등 급진개화파 계열의 독립협회 회원들이 계획한 것으로, 1896년 7월에 발족하여 1898년 12월에 해산한 독립협회만큼이나 짧고 강렬하게 등장했던 공원이다. 공원은 돈의문 밖 무악재 너머 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慕華館) 자리에 독립문, 독립관과 함께 계획되었는데, 그 위치가 의미심장하다. 영은문과 모화관은 조선이 중국 사신에 예를 갖추기 위해 만든 숙박 시설과 기념물로 건국 초기에 일찌감치 건설된 사대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수백 년간 유지된 시설을 하루아침에 폐기 또는 용도 변경하겠다고 선포했으니 독립협회는 그들의 급진적(진보적) 성향만큼이나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1896년 7월 2일자 「독립신문」 영문판에 실린 사설은 독립공원의 풍경과 쓰임을 다음과 같이 상상하고 있다. “…천변(무악천)에는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그 바로 아래에 멋진 길이 있어 마차와 자전거가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실개천 옆 땅은 뒤편 언덕과 부드럽게 이어지고 여기저기에 심겨있는 관목과 낙엽수, 구불구불 나 있는 산책길과 도로는 우리에게 흡사 공원과 같은 장소를 제공해 줄 것이다. …… 이곳에는 반드시 한국군의 군악대를 위한 연주대(band-stand)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곳은 여가의 한 형태로 외국인이 선택한 몇 안 되는 목록에 추가될 수도 있겠다. 한국인에게는 정말 훌륭한 교화의 장이 될 것이다. 순수하게 미적인(aesthetic) 목적으로 마련한 땅을 보는 것, 아름답게 만들어지는 것,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느낌을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밋밋한 공리주의의 삶에 참으로 오아시스와 같은 장소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하시모토 세리, 『한국 근대공원의 형성』,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6. 이나미, “개화파의 공공성의 논의: 공치(共治)와 공심(公心)을 중심으로”, 『공공사회연구』 3(1), 2013, pp.151~181. 우연주·배정한, “개항기 한국인의 공원관 형성”, 『한국조경학회지』 39(6), 2011, pp.76~85. 이동수, “「독립신문」과 공론장”, 『정신문화연구』 29(1), 2006, pp.3~28. 「독립신문」 영문판 *환경과조경407호(2022년 3월호)수록본 일부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들을 하고 있다.
  • [에디토리얼] 의자가 공원을 살린다
    이달 지면에는 꼼꼼히 살펴봐야 할 근작들이 넘친다. 이미 여러 매체의 주목을 받은 ‘타임워크 명동 공유정원’은 정원 문화의 감각적 경험과 그 가치를 공유하는 장소 실험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기획자 조영민(앤로지즈)과 조경가 최영준(랩디에이치)의 협력이 낳은 이 창의적 공간이 도심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촉매로 작용하기를 기대한다. 지난해 늦봄 완공된 뉴욕 허드슨 강변의 ‘리틀 아일랜드(Little Island)’는 물 위에 세운 정방형 공원이다. 물 위에 떠 있는 구릉지에 여유롭게 앉아 머무르며 지형을 감각하는 경험이 맨해튼 경관의 역동성과 극적 대조를 이룬다. 부두 교각의 형태에서 착안한 튤립 꽃봉오리 형상의 132개 기둥은 구조체이자 플랜터이며 공원의 표면이다.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의 경계를 허물며 미와 성능을 동시에 성취한 기술력이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다. 지명 초청 형식으로 열린 ‘IFLA 기념정원 설계공모’의 제출작들은 동시대 공공 정원의 가치와 조경가의 역할을 재점검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유승종(라이브스케이프)의 당선작 ‘사람의 정원, 자연의 정원’은 살아 있는 생명의 세계에 가까이 개입해 미시적으로 관찰하는 섬세한 공간 해법을 제안한다. 한국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이라는 막연한 개념을 요구한 설계 지침을 비판하는 것처럼 읽힌다. 편집자의 눈을 오래 머물게 한 박승진(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제출작 ‘21×129×298’은 한층 더 비판적이다. 21개 원형 패치에 129그루 나무를 심고 298개 의자를 흩어놓은 게 전부인 이 작품은 ‘설계로 쓴 비평’이다. “봐야 할 것은 많고 다리는 아프고 그늘도 부족”한 이 대상지에 필요한 건 “실용적 쓰임새와 (사회적) 가치를 갖는 공간”이라는 박승진의 설명은, 장소 맥락이나 지형 조건과 무관한 거대 서사나 피상적이고 낭만적인 주제를 일관되게 지향하는 최근의 정원박람회 경향에 대한 비평과 다름없다. 이 설계안의 핵심은 298개의 의자다. “앉을 수 있는 장치는 휴식의 질을 좌우한다.……의자는 디자인 이전에 인권이며 보편적 복지의 출발점이다.” “공원의 의자는……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따로 상석이 없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의자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원에 놓음으로써 공원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그가 제안하는 가볍고 단순한 디자인의 흰색 의자는 특정한 지점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앉고 싶은 곳, 바라보고 싶은 곳을 향해 의자를 두고” 공원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 “빈 의자, 누군가 앉아 있는 의자, 가까이 놓은 의자, 멀찍이 혼자 놓인 의자, 둥글게 대형을 이룬 의자, 등을 돌린 의자, 사람이 없는 의자”는 각자의 표정으로 말을 걸며 우리와 관계 맺는다. 내가 어느 도시의 시장이라면 당장 박승진의 설계를 살 것이다. 도시를 걷다 마음 편히 앉아본 적이 있는가. 화려한 상업 가로는 물론 레트로 열풍에 힘입어 뜨고 있는 그 많은 ‘핫플’ 골목길 어디에도 눈치 안 보고 잠시 머무를 나의 자리가 없다. 카페에 아메리카노 한 잔 값 내지 않는 한, 편의점에 들어가 생수라도 사지 않는 한, 나를 반기는 빈 의자가 없다. 마음대로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의자는 의외로 공원에도 많지 않다. 캠핑용 의자를 챙겨가지 않는 한, 걷기를 멈추고 숨을 돌릴 수 있는, 쪽잠을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노을을 즐길 수 있는 나의 자리가 공원에조차 없다. 공원의 의자는 걷는 사람을 멈추게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머무르게 한다. 공원의 의자에 기대앉으면 숨을 고를 수 있다. 느긋하게 다음 걸음을 준비할 수 있다.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볼 수 있고, 날씨의 변화를 살갗으로 느낄 수 있다. 원하는 곳으로 의자를 옮기면, 나무 그늘 밑에도, 잔디밭 한복판에도, 호숫가에도 나만의 온전한 시공간을 만들 수 있다. 걷기는 공원에 자유를 주고, 앉기는 여유를 준다. 편하고 즐겁게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은 좋은 공원의 필요조건이고, 여유롭게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는 충분조건이다. [email protected] **다양한 잡지에서 취재와 편집을 경험한 금민수 기자가 이달부터 『환경과조경』에 합류했다.눈치채셨겠지만, 2022년에는 작품 지면에 인터뷰나 비평을 함께 배치하는 기획을 늘려보려고 한다.이달에는 타임워크 명동 공유정원의 조영민과 최영준을 금민수 기자가 만났고, IFLA 기념정원의 유승종을 김모아 기자가 인터뷰했다.리틀 아일랜드를 다룬 평문은 뉴욕에서 활동 중인 조경가 최지수(SOM)가 맡아주었다.
  • [풍경 감각] 환상을 믿어요
    아름다운 작품을 통해 작가를 만난다. 작품에서 느낀 섬세한 온기와 달콤한 다정함, 바람결 같은 기발함을 바탕으로 작가의 모습을 그려본다. 때때로 작가를 실제로 만나게 되면, 마음속에서 늘 그렸던 이와 달라 놀라기도 한다. 작품 속과 실제 사이의 간극이 크고 깊었던 것일까. 그 낙차에서 오는 충격이 상처를 주었던 걸까. “작품을 보고 사람에 대한 환상을 키우지 말아야 한다”고 단언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풍경 속의 작가를 믿는다. 작품에 오롯한 진실을 담을 수 있을까. (못나고 부끄러운 점을 포함한) 작가의 모든 면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작품은 진실의 결정체가 아니라, 자신의 가장 예쁜 모습을 나무 가꾸듯 오래 보듬어 만들어낸 것이다. 그 환상을 뿌리처럼 굳게 믿고 싶다.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안마당더랩 상생의 가치 아래 사람과 자연의 균형을 고민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나아질 수 있는 것을 원한다. 대상 자체에 집중하는 대신 가치에 집중한다. 인간과 자연의 균형, 구성 요소 간의 관계성, 규칙 안의 변주를 찾고자 한다. 형태보다는 분위기를 살리고, 따뜻하지만 선명하게 표현하고 싶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질감, 시간의 흔적, 그림자처럼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은 요소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나아가 우리의 스타일을 규정하고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본질에 접근하고자 한다. 존재 이유를 묻다 2016년 안마당더랩을 설립하고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달려왔다. 4년쯤 됐을 때 회의감이 생겼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안마당더랩이 만드는 공간이 유지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우리의 존재 이유를 찾고 싶었다. 조경, 정원설계사무소는 많고, 우리보다 설계 능력이 뛰어난 곳도 많으며, 시간이 갈수록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도 안마당더랩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안마당더랩을 유지해야 하나.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으나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배운 것이 조경이고 그 기술로 돈을 벌고 있지만, 반드시 조경, 정원설계로 생계를 이어나갈 필요는 없다. 그때 답을 얻고자 우리만의 고유한 핵심 가치를 설정했다. “현재 우리는 매우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다. 앞으로 수많은 정보와 가치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쉽게 잊힌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존재 이유는 단순히 미적인 정원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이상이 필요하다. 우리의 작업을 통해 공간을, 일상의 질을, 넓게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상생의 가치 상생(相生)은 공생의 의미도 있지만 공생과 다르다. 상생은 순환을 의미한다. 자연이 스스로 지속가능성을 만들어 가는 것과 비슷하게, 우리도 지속가능성을 키우기 위해서 상생을 핵심 가치로 정했다. 상생은 너와 나, 이쪽과 저쪽이라는 이원론적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다원론적 이야기이다. 어떤 행동 하나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족하게 하는 것, 상생이라는 용어 속에는 그러한 뜻이 담겼다.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하면 지구 환경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지속가능성이 필요한 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수많은 가치의 지속가능성에 공통으로 필요한 요소는 균형이다. 무엇이든 지나치거나 부족하면 균형이 깨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이유로 안마당더랩이 가장 우선하는 디자인 철학은 균형이다. 정원 설계 의뢰를 받으면, 설계 공간에 공존하는 많은 가치를 파악하고 그 가치들이 서로 상생하며 균형을 찾을 방법을 모색한다. 예를 들어 상업 공간의 경우 심미성을 비롯해 고려해야 하는 다양한 가치가 있지만, 수익성과 회전율을 염두에 둔 테이블 개수를 반영한 계획이 균형 잡힌 설계안이 될 수 있다.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하면 지구 환경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지속가능성이 필요한 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수많은 가치의 지속가능성에 공통으로 필요한 요소는 균형이다. 무엇이든 지나치거나 부족하면 균형이 깨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이유로 안마당더랩이 가장 우선하는 디자인 철학은 균형이다. 정원 설계 의뢰를 받으면, 설계 공간에 공존하는 많은 가치를 파악하고 그 가치들이 서로 상생하며 균형을 찾을 방법을 모색한다. 예를 들어 상업 공간의 경우 심미성을 비롯해 고려해야 하는 다양한 가치가 있지만, 수익성과 회전율을 염두에 둔 테이블 개수를 반영한 계획이 균형 잡힌 설계안이 될 수 있다. 방향성을 바탕으로 한 완성도 디자인할 때 방향성을 설정하고 그 맥락 속에서 디자인을 발전시키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것을 우리는 ‘완성도’가 높아졌다고 표현한다. 설계에서 단순하게 호오(好惡)를 따지면, 그 기준 자체가 주관적이라서 바른 방향성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판단이 어렵다. 가령 이도커피 사유점의 경우 브랜딩 단계에서부터 이름 그대로 ‘사유하다’라는 콘셉트가 정해져 있었다. 정원도 ‘사유’의 개념 안에서 설계해야 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도커피 사유점의 정원은 중정이었고, 모든 좌석이 정원을 바라보게 배치되어 있었다. 중정을 바라보며 사유하게 만들 방법을 찾고자 했다. 방문객이 알게 모르게 자연을 느끼다 돌아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숲(자연)은 하나의 객체가 중요한 공간이 아니다. 전체의 장면을 하나로 느껴지게 하는 것이 이곳의 중요한 방향성이었다. 숲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의 선정이 매우 중요했다. 숲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생존을 위한 경쟁으로 수관 폭이 좁고 위로 웃자라는 형태를 띤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란 나무가 필요했다. 중정의 크기에 적당하고 이식하기 좋으며 생장 속도가 빠르지 않은 나무여야했다. 발품을 팔아 나무를 직접 찾아다녔다. 우연히 소사나무를 발견했는데, 나무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찾았다!’라고 외쳤다. 12주의 소사나무를 수형의 특성을 살려 자연스럽게 배치하기 위해 계속 자리를 바꿔가며 숲의 장면을 만들어 갔다. 건축의 제안으로 미스트 장치를 설치해 이른 아침 안개 낀 숲의 모습을 연출했다. 미스트 장치가 작동하는 빈도는 식물의 생육에 지장이 없도록 계절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된다. 이 장면을 더 극대화할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일까. 오래전에 봤던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이 생각났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나비가 나온다. 이 나비는 영화를 시적으로 만드는 요소다. 더 나아가 나비에 관련된 이야기 ‘장주지몽’을 떠올렸다. 장주지몽은 자신이 꿈속에서 나비가 됐는지, 원래 나비였던 본인이 꿈속에서 장주가 됐는지 알 수 없게 됐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물아일체의 경지를 주제로 하는 얘기다. 이곳에 방문한 사람들이 더 깊게 사유할 수 있도록 나비를 불러보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소사나무 하부 식재 수종은 나비를 불러오는 흡밀 식물을 식재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어프로치 커피(Approach Coffee) 프로젝트는 영국식 브런치 카페를 론칭하는 작업이었다. 자연스럽게 영국식 정원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 사항으로 시작됐다. 초기 조사 분석 과정에서 첼시 플라워쇼, 코티지가든 등 영국 정원의 방향성을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을 수집했다. 어느 순간 그 사례들이 영국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오래전 영국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들을 다시 꺼내 봤다. 흔히 생각하는 영국 정원의 이미지는 오래된 전통 정원 혹은 대부분 지방에 위치한 시골 정원의 모습이었다. 도심인 런던의 모습과는 달랐다. 서울과 용산이라는 도심의 한복판에 세워지는 영국 브런치 카페라면 런던 도심의 모습을 담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런던 도심 속 풍경의 공통점을 찾기 시작했다. 공통점은 검은색이었다. 특히 오래된 양식의 건물과 석재 포장이 주를 이루는 구도심에서도 간판, 표지판, 각종 시설물 대부분 검은색을 사용한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오래된 건축 양식과 대비되는 검은색,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 초록 식물들의 조화가 런던의 이미지라는 생각으로 공간의 컬러 가이드를 만들어 설계를 진행했다. 손으로 만드는 과정 설계를 진행하면 3D 프로그램을 통해 작업을 많이 한다. 빠르게 공간감을 검토할 수 있고 클라이언트의 이해를 돕는 이미지를 다른 방법보다 손쉽게 뽑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하면 직접 손으로 만들어 보는 과정을 거치려 한다. 그 이유는 모델을 만들거나 일대일 목업을 만드는 과정에서 깨닫는 것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를 경험담을 소개한다. 첫 번째는 새로 지어지는 현대식 한옥의 난간과 전통 공간에서 쓰인 취병을 재해석해서 풀어본 프로젝트다. 창덕궁 후원에 가면 볼 수 있는 취병의 본래의 쓰임은 관목류 덩굴성 식물 등을 심어 가지를 틀어 올려 병풍 모양으로 만든 울타리다. 밖에서 내부가 보이는 것을 방지하고 공간을 분할하는 역할을 하면서 경관을 조성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취병을 설계에 반영했는데, 전에 만든 경험이 없었기에 공사 전 대나무 살의 간격과 매듭 방법을 목업을 통해 검증하고 도면에 적용해 공사를 진행했다. 이 아이디어로 건축이 설계했던 유리 난간을 대신하게 됐다. 두 번째는 지형 조작이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공간의 크기가 작아 실제로 미리 지형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 프로젝트는 3D 프로그램을 이용해 지형을 검토했는데, 지형의 공간감을 실제 스케일로 느껴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직접 흙을 파내면서 지형을 먼저 미리 만들고 공간감을 느낀 다음 그 지형의 높이를 레벨기로 측정해 도면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물론 주변 환경까지 모형으로 만들 수는 없기에 현장에서의 공간감은 또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 작업을 통해 설계의 방향성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은 확신했다. 디자인 빌드를 하는 이유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효율성과 생산성이 중요하다. 현대인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업무를 분업화했다. 이로 인해 보람은 잃었다. 그렇다면 보람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 ‘내가 했다’ 또는 ‘우리가 했다’라는 점을 중요하게 여긴다. 철저하게 분업화한 과정(하나의 공간을 만드는 데 기획, 설계, 시공이 분리 발주되는 과정)을 통한 결과에서는 보람을 느끼기 어려웠다. 정말 가치가 큰 프로젝트에 참여해도 수많은 전문가와 실무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 안에 우리 것은 없었다. 누구의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실무자들의 이름도 남길 수 없었다. 오로지 발주처의 것이었다. 분업화의 효율성은 인정하지만 그 안에서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발굴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들기의 중요성에 관해 묻는다면 공간을 만드는 전 과정에 참여했을 때 조금 더 보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직접 식물을 심고 돌봄을 통해 식물의 생활사를 보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도 한다. [email protected] 안마당더랩(Anmadang the Lab)은 상생의 가치 아래 균형, 단순, 조화, 대비, 스토리, 실용성, 합리성 등 다양한 디자인 철학을 담아 외부 공간을 기획, 설계, 시공하는 디자인 작업실이다.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지속가능한 것에 관심이 많다. 좋은 공간이 우리의 삶을 개선시킨다고 믿는다.
  • [모던스케이프] 혼란과 잡거의 도시
    한국의 인천과 부산, 중국의 상하이와 칭다오, 일본의 요코하마와 나가사키. 이들 도시의 공통점은 도시 여행자에게 외국인 거류지가 만든 ‘이국적인 근대 풍경’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개항장이라고 불리는 도시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인데, 서울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외국인이 국가 경계를 넘나들고 거주하려면 국가 간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조선의 경우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시작으로 11개국의 열강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국경의 빗장이 열렸고, 이후 미국과 영국, 러시아, 독일 등 아홉 국가의 공사관 또는 영사관이 서울 정동 일대에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 양국은 다른 서구 열강과 달리 정동이 아닌 다른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일본은 조선과 가장 먼저 조약을 체결했지만, 조선 정부는 공사관은 물론 일본인이 도성 안에 주거하는 것조차 불허했기 때문에 일본 공사관은 돈의문 밖에 자리해야 했다. 그러다 임오군란 때 공사관이 화재로 소실되고 일본 측 피해 보상 문제를 다룬 제물포 조약을 맺으면서 비로소 도성 안으로 입성하게 된다. 1896년 현재 신세계 백화점 본점 자리에 영사관을 신축하고 진고개(지금의 충무로2가)와 주동注洞(남산 예장자락 일대)을 중심으로 일본인의 거주가 허가됐다. 남산 북사면에서 시작된 일본인 거류지는 훗날 용산과 이촌까지 확장된다. 반면 중국인이 서울에 정착한 배경은 또 다르다. 그들은 수백 년간 지속한 양국의 관계를 명분으로 가장 먼저 들어와 가장 오래도록 남아있는 부류였다. 19세기 말 서구 열강이 우리나라와 교섭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청국은 자신들과의 오랜 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통적 사대 관계를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군대와 상인을 이용해 조선에 대한 새로운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청국 군대가 임오군란 등의 폭동 진압을 돕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정부에 초권력 행세를 했다면, 화상華商은 자국 군대와 결탁해 조선의 국가 재정에 개입하고 상권을 장악하는 역할을 했다. 화상들은 뒷배에 군대를 두고 있어서 조선인 중심의 기존 상권을 파고드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종로 등 기존 상권을 점거하면서 조선인들과 종종 마찰을 일으켰지만, 결국 중국 공관인 총판조선상무위원공서(總辦朝鮮商務委員公署, 이하 상무공서)를 중심으로 거대한 타운을 형성하게 된다. 1883년 9월 지금의 주한중국대사관 자리에 건립된 상무 공서는 원래 무위대장(武衛大將) 이경하(李景夏)의 집이었으나, 상무공서의 초대 상무위원인 진수당(陳樹棠)이 매입하여 지은 것이다. 그 이전에는 조선 후기에 중국 사신을 접대하고 숙소로 이용했던 남별궁(이후 환구단 자리)에서 영사 업무를 처리했었다. *환경과조경406호(2022년 2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박희성, “1910~1920년대 경성부 華僑 토지 소유 분포와 변화 양상”, 미발표 논문. 강진아 외, 『개항기 서울에 온 외국인들』, 서울역사편찬원, 2016.
  • [에디토리얼] 새해를 걸으며
    해피 뉴 이어. 이미 두 달 전에 정해 둔 새해 첫 호 이 지면의 제목은 ‘한국 조경 50주년, 『환경과조경』 40주년을 맞으며’였다. “한국 조경이 쉰 살을 맞는다. 2022년, 한국조경학회 설립 50주년과 『환경과조경』 창간 40주년이 겹치는 해다. 8월 말에는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Re:Public Landscape)’를 주제로 내걸고 광주에서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IFLA World Congress)가 열린다. 한국 조경의 지난 50년을 돌아보며 기록하는 일, 다음 50년을 예비하며 설계하는 일 모두가 중요한 2022년이다.” 이렇게 잔뜩 힘들여 한 문단 쓰고 나니 글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연말 강추위에 얼어붙은 거리를 걷다 돌아왔다. 걸으며 새해를 맞는다. 계속 붕 떠 있는 느낌, 토대가 무너진 허공에 서 있는 기분. 어디가 끝인지 모를 답답하고 막막한 코로나 시대의 긴 터널,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통과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유도, 계기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감염된 도시의 어수선한 풍경 속을 목적 없이 걷는 취미 아닌 취미를 가지게 됐다. 몸을 일으키면 저절로 걷게 되고 그냥 걷다 보면 긴 터널의 끝이 보이는 듯한 희망이 생긴다. 노을을 바라보며 무작정 걸으면 복잡하게 뒤엉킨 습한 생각들이 바람에 바싹 마른다. 두 발과 땅이 대화하는 느낌, 나 자신을 세상으로 여는 느낌. 이동이나 답사처럼 특별한 의도를 갖는 걷기와 달리 그냥 느릿느릿 걷다 어슬렁거리며 떠돌다 옆길로 새는, 우연에 내맡긴 걷기는 시간과 공간에 묶인 신체에 자유를 준다. 어쩌면 걷기보다 걷기에 관한 책에 더 재미를 붙인 건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는 이론형 인간인지라 닥치는 대로 걷기 책을 모으고 빌리고 읽었다.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같은 책에서는 여러 철학자와 문인의 산책에 얽힌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고통의 순간에 걷고 또 걸은 니체, 바람구두를 신고 세상을 누빈 랭보, 몽상하는 고독한 산책자 루소, 자본주의의 아케이드를 소요한 베냐민. 그들의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내려가다 보면 움츠린 몸을 일으키고 운동화 끈을 묶지 않을 수 없다. 걷기와 사유가 교차하는 아름다운 책들을 읽다 보면 도시를 느리게 걸으며 섬세한 풍경을 누리는 것 못지않은 즐거움이 생긴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이나 크리스토프 라무르의 『걷기의 철학』이 경쾌한 산책이라면,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과 『길 잃기 안내서』는 긴 도보 여행이다.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에서는 거리로 뛰쳐나온 전위적 발걸음을, 토르비에른 에켈룬의 『두 발의 고독: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에서는 공간과 시간을 제 것으로 장악한 자신감을 만날 수 있다. 급기야 지난 가을학기 대학원 ‘환경미학’ 시간에는 교실을 버리고 거리로 나섰다. ‘걷기의 미학, 도시에서 길을 잃다.’ 강의계획서 첫 줄에 허세 가득한 문장을 적었다. 익숙한 도시를 낯선 시선으로 걸으면 일상의 환경에 대한 미학적 문해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고 수강생들을 설득했다. 시흥갯골생태공원과 배곧생명공원, 하늘공원과 메타세쿼이아길, 경의선숲길, 청계천, 후암동과 해방촌 골목길, 그리고 지도 바깥의 이름 없는 길들을 정처 없이 걸으며 두 발로 지도를 그렸다. 학기말쯤 우리는 하늘과 날씨에 대한 글을 적고 잡초와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에 끌려 정지돈의 산문집 『당신을 위한 것이나당신의 것은 아닌』을 집어 들었다. “산책은 거창한 의미 이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세련된 숍과 산책로가 없어도 우리는 걸을 수 있다. 돈이 없고 친구가 없고 연인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걷는 것이다. 막차가 끊긴 서울 시내를 걷고, 가끔은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기도 하고, 퇴근 후에 집에 가기 싫어 정처 없이 쏘다니기도 한다.……산책은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것이지만 멜랑콜리해지거나 심각해지지 않는다.……오로지 걸을 때만 진정으로 쾌활해진다.” 걷기의 가장 큰 매력은 막막하고 답답할 때도,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도 걸을 수는 있다는 점 아닐까. 걸으며 새해를 연다. 2022년을 여는 이번 호는 ‘제4회 젊은 조경가’의 수상자인 조용준(CA조경 소장) 특집호다. 에세이 ‘언플래트닝 랜드스케이프’에 담은 그의 설계 철학, ‘여섯 가지 이야기’로 편집한 그의 작업, 남기준 편집장의 인터뷰, 진양교와 제임스 코너의 추천 에세이로 구성한 특집 지면에서 조용준의 도전과 실험을 만날 수 있다. 이번 호부터 두 편의 흥미로운 시리즈를 새로 올린다. 박희성(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이 집필을 이어갈 ‘모던스케이프’는 근대기의 그림, 엽서, 지도, 책 등 다양한 매체에서 근대 도시의 풍경을 엿보는 기획물이다. ‘어떤 디자인 오피스’는 설계 작업과 설계사무소 경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는 지면인데, 첫 순서는 ‘조경하다 열음’ 편이다. 본지 창간 40주년(2022년 7월호)을 맞아 올해 ‘조경비평상’의 상금이 대폭 풍성해졌음을 꼭 확인하시기 바란다. 조경을 주어로 고민 중인 예비 조경비평가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