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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COP26과 IFLA 기후행동공약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코로나 팬데믹 뉴스에 가려 눈길을 끌지 못했지만, 올여름 지구촌 곳곳이 폭염과 홍수로 몸살을 앓았다. 한여름에도 냉방기가 필요 없는 미국 북서부를 사상 최악의 폭염이 강타했다. 시애틀 기온이 섭씨 40도까지 오른 건 1894년 관측 이래 처음, 그야말로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졌다. 남부 유럽은 용광로처럼 끓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소도시 플로리디아는 49도를 찍었다. 폭염은 시민의 삶을 위협하고 유례없는 가뭄 피해를 낳았다. 북부 유럽에선 물난리가 났다. 폭우와 홍수로 180명 넘게 사망한 독일, 그 피해는 처참했다. 지난 8월 9일,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는 기후변화가 인류의 존망을 결정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진단한 보고서를 공개했다. 올해부터 2040년 사이 지구 온도가 산업화 이전에 견줘 1.5도 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IPCC는 2018년 보고서에서는 1.5도 상승하는 때를 2030~2052년으로 예측했는데, 이번에 10년가량 예측을 당긴 것이다. 온난화 안정의 전제 조건이 탄소중립이라고 강조한 이번 2021년 IPCC 보고서는 10월 31일부터 11월 12일까지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릴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당사국 총회(COP26)의 과학적 근거로 쓰일 예정이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UN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은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온실가스 방출을 제한해 지구 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 세계 각국이 동의한 협약이다. 1992년 6월 리우 회의에서 채택돼 1994년 3월 발효됐으며, 1995년부터 매년 당사국 총회(COP, Conference of the Parties)가 개최되고 있다. 2015년 열린 COP21에서는 2020년 이후의 신기후체제 수립을 위한 최종 합의문인 ‘파리협정’이 채택됐다. “지구 평균 온도 상승 폭을 2도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1.5도 이하로 제한하고자 노력한다”는 파리협정으로는 온난화를 막기에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계속 제기됐다. 그래서 유엔기후변화협약 196개국과 유럽연합이 한자리에 모여 획기적인 기후변화 대응 방안을 논의할 이번 COP26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각국은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한 중간 목표인 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를 COP26 개최 이전에 제출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 지난 9월 19일, 세계조경가협회(IFLA)는 COP26 개최에 발맞춰 ‘기후행동공약(IFLA Climate Action Commitment)’을 발표했다. 전 세계 77개 나라 7만 명 넘는 조경가들이 지구 온난화를 섭씨 1.5도로 제한하기 위해 행동에 나선 셈이다. IFLA는 “기후 위기 해결의 열쇠는 탄소 배출량 감소, 인간 사회의 회복탄력성과 전환, 자연환경의 지속가능성에 있다”고 선언하면서, 기후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조경의 전문 역량을 다음과 같이 재확인했다. “조경가는 지구촌 환경과 사회의 파멸을 예방할 고유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조경가는 전문적인 계획, 설계, 관리를 통해 글로벌 생태계를 보호·개선하고, 인간의 건강과 웰빙과 행복을 촉진하며, 온난화에 몸살 앓는 환경을 냉각시키고 대기 중 탄소를감소시킬 수 있다 .…… 자연 기반 해법, 기술 혁신, 전략적 사고를 바탕으로 창의적 전문성을 갖춘 조경은 도시에 최대한 많은 숲을 조성해 탄소를 제거하고 생물 다양성을 구축하며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이상 고온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한다. 조경가는 도시 환경뿐 아니라 글로벌, 광역, 지역, 휴먼 스케일 등 모든 규모의 생태계 기능을 보호, 강화, 향상시키며 …… 기후변화에 대응할 회복탄력적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조경가는 자연과 연결되고자 하는 인간의 강한 열망을 충족시켜준다.” 또한 IFLA는 탄소중립을 위한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달성을 위해 전 세계 조경가의 전환적 협력과 행동을 촉구하면서 여섯 가지 방향을 약속했다. 1. 유엔 지속가능발전목표(UN SDGs)의 증진: IFLA에 가입한 77개국 조경가들은 지구촌 생태계를 보호하고 복구하는 노력을 가속화할 것이다. 2. 2040년까지 전 세계 탄소 배출 넷제로(net zero) 달성: 조경가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서 발생하는 작동 탄소와 체화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경관 고유의 수용력을 활용해 이산화탄소를 감소시키며, 청정·복합 운송 시스템을 지원할 것이다. 3. 살기 좋은 도시와 커뮤니티의 수용력과 회복력 강화: 조경가는 그린 인프라 접근법을 통해 도시 열섬 효과를 완화하고 화재, 가뭄, 홍수 위험을 줄이는 데 힘쓸 것이다. 4. 기후 정의와 사회 복지 옹호: 조경가는 공정과 평등, 식량 안보, 청정 수질과 행복을 위한 모두의 권리를 증진시킬 것이다. 5. 문화 지식 체계의 학습: 조경가는 기후변화 영향을 완화하는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토착 문화의 토지 관리 지식을 존중하고 적용할 것이다. 6. 기후 리더십의 발휘: 조경가는 기후 위기 대응을 선도할 위치에 있다. 조경가는 기후 긍정적 설계(climate positive design)를 위해 관련 분야 전문가와 지속적 협력을 이어갈 것이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과학자와 정치가의 목소리를 통해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가 가져올 위험에 대해 들었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두려움이 좋은 방향의 실천을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위기감을 자극하는 경고가 계속되면 우리는 무감각해지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대중에게 두려움을 강요하는 과학의 경고와 정치의 훈계보다는 조경의 실질적이고 지혜로운 실행이 필요한 시대, IFLA의 기후행동공약은 한국 조경계의 실천 좌표와 무관하지 않다. 지난 3월호부터 두 달에 한 번씩 이어온 인터뷰 “사람과 사람을 잇는 사람들”을 이번 호로 맺는다.조경가 조성빈, 김연금(조경작업소 울)의 수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풍경 감각] 풍경의 이름
    #1 이름은 붙였어? 오래도록 갖고 싶었던 카메라를 들고 나선 날, 친구가 물었다. 소중한 카메라이니 이름을 붙여야 한단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게 이상하고 부끄러운 일 같았지만, 친구의 진지한 얼굴을 보니 놀리고 싶어졌다. 그럼 메라라고 할까? 그 이후로 ‘메라’를 볼 때마다 사뭇 진지했던 친구의 표정이 떠올라 웃음 짓는다. #2 오랜만에 ‘메라’로 기록한 사진들을 살피니, 강아지가 뛰노는 풀밭이 보인다. 까만 눈, 분홍색 코가 박힌 하얀 진돗개. 뭐라고 부르든 달려오는 모습이 귀엽고 또 괜히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곰탱이’라고 이름 지은, 나의 첫 강아지. 무지개다리를 건넌 뒤 좀 더 고운 이름으로 부를 걸 하고 후회했지만, 덕분에 나는 곰탱이라는 말을 하얗고 보송하게 기억한다. #3 설계 회사에서 지었던 공간 이름 몇 개를 떠올려 본다. 커피 앤 티 가든, 느티나무 쉼터, 매화나무 언덕, 어울림 마당, 다함께 정원, 진입 광장. 일정에 쫓겨 급하게 정한 이름이 많다. 머리를 싸맸지만 마땅한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택한 차선책도 많다. 설계 도서에 적지 못하더라도 메라나 곰탱이 같은 이름으로 불러 볼 걸. 미소가 떠오르는 이름, 하얗고 보송한 이름을 소중한 풍경에 붙여 볼 걸.
  • [나의 미개봉작 상영기] 조경N잡러
    조경? 조경학을 전공한 나는 이러저러한 연유로 ‘조경은 종합예술과학’이라고 학교에서 배웠다. 2009년 졸업 후, 10년 갓 넘게 조경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지금의 나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의 가치 판단’이라는 짧은 문구로 조경을 정의 내리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싶어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접하고 최근까지도 의문이었던 ‘종합예술과학’이란 단어에 나름의 답을 내렸다. 이 정의가 어려운 이유는 하나하나 정의 내리기 어려운 종합, 예술, 과학이라는 말을 나열해 놓았기 때문이 아닐까? 종합과 예술과 과학이라는 단어를 나누어 생각하고 그것의 합이 조경이라고 단순화해 보았다. 종합은 무엇일까. 짧은 단어 조합을 좋아하는 나는 ‘인간 행위의 단편적인 것들의 합’이라고 답을 내려 본다. 예술은 무엇일까. 라디오 홈페이지(www.ladio.kr)에 적시한 것처럼 ‘복잡다단한 인간사’가 아닐까. 그렇다면 과학은 무엇인가. 과학관리학 박사 변재규의 『과학의 지평』에는 “과학은 인간과 인간의 행위를 포함하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제반 현상을 관찰하고 법칙적으로 기술하는” 일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즉 과학 또한 인간 활동과 우리 주변을 둘러싼 것들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조경인을 혼란에 빠트린 종합예술과학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과 그 삶이다. 그렇다면 조경은 무엇인가. 이과 출신인 나는 단순한 등식을 세워 조경을 제멋대로 정의해 본다. 인간 행위와 그 삶=종합예술과학=조경. 그렇다. 조경은 너의 삶 안에 있는 것이다. 과한 정의라 해도 좋다. 쉽게 이해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 등식을 따르면 조경학 또한 인문학이라고 어디 가서 이야기하기도 좋다. N잡러? N. 정해지지 않은 어떤 만큼의 수. 양자역학적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단어다. 무언가를 여러 사람이 나누어 계산할 때 쓰는, 공평함의 대명사이기도 한 N은 ‘N분의 1하자’라는 관용어로 익숙하다. 이 N에 투잡·쓰리잡의 잡job, 그 잡에 사람을 뜻하는 ~er을 붙인 잡러를 결합해, 마침내 다양한 직업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콩글리시 ‘N잡러’가 된다. 그렇다. ‘조경’과 ‘N잡러’의 정의를 구구절절 내린 이유는 조경 내 다양한 세부 분야의 작업을 하는 내 모습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조경N잡러. 하고 싶은 조경 일을 하기 위해 하기 탐탁치 않은 조경 일 또한 성장의 발판, 수줍음 많은 이의 최대한의 영업이라 생각하고 임하는 사람. (잘은 모르지만) 조경이라는 것의 가치를 조경을 처음 접하거나 알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부족한 실력이지만) 어떻게든 알리기 위해 설계 일이 아니더라도 임하는 사람. 또는 같은 조경 일을 하고 있는 이에게도 스스로가 생각하는 조경 이상의 조경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모임에 참여하며 망상에 가까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그런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조경N잡러’라고 칭하고 두 번째 연재의 제목으로까지 삼은 이유는 외부 공간 기획, 조경설계, 수량 산출·내역, 자문·컨설팅, 공모, 디자인 감리, 대민 활동, 민원 중재, 강의, 농공고 선생님들의 선생, 정원 작가, 강변북로 수목 조사자, 현장 식재 및 소운반 인부 등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고, 수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고 해결하며 크디큰 기쁨을 얻는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미개봉) 작업 또한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밥벌이가 된다면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이 아니더라도 어디서 ‘나 조경하오’라고 당당히 말해도 된다고 알리기 위함이다. ‘조경이 뭐야?’라는 질문을 누군가 한다면 ‘넌 조경도 모르니?’라고 반문하여 조경을 스스로 알게 하자. *환경과조경403호(2021년 11월호)수록본 일부 김지환은 영남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씨토포스와 스튜디오엘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으며 현재는 조경작업장 라디오의 대표다.스스로를 작업반장,설계공이라 칭하듯 설계와 시공 사이의 중재자(신호등)역할의 중요성을 인지해 그 관계의 매커니즘을 이해하려 노력한다.사회적 대기업을 만들어 도시 내 모든 디자인을 손대고 싶어 하는 야망과 유명 건축가와 조경가의 작업을 보며 절망과 환호를 즐기는 이상주의적 성향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더욱 견고하게 한다고 믿는다.때론 못다 한 말을 해시태그로 덧붙이기도 한다. #라디오에이스#정원작가#은근히낯가려요#조경뚱
  • [사람과 사람을 잇는 사람들] 교도소 담장 바깥으로 관계를 잇는 조경
    어느덧 마지막 글이다. 최대한 다양한 이들과 다양한 커뮤니티 디자인 이야기로 연재를 꾸리려 했다. 그런 면에서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교(Iowa State University) 조경학과 줄리스티븐스(Julie Stevens) 교수는 마지막 인터뷰이로 아주 적합하다. 스티븐스는 여성이자 어머니로서 조금 독특한 커뮤니티 안에서 사람과 사람의 연결을 고민해왔다. 그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시기에 아이오와 여성 교도소 프로젝트도 시작됐다. 이 프로젝트는 8년간 학부 스튜디오 주제로 다루어지며 여성이자 수감자라는 특수 취약 계층을 이야기했다. 가장 최근 진행한 여성 교도소 프로젝트는 2018년에 지은 방문자를 위한 정원 프로젝트다. 교도소 외부 공간에 벤치, 플랜터, 미끄럼틀, 정글짐을 놓아 동네에 있는 어린이공원 같은 공간을 마련했다. 수감자들은 순환하는 산책로에서 방문자와 짧은 산책을 즐길 수 있고, 어린 자녀들은 세발자전거를 탈 수도 있다. 사시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공간을 채우고, 낮은 목재 펜스를 두른 정원은 교도소 안 공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교도소라는 비일상적 공간에 가장 일상적 공간을 선물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조경학과의 부교수로 일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자연과 만들기를 좋아해 조경의 길에 접어들었고, 조경학과 학부생일 때 여러 좋은 스승의 학문적 에너지에 매료되어 교직으로 오게 되었다. 대학에서 디자인/빌드 스튜디오를 운영한다고 들었다. 여성 교도소ICIW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는데, 처음 인연을 맺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ICIW가 대상지에 새로운 건물을 계획할 때였다. 단계별로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1단계에 약 6,800만 불(한화 약 800억 원), 2단계에 2,200만 불(약 260억 원)의 예산이 잡혀 있었다. 당시 교소도 디렉터는 넓은 대지에 수감자의 치유를 돕는 외부 공간을 조성하고 싶어 했다. 작은 마을 끝자락에 위치한 지방 교도소라 도시 안의 시설과는 다르게 외부공간이 매우 넓다. 디렉터는 이 외부 공간의 잠재성을 높게 보았고, 함께할 이를 찾는 과정에서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내가 스튜디오 프로젝트로 이 공간 설계를 맡게 되었다. 아주 초기부터 계획에 관여하게 된 셈인데, 시작은 어떠했나. 2011년도 봄 학기 스튜디오를 통해 여러 아이디어가 담긴 마스터플랜을 제안했다. 사실 교도소 쪽에서는 우리의 역할을 딱 그 정도로만 생각하기도 했다. 한 학기 동안 다양한 구상안을 그려주는 정도 말이다. 교도소 측은 조경이라는 행위를 통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냥 보통 교도소보다 조금 더 아름다운 공간이 만들어지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우리가 환경심리학 이론이나 치유 정원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교도소 측도 조경의 역할을 좀 더 폭넓게 생각하게 됐다. 마지막으로 교도소와 진행한 프로젝트는 2018년에 완공됐다. 8년 동안 네 개의 규모 있는 정원을 조성했는데,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을 했다고 자부한다. 정원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제일 처음 만든 정원은 디자인/빌드 스튜디오 초반에 진행한 마스터플랜 수업에서 비롯됐다. 교도소 행정관과 대화하며 어느 공간을 먼저 공사할지 결정했다. 그 과정을 통해 진행하게 된 첫 프로젝트는 야외 교실로, 상담사들이 건물 안이 아닌 바깥에서도 수업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이다. 교도소 건물에는 대부분 창이 없어 수감자들이 긴 시간 동안 형광등 아래에서 바깥 풍경을 보지 못하고 지낸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작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일대일 상담 수업을 진행할 공간과 대규모 강의나 졸업식 같은 행사를 진행할 수 있는 원형 극장을 조성했다. 학습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공간이 탁 트여 있고 아름다운 식물과 충분한 좌석을 갖추고 있어 수감자들의 마당으로 여겨진다.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가장 많은 휴식 시간을 보낸다. 이듬해 여름에는 교도소 직원을 위한 휴게 공간을 조성했다. 이어진 세 번째 프로젝트에서는 장애인이 거주하는 간호동에 치유 정원을 만들었다. 급성과 아급성 정신 질환을 앓는 이들이 머무는 공간이기에 자살을 예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또 다른 한 해에는 교도소의 텃밭 정비에 힘썼다. 건물 확장 공사가 진행되며 많은 텃밭이 철거되거나 훼손된 상태였다. 이를 재정비하면서 동시에 면적을 더 확보했다. 공사로 굳어진 토양을 회복시키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2018년에 지은 방문자를 위한 정원은 가장 애착이 가는 프로젝트다. 어린이 정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수감자를 방문하는 가족이나 자녀와의 연대를 키워주고자 마련한 공간으로, 방문자를 위한 정원에서만큼은 수감자가 아닌 엄마나 언니, 이모, 할머니, 친구라는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기 바랐다. *환경과조경 403호(2021년 11월호)수록본 일부 줄리 스티븐스(Julie Stevens)는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조경학과 부교수로, 디자인/빌드 커뮤니티 서비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2011년부터8년간 학생들과 함께 아이오와 여성 교도소에 조성한 다양한 치유 공간은 미국조경가협회(ASLA) 사회봉사 부문에서 최우수상을받았다. 스티븐스는 ASLA의 ‘환경 정의를 위한 전문가 네트워크(Environmental Justice Professional Practice Network)’의창립자로, 모든 이가 평등하게 건강한 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환경정의의 이슈를 조경 교육, 연구, 실무 분야에 접목하고 있다.환경 정의란 세대 간, 국가 간, 계층 간 환경 배분의 형평성을 실현하자는 개념이다. 자연환경은 공익성이 강하므로 환경에서 오는 다양한 이익을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누리게 하고 환경 파괴를 줄여건강한 자연을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취지다. 조성빈은 유년 시절을 미국과 한국의 다양한 도시에서 보냈고,공간과 도시에 매료되어 한국과 노르웨이에서 건축과 조경을 공부했다.늘 경계에 있는 사람으로 살아와 깊이는 부족해도 본질에 관심이 많고,관계에서든 공간에서든 진정성을 추구한다.조경설계 서안을 거쳐 조경작업소 울에서 놀이터와 커뮤니티 디자인을 하고 있다. 김연금은 서울 옥수동에서 태어나 살고 있고, 2009년부터 옥수동 옆 약수동에서 조경작업소 울을 운영하고 있다.『텍스트로 만나는 조경』,『커뮤니티디자인을 하다』,『소통으로 장소만들기』,『우연한 풍경은 없다』등 다양한 집필 작업을 해왔다. 2020년에는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인 이규목 교수를 비롯해 여덟 명의 조경가의 글을 엮어『이어 쓰는 조경학개론』을 펴냈다.
  • [숲자락 식재 탐험기] 숲자락 식물 이야기
    화단에 심은 식물이 죽었어요. 왜 그럴까요? 식물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흔히 받는 질문 중 하나다. 많은 이가 화단에 심은 식물이 몇 해 지나지 않아 시들시들하다 죽은 것을 발견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먼저 짚어봐야 할 점은 ‘그 식물이 자생하는 환경과 현재 키우고 있는 장소의 환경이 비슷한가’다. 식물은 저마다 선호하는 환경이 있다. 좋아하는 빛의 양, 습도, 토양, 온도, 나아가 이웃하며 즐겨 어울려 자라는 식물이 다르다. 식물이 생존하고 자라기 위해 최소한으로 충족해야 하는 환경적 요건들이 있다. 우리가 식물을 정원에 초대할 때 알아야 하는 필수 정보다. 그래야 식물이 건강히 자랄 수 있고, 심고 기르는 우리도 식물에게 보다 떳떳한 조경가가 될 수 있다. 정보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물론 다양한 정보가 있는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된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 그 식물이 자라고 있는 자생지에 가서 한 번 살펴보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된다. 자연 속에서 자라는 식물 옆에 나란히 앉아 햇빛 한 줌과 딛고 있는 땅의 감촉을 느껴보고 촉촉한 공기의 질감을 함께 호흡해보는 그 시간이 커서가 깜빡이는 모니터 속 정보를 읽는 것보다 훨씬 큰 공부가 된다. 식물탐험대의 숲자락 식물 탐험은 실제로 식물이 어디서 살아가는지, 어떤 식물들과 벗하고 어떤 빛 아래, 어떤 조건에서 살아가는지 관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탐험을 통해 모은 자료를 이번 글에 소개한다. 총 42명의 식물탐험대가 한 달 동안 찾은 숲자락 식물 자료를 수집하고 일곱 명의 집필진이 부족한 내용을 보완하고 다듬었다. 그중 ①숲자락에 서식하는 여러해살이풀, ②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월동 가능한 내한성이 강한 식물, ③자생식물, ④정원 적용에 적합한 식물의 네 가지 기준에 따라 80종의 식물 목록을 선정했다 *환경과조경403호(2021년 11월호)수록본 일부 식물탐험대는2021년 봄,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의 식물적용학 수강생42명이 결성한 그룹이다.강보경,김은정,김장훈,노진선,오세훈,이양희,정은하 등42명의 대원들을 대표하는 일곱 명의 집필진은 정원·조경 분야의 실무자와 학계,수목원·식물원의 연구자 등 다채로운 경력을 가진 이들로 이루어져 있다.숲자락의 단면을 정원에 도입하기 위해 떠난 흥미롭고 유익한 탐험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 [북 스케이프] 인류세를 위한 동화 『나무를 심은 사람』
    코로나19로 인간이 발걸음을 끊자 다시 살아나는 환경이 전 세계적 화제가 되고, 자연을 가꿔 소생시킨 이들의 일화가 새로운 영웅담으로 등장한다. 이때 자주 등장하는 수식어가 ‘현실판 나무를 심은 사람’인데, 그 원작인 『나무를 심은 사람(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1953)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나무를 심은 사람』은 프랑스의 작가 장 지오노(Jean Giono)의 단편 소설로, 현대의 고전 중 하나다.(각주1)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고산 지대를 여행하던 화자가 홀로 묵묵히 도토리 열매를 심는 목자를 만났고, 그의 평생에 걸친 작업을 통해 숲이 만들어지고 다시 삶터가 소생하게 되었다는 회고담이다. 정독을 해도 30분이 걸리지 않을 이 작품이 이토록 오래도록 널리 회자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20대의 ‘나’는 고산 지대로 도보 여행을 떠났다. 마을에는 물이 말라붙었고, “낡은 말벌집” 같은 버려진 마을과 먹이를 앞에 둔 “짐승들”처럼 으르렁대는 바람이 분다. 이런 곳을 몇 시간이나 홀로 걷다 양치기를 만나 목을 축이고, 그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머문다. 양치기는 밤마다 도토리 자루를 가지고 와 씨알 굵고 금 간 데도 없는, 상태가 완벽한 도토리 100개를 고른다. 다음날 이 도토리를 물통에 담그고 양떼를 몰고 나간다. 초지에 이르면 양떼를 개에게 맡겨두고 그는 산등성이에 도토리를 심는다. 그 땅이 사유지인지 공유지인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저 날마다 도토리 100개를 정성스럽게 심는 게 중요하다. *환경과조경403호(2021년 11월호)수록본 일부 _ 각주 1. 『나무를 심은 사람』은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완역본(김경온 역, 두레, 2018; 김화영 역, 민음사, 2009)과 프레더릭 백의 삽화가 포함된 판본(햇살과나무꾼 역, 두레아이들, 2002) 등이 있다. 프랑스 출신의 캐나다 애니메이터 프레더릭 백의 ‘나무를 심은 사람’의 영상은 유튜브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황주영은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 박사후 연수를 마쳤다.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문화사적 관점에서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 그러는 동안수많은 책을 사거나 빌렸고 그중 아주 일부를 읽었다.
  • [에디토리얼] 공터의 힘
    개관과 동시에 장소 덕후들의 성지로 등극한 안국동 서울공예박물관. 400년 수령의 장엄한 은행나무, 테라코타 관을 둥그렇게 쌓은 크레이프 케이크 형태의 파사드, 곡선형 콘크리트로 유려하게 지형 틀을 잡은 경사 초지, 지극히 이질적인 이 세 요소를 한 프레임에 담으면 대충 찍어도 어느 각도에서나 그림이 나온다. 요즘 인스타그램을 도배하고 있는 장면이다. 공예박물관 안마당의 이 매력적인 풍경은 포토제닉할 뿐 아니라 고즈넉한 산책과 휴식도 넉넉히 담아낸다. 그러나 공예박물관의 도시적 잠재력은 감고당길과 안국역 쪽으로 담장 없이 활짝 열린 박물관 앞마당에서 펼쳐진다. 이 공터는 2017년까지 70년 넘게 풍문여고의 운동장으로 쓰였다. 겹겹이 쌓인 기억의 지층은 훨씬 더 두껍다. 감고당길 입구에는 ‘안동별궁 터’ 표지석이 서 있다. “조선 초부터 왕실의 거처였다가 마지막 황제 순종의 가례처로 사용된 궁터.” 안동별궁은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별궁으로 쓰였고, 세종이 승하한 곳이자 문종의 즉위식이 열린 곳이며, 고종이 건물을 개축해 순종의 혼례를 역사상 가장 성대하게 치른 축제의 장이기도 했다. 근대 여성 교육을 이끈 학교로 변모했다가 이제 공공 박물관으로 변신했다. 안동별궁과 풍문여고를 함께 써넣어 검색해보면 풍문여고 교정 안에 안동별궁이 있는 1950년대의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뜬다. 근대식 교사에 옛 별궁 한옥들이 이어져 있고 그 앞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줄 맞춰 조회를 하는 기묘한 광경이다. 게다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인사동과 북촌 사이라는 도시적 맥락까지 겹친 장소성, 만만치 않다. 설계공모 당선 이후 박물관 건축을 주도한 송하엽 교수(중앙대)의 말처럼, 이곳은 “시간을 걷는 공간”이다. 하지만 공예박물관 외부 공간이 뿜어내는 힘의 원천은 시간도, 기억도 아니다. 그 힘의 열쇠는 빈 땅 그 자체에 있다. 안국역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모두에게 열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터와 담장을 둘러친 학교 운동장의 차이를 바로 실감할 수 있다. 여름과 가을의 기 싸움이 팽팽하던 오후, 조경 설계로 이 빈 땅의 잠재력을 극대화한 박윤진 소장(오피스박김)을 만나 공터 곳곳을 느릿느릿 산책했다. “처음 방문한 날, 풍문여고 흙 운동장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어요. 설계비만 계산하면 손해일 게 뻔했지만 무조건 프로젝트를 맡기로 마음먹었죠. 담장만 걷어낼 수 있다면 서울에서 가장 인상적인 오픈스페이스를 만들어낼 자신이 있었어요.” 이미 블로썸 파크(『환경과조경』 2016년 9월호)와 경기도 북부청사 광장(2020년 5월호)뿐 아니라 민간과 공공을 가리지 않는 다양한 작업에서 바닥면 실험과 지형 설계 혁신을 실천해온 오피스박김은, 빠듯한 예산과 층층시하 간섭이라는 서울시 프로젝트의 고질적 난맥을 설계 역량과 노하우로 극복하며 도심 공터의 장소적 가치를 가시화하는 성과를 거뒀다. 애초의 생각처럼 폐쇄적 담장을 허무는 데 성공했음은 물론이다. 풍문여고 담장을 헐면서 옛 안동별궁 담장의 기단석과 행각 터가 발견되었고 문화재위원회는 노출 전시를 결정했다. 야심 찬 계획과 달리 허술하게 완결되기 마련인 공공 도시·건축 프로젝트를 조경가의 안목과 솜씨가 어떻게 살려냈는지, 세세한 설명은 아끼기로 한다. 가보면 바로 느낄 수 있다. 조경가의 안목과 지혜를. 감고당길을 사이에 두고 서울공예박물관 맞은편에는 이건희미술관의 유력 후보지인 송현동 숲이 자리한다. 박물관 교육동 전망대에 오르면 야생의 숲처럼 장엄한 송현동 일대의 녹색 풍경이 멀리 인왕산을 배경으로 넓게 펼쳐진다. 주변 고층 건물에서 찍은 조감 사진은 고밀한 도시 조직, 송현동 숲, 공예박물관 공터의 극명한 대조와 긴장을 전시한다. 열린 공터의 도시적 잠재력을 감각적으로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감고당길에 서서 박물관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관람 목적을 가지고 오는 사람 못지않게 목적 없이 ‘그냥’ 들고나는 사람이 많다. 모처럼 도심 산책을 즐기다가, 즐거운 퇴근 걸음으로 안국역으로 향하다가 뻥 뚫린 공간을 보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공터에 들어서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어, 뭐지? 외마디 혼잣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의 매력, 담 없는 도시 공터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다. 공예박물관 앞마당은 길 역할도 톡톡히 해낸다. 부지 서쪽 감고당길과 동쪽 윤보선길을 가로지를 수 있는 한가롭고 여유로운 연결 통로인 셈이다. 박윤진 소장과 나도 통과 동선으로 박물관 앞마당을 사용하는 이들 뒤를 쫓아 윤보선길로 접어들었다. 인왕산에 걸린 노을을 따라 골목을 걷다 보니 마침 그럴싸한 노포 호프집이 등장했다. 유달리 높고 파란 하늘과 불타는 노을 사진으로 SNS가 북적이는 이 가을, 잠시 틈을 내 가볼 만한 조경 작업과 전시도 풍성하다. 오피스박김의 ‘서울공예박물관’뿐 아니라 이달 지면에 모은 김아연의 ‘가든카펫’(덕수궁, ‘상상의 정원’ 전), 김봉찬·신준호의 ‘어반 포레스트 가든’과 정영선의 ‘나의 정원’(피크닉, ‘정원 만들기’ 전), 안마당더랩의 ‘일분일초’(소다미술관, ‘오픈 뮤지엄 가든: 우리들의 정원’ 전)에서 반나절 가을 나들이의 여유를 맛보시길. 아쉬운 소식을 전한다. 2018년 6월호(362호)부터 함께 지면을 만든 윤정훈 기자가 402호를 끝으로 환경과조경 생활을 마무리한다. 마흔한 권 잡지 곳곳에 밴 그의 흔적을 기억하며, 새로운 도전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 [풍경 감각] 스노볼의 파수꾼
    한낮 버스에 앉아 창밖 보는 걸 좋아한다. 파란 하늘 아래 산들거리는 가로수와 제각기 다른 차림으로 오가는 사람들. 신호등 불이 자리를 바꾸면 자전거가 멈춰 서고 버스가 다시 움직인다. 평범한 풍경이지만 버스 창문 너머로 보면 무엇이든 안온하고 괜찮아 보인다. 늘 평화로운 스노볼처럼.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이런 감상은 모두 휘발되어 사라진다.뭉개진 은행나무 열매 냄새와 간판을 가리는 무성한 가로수에 불평하는 목소리가 도시의 소음과 뒤섞여 시끄럽다.
    • 조현진
  • [나의 미개봉작 상영기] 은근히 낯은 가려도 프로젝트는 안 가려요
    수취인 불명의 전파 라디오 웨이브 연재를 통해 미개봉작(업)을 개봉하게 돼서 기쁜 한편, 철(학) 없음, 눈치 없음, 맥락 없음, 판단 착오, 아마추어리즘 등 그다지 대단한 게 ‘없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크다. 경험과 학력, 스펙이 미천해 작은 회사를 운영 중이고 소개할 프로젝트가 대단하지 않다. 하지만 원고 청탁을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엘리트, 에이스, 주류 집단에 소속되지 않거나 공모 수상, 비범한 능력, 트렌디한 감각을 당장 갖추지 않더라도 지속적 조경 활동을 할 수 있음을 누군가에게는 알리기 위함이다. 조경 덕후 나는 스스로를 ‘조경 덕후’로 소개한다. 조경과 관련된 인물, 새로 만든 공간, 도시·녹지 관련 정책과 법규, 도면 및 내역, 공모 결과 등 거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탐방하고, 사모으고, 읽고, 저장하고, 대화를 나눈다. 덕후로서 공들이는 것 중 하나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에서 조경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다. 작은 프로젝트여도 거절하지 못하고 발전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 일에도 진심으로 임한다. 그 과정에서 회사의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거나 정식 참여사로 이름을 올리지 못해도 조경의 가치를 프로젝트 관계자들과 공유할 수 있다면 말이다(그렇다고 회사 운영이 위험해질 상황은 만들지 않는다). 나의 미개봉작은 대개 덕후적 선택과 기계적 집중의 결과이자 조경 관련 작업, 활동, 행위를 사랑해서 생긴 부산물이다. 대부분 미완의 작업이거나 망상적 희망의 결과물이다. 조경가이자 일반인으로서 해야 할 말과 담아야 할 시대상을 주목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에 투영한다. 즐겁다. 응원과 인정도 받는다. 공식적 역할을 인정받을 가능성은 떨어지지만 라디오 또는 김지환의 정체성이 반영될 가능성은 커진다. 큰 프로젝트일수록 사공이 많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내 뜻대로 이끌 수 있는 이름 없는 작업을 지속한다. 공모, 제안 이외에 무상으로 하는 일은 없다. 민주주의정원 ‘민주주의정원’은 2016 경기정원문화박람회 출품작으로, 2015 코리아가든쇼 출품작 ‘소 잃은 외양간’, 2016 서울정원박람회 출품작 ‘아낌없이 쓰는 사람’과 함께 사회 문제 3연작을 이룬다. ‘소 잃은 외양간’은 세월호와 관련해 사회적 대참사를 언급했고, ‘아낌없이 쓰는 사람’은 평창올림픽을 위해 500년 된 원시림을 훼손한 사건을 주제로 개발과 보존을 이야기했다. 민주주의정원에는 2015년의 사회 분위기를 담았다. 당시 중앙정부는 집권을 위해 지방정부를 탄압하고 헌법에 보장된 지방자치제를 축소하는 듯했다. 이를 반영하고자 정원을 이루는 모든 개념을 헌법에서 가져왔다. 동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모티브 삼아 정원 입구에 대나무숲을 만들고, 숲 속의 외침을 밖으로 퍼트리는 붉은 깔때기를 더했다. 조선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 연출 기법, 식물 배치, 의미 부여와 같은 답 없는 한국성 찾기의 일환이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로 한국성을 표현하려는 실험이자 단순하고도 강렬한 이미지를 찾으려는 강박에서 비롯된 디자인이다. 가든쇼의 공식처럼 여겨지는 혼합 식재, 비움과 위요, 한국성을 위시한 조선 시대풍에 반발하는 33세 김지환의 분열적 정신 세계의 반영이다. *환경과조경402호(2021년 10월호)수록본 일부 김지환은 영남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씨토포스와 스튜디오엘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으며 현재는 조경작업장 라디오의 대표다. 스스로를 작업반장, 설계공이라 칭하듯 설계와 시공 사이의 중재자(신호등) 역할의 중요성을 인지해 그 관계의 매커니즘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사회적 대기업을 만들어 도시 내 모든 디자인을 손대고 싶어 하는 야망과 유명 건축가와 조경가의 작업을 보며 절망과 환호를 즐기는 이상주의적 성향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더욱 견고하게 한다고 믿는다. 때론 못다 한 말을 해시태그로 덧붙이기도 한다. #라디오에이스 #정원작가 #은근히낯가려요 #조경뚱
  • [숲자락 식재 탐험기] 식물적용학과 숲자락 서식처
    디자인은 점과 선 그리고 면으로 이루어진다. 꽃잎이 점이라면, 바람에 흩날리는 가느다란 잎은 선이다. 멀리서 바라본 숲은 하나의 면이 되기도 한다. 살아 있는 혹은 죽을 수도 있는 식물을 소재로 디자인하는 조경가들은 아름다운 도면 한 장으로 디자인을 완성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조경가들이 고군분투하는 동안 식물을 바라보는 대중의 안목이 높아졌다. 정원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공간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취향이 다양해져서 모든 것이 하나의 유행을 따라 물밀듯 밀려가는 시대는 이제 옛일이 되었다. 정원을 주제로 한 전시에 사람들이 주목하고, 플랜테리어로 내부를 꾸린 상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내뿐만 아니라 실외 공간의 규모와 스펙트럼이 다양해지고 있다. 조경가가 해야 할 일이 많아지고 있다. 식물적용학이라는 말이 생소할 것이다. 식물적용학은 평면의 형태와 입면에 그치지 않고 계절과 미기후, 토양과 입지 조건 등의 환경을 바탕으로 자연의 순리에 맞게 바른 장소에 바른 식물을 ‘적용’하는 방식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식물지리학과 식물사회학에서 파생된 과학적인 접근법을 취한다. 식물을 소재로 다루는 조경가가 갖춰야 할 당연한 소양처럼 보이지만, 컴퓨터 속 이미지로 식물을 심는 사람들에겐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다. 조경학과를 막 나온 졸업생이 설계사무실에서 도면을 그릴 때 아는 식물이 몇 종류나 될까. 도면에 그린 식물을 정확히 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마 그때 도면에 그린 원들은 식물이 빛을 얼마나 받는지, 토양의 상태는 어떠한지 고려하지 못한 채 녹지 면적을 채운 동그라미들에 불과할 것이다. 2021년 봄,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thirdspace-berlin.com)에서 온라인으로 식물적용학 시즌 1 강의가 진행됐다. 수강생 중 42명이 식물탐험대를 결성했고, 첫 번째 과제로 숲자락 식물을 찾아내는 일이 주어졌다. 고정희 대표(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가 말하는 식물적용학이란 ‘식물과 함께’ 정원을 만들기 위해 또는 도시 공간의 생태적 환경을 책임지기 위해 필요한 기초 이론과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며, 식물지리학, 식물형태학, 식물사회학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최종 목표는 지속가능한 정원과 도시 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종 다양성에 기여할 수 있는 전략,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공간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환경과조경402호(2021년 10월호)수록본 일부 식물탐험대는 2021년 봄,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의 식물적용학 수강생 42명이 결성한 그룹이다. 강보경, 김은정, 김장훈, 노진선, 오세훈, 이양희, 정은하 등 42명의 대원들을 대표하는 일곱 명의 집필진은 정원·조경 분야의 실무자와 학계, 수목원·식물원의 연구자 등 다채로운 경력을 가진 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숲자락의 단면을 정원에 도입하기 위해 떠난 흥미롭고 유익한 탐험기를 들려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