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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과 사람을 잇는 사람들] 미완의 정원으로 대화의 씨앗을 심다
    한국에서 해외의 주민 자치 사례를 꼽을 때 자주 언급되는 것이 일본의 자치회自治(jichikai)1다. 이 자치회는 한국의 통·리 단위 수준에서 결성되며, 원칙적으로는 정해진 구역 내에 거주하는 모든 세대로 조직되고 보통 50~200세대 사이의 규모다. 인구 고령화와 도시 집중화를 거치며 기능을 많이 잃었지만, 지진과 같은 대참사가 일어났을 때 작동하는 사회 안전망으로써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일본에 약 30만 개가량 되는 자치회 중에서도 치바 현의 마쓰도 시 이와세 자치회는 조금 특별하다. 자치회 위원들이 행정 업무를 위해 사용하는 자치회관에는 보통 나이가 있는 관리인이 상주하는데, 이곳에는 젊은 학생 부부가 살고 있다. 이와세 자치회의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그룹의 구성원들이 서로 활발한 상호작용을 통해 창의적인 결과를 도출하도록 돕는 전문가)이자 동네 어린이들의 친구인 미츠나리 테라다와 그의 아내 마리아 에르밀로바다. 둘은 치바 대학교 원예대학에서 공부하던 5년 전부터 자치회관에서 거주하며 주민들과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화상으로 커뮤니티 안에 속해서 매일 화초에 물 주듯이 공동체를 살피며 키워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현재 거주하는 이와세2는 어떤 곳인지, 그곳에서 자치회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금하다. 치바 대학교 원예대학에서 석사과정을 하고 있을 때 이와세 자치회의 커뮤니티 퍼실리테이터로 초대를 받았다. 당시 내 전공이 교육학이라는 걸 안 자치회장이 지역 아이들을 위한 축제 준비를 요청했다. 그렇게 2016년 2월 마리아와 함께 이와세 자치회관 2층의 관리자실에 입주했고, 무료로 거주하며 이와세 커뮤니티와 협력하고 있다.(미츠나리) 2015년 가을에 치바 대학교에서 환경계획학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러시아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 학부에서는 생태학을 전공했는데, 그 과정에서 도시재생과 도심의 녹지 보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생태학은 이론적 연구에 그치거나 실천을 하려 해도 관료적 절차에 의해 제한되는 경향이 있어 답답함을 느꼈다. 도시계획을 통한 보다 실천적인 접근법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왔고, 학교에서 미츠나리를 만났다.(마리아) 일본 자치회의 역사가 꽤 역사가 긴 것으로 알고 있다. 생성 배경과 시대적 변화에 따라 자치회의 역할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자치회는 일본의 농업 사회에 기반을 둔 개념이다. 동네 단위라는 물리적 영역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지역 사회 공동의 이익을 위한 마을 축제를 열거나 다양한 자원봉사를 하며 주민들이 서로 연결되고 협력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가로등 관리 같은 커뮤니티 시설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일도 하지만, 요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방범 활동이나 재난 관리를 통해 동네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과거의 자치회는 어린이부터 부모, 나이 많은 어르신까지 다양한 세대가 어우러져 소속감을 느낄수 있는 형태였는데, 지금은 대체로 노인 세대만 참여하는 상황이다. 젊은 세대는 자치회가 구세대 문화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자치회 행사에서 여자는 부엌에서 요리하고 남자만 중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다양한 세대를 연결하는 일이 중요해지고 있고, 자치회에서도 젊은 세대를 다시 끌어들이고자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이와세 자치회장도 이 동네가 노인 중심 공간이 되는 것을 우려해 우리가 이곳의 주민으로서 분위기를 바꿔보기를 바랐던 것 같다. 퍼실리테이터로서 세운 전략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세대를 연결해 안전망을 튼튼히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어린이 참여와 생태학적 기술을 이용해 조경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후략) *환경과조경399호(2021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일본은 읍면동 단위에도 동사무소 대신에 협의회 성격의 주민 자치회가 결성돼 있다. 자치회는 1800년대 후반, 메이지 시대 때 행정 말단 업무를 맡아 실질적인 주민 생활, 생산 활동의 중요 기능을 담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전시 체제 강화의 도구로 사용되며 부정적인 인식이 생기기도 했다. 2. 이와세는 마쓰도 시의 통 단위에 해당하는 지역 중 하나다. 630세대가 거주하고 있지만 자치회에서 활동하는 회원은 100세대 미만이다. 참고로 마쓰도 시에는 약 24만 세대가 거주한다. 이와세는 1970년대에 도쿄로 통근하는 사람들을 위한 주택 도시로 형성되어 지금까지도 주거지가 많다. 30분이면 동네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커뮤니티이기도 하다. 조성빈은 유년 시절을 미국과 한국의 다양한 도시에서 보냈고,공간과 도시에 매료되어 한국과 노르웨이에서 건축과 조경을 공부했다.늘 경계에 있는 사람으로 살아와 깊이는 부족해도 본질에 관심이 많고,관계에서든 공간에서든 진정성을 추구한다.조경설계 서안을 거쳐 조경작업소 울에서 놀이터와 커뮤니티 디자인을 하고 있다. 김연금은 서울 옥수동에서 태어나 살고 있고, 2009년부터 옥수동 옆 약수동에서 조경작업소 울을 운영하고 있다.『텍스트로 만나는 조경』,『커뮤니티디자인을 하다』,『소통으로 장소만들기』,『우연한 풍경은 없다』등 다양한 집필 작업을 해왔다. 2020년에는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인 이규목 교수를 비롯해 여덟 명의 조경가의 글을 엮어『이어 쓰는 조경학개론』을 펴냈다.
  • [북 스케이프] 『친화력』과 괴테의 화학 실험 정원
    과학 기술 용어를 일상 속에서 쓰는 일은 낯설지 않다. ‘지속가능한 개발’이나‘회복탄력성’같은 예를 들지 않아도,당황하면 머릿속‘서버가 다운’되고,저녁이면 스마트폰뿐 아니라 나도‘방전’된다.디지털 세상에는 각종‘밈(meme)’이 돌아다니고,학기말이 가까워질수록‘엔트로피’가 증가하면서 방은 점점 더 엉망이 된다.그리고 사람 간 성향이 잘 맞아 조화를 이루면‘케미(스트리)’가 좋다고 한다.마지막 예는 근래 생겼다고 생각했는데,놀랍게도 이미19세기에,그것도 대문호 괴테가 소설『친화력(Die Wahlverwandtschaften)』(1807)에서 사용했다.1친화력(affinity),혹은 선택적 친화력(elective affinity)은 특정 물질끼리 강하게 결합하려는 성질을 뜻하는 화학 개념이다.괴테는 사람,특히 연인 관계에 이 개념을 도입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이 관계의 변화에서 정원과 자연은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한다. 부유한 귀족 에두아르트와 샤로테는 재혼 부부다.젊은 시절 서로에게 끌렸지만 각자의 사정으로 다른 이와 결혼한다.그러다 둘 다 배우자와 사별하고 우여곡절 끝에 재혼한다.동화였다면 이들은 에두아르트의 시골 장원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겠지만,애틋한 사랑도 일상에서는 담백해지기 마련이다.단조로운 시골 생활이 지루해진 에두아르트는 어려움에 처한 친구인 대위를 집에 들일 생각을 한다.샤로테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곧 기숙 학교에 있는 조카 오틸리에도 집에 들인다는 조건으로 동의한다.그런데 막상 네 사람이 함께 있게 되자 상황은 미묘하게 바뀐다. (후략) 각주 1.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친화력』은 민음사(김래현 역, 2001)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오순희 역, 2013)등에서 출간되었다. *환경과조경399호(2021년 7월호)수록본 일부 황주영은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 박사후 연수를 마쳤다. 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문화사적 관점에서 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 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책을 사거나 빌렸고, 그중 아주 일부를 읽었다.
  • [에디토리얼] 용산공원, 한 걸음씩
    한미 양국이 용산기지 이전에 합의한 지 30년을 맞은 지난해에는 용산공원 조성의 느릿느릿한 걸음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2020년 8월, 금단의 땅의 빗장이 드디어 풀렸다. 서빙고역 건너편 기지 동남쪽의 ‘미국 장교숙소 5단지’(약 5만m2)가 개방된 것이다. 이제 누구나 들어가 자유로운 산책과 여유로운 피크닉을 즐길 수 있다. 다양한 세대의 시민들이 공원 계획과 조성 과정에 참여하는 플랫폼으로도 쓰일 전망이다. 올해 초부터 활동을 시작한 용산공원 국민참여단도 매달 이 장소에 모여 워크숍을 이어가고 있다. 12월에는 국립중앙박물관 북쪽 ‘스포츠 필드’와 장교숙소 5단지 인근 ‘소프트볼 경기장’이 반환됐다. 116년간 지도에서 삭제된 미지의 땅이 우리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반환받을 땅 전체의 2.6%(5만3,418m2)에 불과하지만, 이 두 구역은 장차 공원의 관문 역할을 할 핵심 공간이며 최소한의 손질만 하면 당장 임시 공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2030년대 초로 예상되는 공원 개장 전에도 이 순차적 반환 부지들은 공원 조성의 프로세스를 디자인하는 리빙랩으로, 젊은 예술가들의 문화 발전소로, 또 미래 세대의 신나는 공원학교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작년에는 용산공원의 경계가 확장되고 면적이 크게 넓어진 성과도 있었다. 기지에 맞붙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용산가족공원, 전쟁기념관 부지가 용산공원으로 편입됐고, 해방촌에 바로 접한 기지 북쪽의 군인아파트(약 4만4천m2)와 옛 방위사업청(약 9만6천m2) 부지도 공원 경계 안으로 새로 들어왔다. 공원이 300만m2로 넓어져 드디어 여의도 전체 면적을 넘어서게 됐다. 올해 1월 말부터 7주간 온라인 교육을 통해 용산기지의 역사, 용산공원의 비전과 조성 방향 등 배경지식을 학습한 300명의 ‘용산공원 국민참여단’은, 3월부터는 매달 정기 워크숍을 가지며 용산공원의 미래상을 토론하고 있다. 국민참여단은 오는 7월까지 공원의 정체성과 역할, 공원과 주변 지역의 연결, 지역 사회의 미래, 사회적 약자 배려 등의 의제를 담은 ‘국민권고안’을 작성할 예정이다. 2018년 12월에 완성된 용산공원 기본설계(안)에 이 국민권고안을 반영해 발전시킨 공원조성계획이 올 연말까지 마련될 전망이다. 봄비가 장맛비처럼 쏟아지던 지난 5월 초, 공원 경계에 새로 편입된 군인아파트와 옛 방위사업청 부지에 다녀왔다. 방위사업청이 과천으로 이전한 뒤 국군복지단과 국군홍보원이 등이 남아 있는 옛 방위사업청 부지에는 1970년대 초까지 해병대 사령부가 있었다. 1955년, 진해에서 후암동으로 이전하며 언덕 지형을 살려 계단식으로 지은 해병대 사령부 본관 건물은, 군인아파트 부지 내의 해병대 사령부 초대교회와 함께 용산공원의 근대 역사문화 유산을 대표하는 건물로 재활용될 전망이다. 용산공원 안의 건물 대부분이 일본군과 미군이 지은 것인 반면, 해병대 사령부 본관과 초대교회는 한국군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옛 방위사업청과 군인아파트 부지의 매력은 용산공원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북동쪽으로는 남산의 숭고한 풍광과 남산타워의 위용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북쪽과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전경으로는 후암동과 청파동 일대가, 원경으로는 서울 도심 풍경 전체가 넓게 펼쳐진다. 남쪽으로는 장차 용산공원의 수평적 경관과 그 너머 한강 경관을 파노라마로 조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용산공원 최고의 ‘뷰 맛집’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군인아파트 부지는 해방촌의 도시 조직과 바로 접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잠재력을 지닌다. 훗날 남산에서 해방촌을 지나 용산공원으로 이어질 녹지축 위에 바로 군인아파트 부지가 있다. 남산의 산세를 공원으로 잇는 생태녹지축을 완성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우선 해방촌의 복잡한 필지와 가로망을 지혜롭게 세로지르는 보행 녹지축을 설계하면 매력적인 산책길을 만들 수 있다. 군인아파트 부지는 용산공원의 중요한 입구 중 하나가 될 것이며, 공원의 여러 구역 중 주변 지역의 상권 및 문화와 영향을 주고받는 역동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이 땅이 공원에 새로 편입되지 않았다면 남산과 용산공원의 연결이라는 목표는 영원히 풀기 힘든 난제로 남았을 것이다. 오는 8월 통권 400호 발간을 맞아 매달 50권씩 『환경과조경』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연속기획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이번 달에는 최혜영 편집위원이 2009년 3월호(251호)부터 2013년 4월호(300호)까지 리뷰한다. 표지와 책등을 통해 『환경과조경』의 변천을 추적한 특집(2021년 3월호), 옛 편집자들을 초대한 특집(2021년 5월호)에 이어, 이번 호에 지면에는 편집 디자인의 변화상을 조감하는 특집을 마련한다.
  • [풍경 감각] 빵 반죽을 부풀려주진 않겠지만
    후배가 빵집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경학과 나와서 빵집을 하다니! 신기해 하다가 나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내 책을 살펴보다가) 어떻게 식물을 잘 아세요?” “조경을 전공했어요.” “(신기해하며) 그림이 많아서 미술을 전공한 줄 알았어요. 조경이 그림과 관련이 있나요?” “(잠깐 고민하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공부하고 조감도 같은 이미지 작업도 많이 해서 도움이 된 거 같아요.” 조경을 전공한 것이 직업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에 도움을 주진 않았다. 도면이나 조감도는 포트폴리오에 싣지 못했고(결이 맞지 않았다), 그림을 인쇄할 종이로 216g짜리 루프지가 나을지 210g짜리 몽블랑이 나을지, 저작권은 어떻게 발생하고 출판권은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는 조경 바깥에서 답을 찾아야 했다. (후략) *환경과조경398호(2021년 6월호)수록본 일부
  • [『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 한국조경의 길라잡이
    고백부터 하나 해야겠다. 만드는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나는 『환경과조경』의 열혈 구독자는 아니다. 잡지를 받으면 일단 비닐을 뜯지 않은 채 방 어딘가에 둔다. 시간이 좀 지나면 이런저런 것들이 어질러진 너저분한 방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그제야 가위를 들고 비닐을 자른다. 휘리릭 넘기며 새 책의 냄새를 한번 맡는다. 그리고 또 한동안 책상 한편에 방치한다. 표지가 예뻐 눈요깃거리로 나쁘지 않다. 문득 한 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날이 생긴다. 평소보다 조금 여유로운 날이리라. 책을 펼쳐 든다. 그러나 간만의 여유로움은 오래 허락되지 않는다. 한 꼭지가 끝나기도 전에 ‘카톡’, 무언가를 요청하는 메시지가 끊임없이 온다. 하루에 받아보는 카카오톡 메시지만 따지면 나 없이 과연 세상이 돌아갈까 싶다(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 안다). 집중이 어려운 것도 문제다. 여기에는 출산의 후유증(이라 주장하지만 사실은 신체의 노화)도 한몫한다. 우아하게 읽어보고자 커피한 잔까지 손에 들었건만 예전과 다르게 집중력과 기억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눈길은 금방 갈 곳을 잃는다. 난독증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자꾸 글을 뒤에서부터 앞으로 거꾸로 읽는다. 여하튼 그렇다. 『환경과조경』과 데면데면한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육아와 일에 치이다 보면 쌓이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보다 더 자극적인 재미를 찾게 된다. 잡지를 읽으며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며 지적 충만감을 느끼지만 한편으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고작 잡지면서! 수준 높은 글과 콘텐츠를 소화하려고 애쓰다 보면 잡지 하나 읽는 데도 이렇게 에너지를 써야 하나 싶어 열불이 난다. 휴식인지 공부인지 모르겠다. 비하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전문지를 표방하는 『환경과조경』은 잘못이 없다. 잡지가 전달하고자 하는 교양의 수준을 내가 따라가지 못할 뿐. 얼마 전 만난 한 친구는 이런 얘기를 했다. 남들은 다 잘나가는데 나만 뒤처지는 게 아닌가 불안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그때는 『환경과조경』을 보지 않았단다. 자신이 더 초라하게 느껴질 것 같아 볼 수 없었다고 했다. 그 말에 공감한다. 사람은 가끔 혼자만 시궁창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열심히 살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을 때, 『환경과조경』이 보여주는 멋진 프로젝트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더욱 자괴감이 든다. 아마 잡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와 소재가 내가 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보니 더 그런 것 같다. 영화 잡지, 시사 잡지를 볼 때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일말의 부담감이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었구나. 참고로 이 분야와 전혀 상관없는 나의 신랑은 『환경과조경』의 애독자다. 이쯤이면 눈치 챘을 것 같다. 나와 『환경과조경』의 거리감에 대해 장황한 썰을 푼 이유를. 어쩌다 보니 편집위원이 되었고, 50권을 읽고 리뷰를 해달라는 요청 같은 하달(!)을 받았지만 고백한대로 사실 나는 한 권도 제대로 읽어 내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런 내가 어찌 앞서 전문적으로 리뷰 기사를 작성해준 이들과 같은 수준으로 글을 쓰겠는가. 50호가 발간되는 동안 보이는 경향의 변화와 조경계의 발전상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 개인적으로 눈길이 가는 꼭지 위주로 두서없이 골라 생각을 끼적여 보기에도 벅차다. 원고를 요청을 받고 한동안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부담감에 힘겨웠지만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조금이나마 가뿐한 발걸음으로 지극히 헐렁한 독자 관점에서 리뷰를 시작해 보겠다. 만족이 안 되는 독자에게는 251호에서 300호까지 직접 읽어 보길 권장한다. 추억 내가 맡은 잡지는 통권 251호부터 300호, 시간상으로는 2009년 3월부터 2013년 4월까지다. 속을 들추기 전 표지를 먼저 훑었다. 몇몇 표지 이미지를 보며 잠시나마 추억에 잠길 수 있었다. 내가 맡은 호는 아니지만 250호의 표지를 장식한 토마스 바슬리(Thomas Balsley)의 캐피틀 플라자(Capitol Plaza)는 뉴욕에서 근무할 당시 회사 바로 옆에 있던 작은 광장이었다. 종종 동료들과 햇살을 맞으며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 났다. 254호의 표지 이미지는 펜타곤 메모리얼(Pentagon Memorial)인데 이를 설계한 KBAS의 키스 카스만(Keith Kaseman)은 유펜 디자인 스쿨 재학 당시 디지털 미디어를 가르치던 강사였다. 펜타곤 메모리얼의 벤치를 라이노로 구현한 사례를 수업에서 보여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대체로 표지에는 완공된 작품이 실렸는데, 262호는 ‘서울대공원 재조성을 위한 기본구상 및 타당성 국제현상공모’의 당선작 마스터플랜 이미지와 다이어그램을 실었다. 이 공모전 때문에 당시 추수감사절 휴일도 반납한 채 일했던 기억이 났다. 힘들어도 지나고 보면아름다운 추억이니, 인간이 기억을 왜곡하는 데 장점도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호 ‘편집자들’ 특집에서 백정희 대표(가든스토리)가 지금까지 특집 주제로 가장 많이 오른 것이 ‘용산공원’이라고 했다. 260호(2009년 12월호)와 290호(2012년 6월호)는 각각 용산공원 아이디어 공모전과 국제공모 당선작을 다루었다. 그 두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당시만 하더라도 이 일이 지금까지 계속되며 내 인생 과업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환경과조경398호(2021년 6월호)수록본 일부 최혜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학위,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AECOM(전 EDAW)과 West8에서 설계 실무를 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건설환경공학부조경학 전공 조교수로 있다. 설계 과정의 경험을 토대로용산공원에 관련된 다양한 연구를 수행해왔다.
  • [나의 미개봉작 상영기] 공개공지의 귀환
    2020년, 상암동 JTBC 사옥의 공개공지 및 보행로에 대한 조경 설계를 진행했다. 대상지는 구사옥의 후면부로, 본래 직원들이 흡연 공간으로 이용하는 어둡고 후미진 장소였다. 그러다 구사옥 맞은편에 신사옥이 건립되면서 대상지는 두 건물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점이자JTBC의 새로운 입구가 되었다. 발주처는 새로 형성되는 대상지가 숲속 오솔길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인근에 아파트 단지가 많아 출퇴근 및 등하교 시간 이곳을 지나는 시민들이 잠시나마 울창한 숲을 통과하는 느낌을 받기를 바랐다. 더불어 신·구사옥을 물리적, 시각적으로 적절히 연결하고 직원들을 위한 휴식 공간을 마련해 주기를 요구했다. 잦은 야근과 스트레스를 달고 사는 기자와 PD가 상주하는 만큼 쾌적한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했다. 광장 vs. 포켓 녹지 최초 설계안에서는 공개공지를 단정하게 포장된 넓은 광장으로 디자인했다. 비좁고 후미진 분위기에서 벗어나 넓고 깔끔한 방송사의 앞마당을 만들기 위한 의도였다. 하지만 발주처는 공간을 넓게 비우는 안을 부담스러워했다. 아기자기한 포켓형 녹지를 마련해 임직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을 더 원하는 눈치였다. 공개공지가 그리 넓지 않기 때문에 여러 녹지로 분절할 경우 자칫 공간이 옹색해질 수 있음을 피력했으나, 녹지에 대한 욕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최종적으로 포장부가 녹지와 자연스럽게 섞이며 다양한 포켓 공간을 형성하는 안이 확정되었다. 준공하고 나니 포장과 어우러진 녹지가 공간에 적절한 깊이감을 형성했다. 의견을 적절히 수용해 안을 정리해가는 것이 오히려 원안보다 더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환경과조경398호(2021년 6월호)수록본 일부 원종호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에서 설계의 기본을 익혔으며, 현대건설에 근무하며 해외 현장에서 시공 경험을 쌓았다. 현재는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JWL)에서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 다양한 규모의 공간을만들어가고 있다. 조경가가 문화인으로 인정받는 날까지 끊임없이생각하고, 공부하고, 실험해 볼 생각이다.
  • [북 스케이프] 엘리제, 쥘리의 미덕의 정원
    문학을 배우던 학부 시절, 아무리 애써도 끝끝내 익히지 못하고 또 좋아하지 못한 몇 명의 작가가 있는데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그중 하나다. 사람을 위한 철학을 한다고 하지만 그 드높은 이상을 막상 실천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자신과 세탁부 테레즈 사이에서 난 다섯 명의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버렸다. 그러고는 아동의 개성과 경험을 강조하는 『에밀(Emile)』을 출간했다. 갈등 상황이 오면 그를 아끼던 지인들을 저버리고 도피하며 일생을 살았다. 앎과 삶을 일치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나, 그를 애써 변명해주고 싶진 않다. 논문에 필요한 자료가 아니었다면 루소의 『Julie ou la nouvelle Heloise(쥘리 혹은 신 엘로이즈)』를 이제야 꾸역꾸역 읽는 일도 없었을 텐데.1 신분은 낮으나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도 학식이 풍부한 생 프뢰는 남작의 딸 쥘리의 가정 교사가 된다. 둘은 사랑에 빠지지만 쥘리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고, 쥘리는 아버지의 친구인 볼마르와 결혼한다. 상심한 생 프뢰는 세계 일주를 떠나 6년 뒤 돌아온다. 그 사이 쥘리는 신뢰받는 아내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 모두에게 존경받는 안주인이 되었다. 볼마르는 이 둘의 과거를 알지만 생 프뢰를 친구이자 아이들의 가정 교사로 자기 집에 머물게 한다. 여러 사건을 거친 뒤 이들의 마음은 한층 성숙한 단계로 고양되나, 쥘리는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다 얻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인물들이 주고받는 긴 편지가 이어지고, 여기에는 루소의 철학적 주장, 특히 관능을 넘어 미덕으로 나아가는 이상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연은 사랑의 전개에서 단순한 배경을 넘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눈여겨볼 장소는 쥘리와 생 프뢰가 첫 키스를 나눈 집 근처의 작은 숲, 쥘리의 권유로 생 프뢰가 머문 메예리, 볼마르와 가정을 꾸린 뒤 집 근처 과수원을 새로 정비해 만든 엘리제다. 작은 숲은 거의 묘사되어 있지 않으나, 이후 생 프뢰가 경험하는 알프스의 자연은 그의 감정과 조응한다. (후략) 각주 1. 『신 엘로이즈』의 완역본은 한길사(서익원 역, 2008)와 책세상(김중현 역, 2012)에서 출간되었다. *환경과조경398호(2021년 6월호)수록본 일부 황주영은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 박사후 연수를 마쳤다. 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문화사적 관점에서 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 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책을 사거나 빌렸고, 그중 아주 일부를 읽었다.
  • [에디토리얼] 편집자로 산다는 것
    책을 편집하는 것은 영화를 만드는 것 못지않게 복합적인 작업이다. 특히 『환경과조경』 같은 디자인 전문 월간지의 편집은 기획, 조사, 취재, 인터뷰, 작품 섭외, 필자 섭외, 교정과 교열, 사진 촬영, 편집 디자인, 마케팅이 한 번에 뒤섞여 돌아가는 도전적인 작업이다. 편집자가 멀티플레이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매달 일정한 날짜에 잡지를 내야 하므로 편집자는 항상 시간과 싸운다. 필자가 원고 마감을 지키지 않더라도, 약속한 날까지 사진이 도착하지 않더라도, 데드라인 전날 편집장이 원고 교체를 결정하더라도 무조건 정해진 날 편집을 마무리해야 한다. 편집 일을 하며 무척 당혹스러운 건 한 달을 먼저 산다는 점이다. 12월에 다음 해 1월호를 만들면 막상 새해 첫날이 와도 감흥이 없다. 칼바람 부는 2월에 새봄맞이 3월호에 집중하다 보면 계절을 착각하기 십상이다. 겨울에 봄옷 입고 가을에 겨울옷 입는 편집자가 적지 않다. 무더위가 한창인 늦여름에 낭만적인 가을 풍경 이야기를 쓰다 보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진다. 조경 저널리즘의 최전선을 질주하고 있는 김모아, 윤정훈 편집자의 한 달을 잠깐 들여다보자.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빼서 늘 집중해야 하는 건 기획 업무다. 기획의 스펙트럼은 참 넓다. 1년간 어떤 흐름으로 무슨 주제와 콘텐츠를 구성할지 계획하는 장기 기획,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주제를 발굴하고 엮는 특집 기획, 콘텐츠의 일관성과 연속성을 보장해주는 긴 호흡의 연재 기획. 물론 면밀한 조사와 성실한 취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머리를 쥐어짜며 작성한 기획서가 곧바로 채택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기획서에 대한 편집주간과 편집장의 반응은 기껏해야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아니면 ‘더 발전시켜 봅시다’다. 작품과 필자를 섭외하고 원고 일정을 관리하는 일 앞에는 늘 난맥이 놓인다. 오히려 해외 작품 섭외에는 ‘루틴’이 있어서 공력이 적게 든다. 설계사무소 홈페이지, 뉴스레터, 웹진, 소셜미디어에서 신중히 고른 후보작 리스트를 두고 편집회의를 한다. 후보작을 좁힌 뒤 이메일로 섭외를 시작하는데, 대개 해외사에는 홍보 담당 부서나 직원이 있어서 바로 반응이 온다. 도면, 사진, 설명을 한 묶음으로 정리한 ‘프레스 키트’가 금방 도착한다. 정작 막막한 건 국내 작품의 발굴과 섭외다. 실을 만한 근작을 수소문하기 위해 갖가지 레이더를 총동원한다. 의외로 섭외 성공률이 낮다. 섭외되더라도 진행 과정이 순탄하지 않다. 정리된 도면과 출판 가능한 사진이 없는 경우, 정제된 형식의 작품 설명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집과 연재 원고에 맞는 필자를 찾고 섭외하는 일에는 다양한 조사와 공부가 필요하다. 필자와 소통하며 원고를 맡기고 받는 일은 잡지 편집의 중요한 과정이다. 필자는 원고 마감일을 어기기 일쑤다. 요즘은 편집자의 애를 태우는 ‘잠수형’ 필자가 거의 없지만, 연이은 독촉 연락에 이제 곧 보낸다는 말만 반복하는 ‘철가방형’ 필자가 여전히 드물지 않다. 최악의 상황이 언제든 일어난다. 도착한 원고가 편집자의 기획 의도와 완전히 다르거나, 필자와 편집자의 소통 과정에서 서로 조율한 방향과 크게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다시 써달라고 요청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많은 시간이 들고 손이 가는 편집 과정은 교정과 교열, 그리고 편집 디자인이다. 외부 필자의 원고와 취재 기자의 기사가 도착하면 우선 모니터로 일독하며 오탈자를 바로잡고 잡지사의 띄어쓰기 원칙, 외래어 표기법 규칙에 맞게 원고를 수정한다.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머리를 맞대고 수정 원고와 이미지들을 배치하고 구성하는 편집 디자인이 시작된다. 출력한 초벌 편집본을 놓고 1교가 진행된다. 디자이너의 수정을 거쳐 재출력한 버전으로 편집자를 바꿔가며 2교와 3교를 진행한다. 교정과 교열은 오탈자 정도만 고치는 작업이 아니다. 문법과 어법에 맞지 않는 단어나 문장을 잡아내고, 정확하지 않은 사실이나 표현을 적확하고 자연스러우며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걸러내고 다듬는 일이다. 글이 더 잘 읽히게, 지면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재구성하는 일이다. 4교에서 책임자의 ‘OK’가 떨어지면 인쇄 이전의 과정이 끝나고, 다음 달의 역동적인 사이클이 다시 시작된다. 여러 멀티플레이어 편집자들이 1982년 7월부터 2021년 5월까지 『환경과조경』 397권을 만들며 어제와 오늘의 한국 조경을 기록하고 내일의 조경 문화를 설계해 왔다. 이번 호 특집 ‘편집자들’에 그들을 초대했다. 『환경과조경』을 거쳐간 김정은, 백정희, 손석범, 양다빈, 조수연, 조한결 편집자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환경과조경』은 어떤 잡지였으며, 조경이란 무슨 의미였나요?”
  • [풍경 감각] 스트로브잣나무와 개
    사철나무, 서양측백나무, 스트로브잣나무…. 이 나무들은 그 자체보다무언가를 가리고 막는 쓰임으로 익숙하다. 이 식물들을 보면 떠오르는개 한 마리가 있다. 본가 아파트 단지에는 샛길이 있다. 쪽문으로 드나드는 발걸음이만든 짧은 지름길인데, 적절히 나무를 심어둔 단지 내 보행로와 달리식재 밀도가 낮아 길에서 1층 세대의 집 안이 보였다. 베란다에 그개가 늘 있었다. 검고 큰 덩치에 순한 인상, 리트리버 종류가 아니었나싶다. 어머니는 주인과 산책하는 걸 가끔 보았다고 했지만 나와마주칠 때는 늘 그곳에 조용히 누워 바깥을 보고 있었다. 그 개가 보던 창밖은 어땠을까? 특별한 풍경은 아니었다.그래도 그 집 앞에는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하얀 봄맞이꽃이며 개망초같은 풀꽃, 누군가 심어둔 노란색 낮달맞이꽃, 소국 같은 화초들이계절마다 피고 졌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맺힌 붉은 산수유열매에는 직박구리와 참새가 날아들었고, 스트로브잣나무 숲에서는까치가 울었다. 사람들은 그 풍경을 가로지르며 여름이면 진창을찰박거리고 겨울이면 쌓인 눈을 뽀드득 밟는 소리를 냈다. 언제부턴가 그 개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여쭤보니 이사를간 것 같다고 하신다. 그 집 앞은 여전한데. 검은 개는 지금 어떤곳에서 무엇을 보고 있을지 궁금하다.
    • 조현진
  • [『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 아날로그 시대의 끝자락
    남들 하는 건 다 해보라는 부모님 말에 따라 (이러란 뜻은 아니었겠지만) 반년 정도 재수생 생활을 했다. 일명 ‘반수생’, 고작 6개월밖에 안 되는 시간이 어찌나 지루하고 길었는지 수험생 신분을 다시 한 번 벗어던질 때의 해방감과 그해에 일어난 일들을 유독 선명하게 기억한다. 오답 노트 복기에 열을 올리던 2008년 하반기, 미국 대선이 치러졌다. 한창 조경에 관심을 두던 때라 버락 오바마가 기후변화와 관련한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게 생각난다. 이듬해 벚꽃이 필 무렵에는 북미 지역을 중심으로 신종플루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는데 열이 나나 싶더니 사흘을 꼬박 앓아누웠다. 무엇보다 휴대 전자기기가 무서운 속도로 변해갔다. 전자사전은 구식이 된 지 오래, PMP가 진화하나 싶더니 가볍고 성능이 좋은 노트북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의 필수품이었던 MP3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터치폰에 좀 익숙해졌나 싶을 즈음 아이폰이 국내에 등장했다. 카메라, 음악 플레이어, 게임기, 웹 서핑은 물론 애플리케이션만 깔면 휴대폰에 수많은 기능을 더할 수 있다니! 손안에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신입생 때만 해도 책 읽는 일은 조금 유별나거나 고루한 취미로 여겨졌다. 당시의 나 역시 책보다는 바깥이 흥미로웠다. 도서관보다는 영화관이나 전시관에 자주 들락거렸다. 활자가 얌전하게 배열된 종이는 무한 확장이 가능한 액정과 스크린 속 세상보다 좁아 보였다. 이곳저곳 쏘다니기 바빴던 내가 『환경과조경』을 펼치게 된 건, 순전히 설계 수업 때문이었다. 텅 빈 도면에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하는데 아이디어는 없고, 참고 자료만이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노트북은 없었고 핸드폰 액정은 너무 작았고 2층 컴퓨터실과 1층 설계실을 오가기에는 버려지는 시간이 너무 많아 고민하던 내 시야에 한쪽 서가에 주르륵 꽂혀 있는 잡지들이 들어왔다. 검색을 대신해 원하는 키워드를 책등에서 찾아 쏙쏙 뽑아들었다. 에디터의 손길이 닿은 종이 묶음은 무수한 자료의 망망대해를 헤맬 필요 없이 양질의 콘텐츠를 쥐여 주었다. 그때 책상 위에 『환경과조경』을 펼쳐 놓은 모습을 다시 회상하니 큐레이션이 잘 된 전시장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때부터 종이 매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 현대 조경을 대표하는 작품은? 다시 읽을 잡지는 통권 201호부터 250호, 2005년 1월부터 2009년 2월호까지다. 내가 2009년 봄 조경학과에 입학했으니, 신입생이 되어 접한 조경의 바로 직전 소식들이 담겨 있는 셈이다. 2005년을 여는 첫 달은 『환경과조경』이 통권 300호를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인 201호가 발간된때다. “어느 칼럼니스트가 적절하게 지적한 바 있듯이, 10년, 20년 혹은 100호, 200호와 같은 인위적인 눈금은 우리의 삶에 리듬을 부여하고, 우리에게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계기를 마련”해준다(오휘영, “월간 『환경과조경』 통권 200호 발간에 즈음하여”, 2004월 12월호). 『환경과조경』도 이뜻깊은 숫자를 기념해 표지를 비롯해 전반적인 편집 디자인을 정비하고, 새로운 필진을 발굴하고조경 담론과 조경 비평을 활성화하자는 목표를 되새겼다. 더불어 올린 특집 ‘열 개의 공간, 다섯 가지 시선’은 무려 118쪽에 달하는 지면을 할애한 굵직한 기획이었다. 당시는 국내에 현대적 의미의 ‘조경’이 들어온 지 30여 년을 지나던 때였는데, 이쯤해서 그간 축적된 조경 작품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편집부 내부에서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에2014년 11월, 조경설계 실무자를 비롯해 담당 교수, 비평가 200여 명을 대상으로 조경 작품에 관한 이야깃거리를 끌어낼 수 있는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응답자는 152명, 참여율도 높은 편이었다. 이 결과를 토대로 201호에 열 개의 조경 공간을 새롭게 소개하고, 개별 공간에 대한 비평과 설문 조사 결과에서 나타난 경향과 특징, 문제점을 다룬 다섯 편의 글을 수록했다. 편집부가 던진 질문은 다섯 개였다. 나름대로 다채로운 결과가 도출될 수 있도록 고민했을 텐데, 아쉽게도 순위권에 오른 작품의 스펙트럼은 그리 넓지 못하다. 순서만 조금씩 달라질 뿐 계속해서 엇비슷한 이름이 등장한다. 그 질문과 결과를 옮겨 적는다.(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