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광윤 ([email protected])
[환경과조경 박광윤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는 오는 9월 22일까지 약 6개월에 걸쳐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를 주제로 한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조경 활동을 총망라하는 전시를 개최한다.
이 전시는 그가 태어난 1941년부터의 삶의 여정을 되짚어보고 1970년대 대학원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 진행된 60여 개의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 대한 조경 작품 아카이브로 마련됐다. 대부분 최초로 공개되는 파스텔, 연필, 수채화 그림, 청사진, 설계도면, 모형, 사진, 영상 등 각종 기록자료 500여 점을 통해 조경가로서의 삶의 궤적을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수 있다.
또한 주제별로 대표작을 엄선해 선보임으로써 도시 공간 속 자연적 환경이 설계된 맥락과 고민, 예술적 노력을 드러내고, 이러한 사유와 철학을 조경건축의 직능을 넘어 자연과 더불
어 사는 삶을 추구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환원하고자 한다.
전시 제목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는 정영선이 좋아하는 신경림의 시에서 착안했다. 정영선에게 조경은 미생물부터 우주까지 생동하는 모든 것을 재료로 삼는 종합과학예술이다. 삼천리금수강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했던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처럼, 정영선은 50여 년의 조경인생 동안 우리 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고유 자생종의 생물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전시는 정영선의 작품 세계를 국가 주도의 공공 프로젝트와 민간 기업이 의뢰한 정원과 리조트, 역사 쓰기의 방법론으로서 기념비적 조경과 식물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수목원과 식물원 등 작업의 주제와 성격에 따라 재구성했다. 연대기적 서사를 지양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경제 부흥과 민주화 과정이 동시적으로 발현된 한국 현대사의 특징과도 맥을 같이 한다. 동시에 수많은 유형의 작업들이 공통적으로 정영선이 강조하는 “지사(地史)적 맥락”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7개 묶음 전시, 조경 직능 넘어서는 삶의 울림
전시는 크게 7개의 ‘묶음’으로 나뉜다. 정영선의 조경이 그러하듯 경계가 느슨한 최소한의 구획을 통해 관람객이 서 있는 자리에서 각 프로젝트의 맥락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했다. 마치 자연주의 정원 속을 거닐 듯 서로 배타적이지 않은 주제들의 우연한 마주함과 포개어짐을 의도했다.
첫 번째 묶음 ‘패러다임의 전환, 지속가능한 역사 쓰기’에서는 ‘장소 만들기’의 현장이 된 조경의 사례를 살펴본다. 한국 최초의 근대 공원인 <탑골공원> 개선 사업(2002)과 ‘비움의 미’를 강조한 <광화문광장> 재정비(2009), 일제강점기 철길 중 유일하게 조선인의 자체 자본으로 건설된 경춘선을 공원화 한 <경춘선숲길>(2015~2017) 등 수직에서 수평으로, 채움에서 비움으로 인식을 전환하고 공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요한 방법론으로서 조경의 역할이 드러난 프로젝트를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묶음 ‘세계화 시대, 한국의 도시 경관’은 주요 국제 행사 개최와 더불어 한국을 찾는 세계인에게 선진화된 도시 경관의 인상을 주기 위해 동원된 사업을 다룬다. <아시아선수촌아파트 및 아시아공원>(1986), <올림픽선수촌아파트>(1988), <대전엑스포>(1993) 등 한국의 경제, 문화, 기술적 도약의 기회였던 대형 국가 주도 프로젝트들을 통해 조경가가 어떻게 발전된 도시 모습의 비전을 제시함과 동시에 인공적인 개발 사업에 땅의 논리를 연결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세 번째 묶음 ‘자연과 예술, 그리고 여가생활’은 경제 성장이 동반한 생활양식의 변화로 수요가 생긴 가족단위 여가활동의 장소들을 소개한다. 정영선은 예술, 교육, 체육, 관광 등 각 문화기관과 레저시설의 기능과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우리 고유의 지형과 땅의 맥락을 살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종합문화 예술단지 <예술의 전당>(1988)의 조경 구상도와 모형 사진, 스포츠 중심의 휴양 리조트 <휘닉스파크>(1995)의 식재계획도와 피칭 자료 등이 공개되며 이는 1980~90년대 당시 디자이너의 소통 방식을 엿보게 한다. 또한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로 인문학 레지던시 <두내원>(2025 예정)도 소개되는데, 마르틴 하이데거의『숲길』에서 영감을 받은 산책로의 개념 스케치가 공개된다.
네 번째 묶음 ‘정원의 재발견’은 선조로부터 향유되어 온 우리 고유의 식재와 경관, 공간 구성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정원을 들여다본다. 전통정원 요소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무대가 된 호암미술관의 <희원>(1997)으로 시작해 경기도와 중국 광저우 사이의 교류 정원으로 조성된 광동성 월수공원의 <해동경기원>(2005),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개인 정원 <포항 별서 정원>(2008) 등 땅의 생김새와 성격에 부합하면서 ‘깊은 주름’의 지형을 만들어 점진적으로 경관을 볼 수 있게 만드는 “전통 정원의 내적 원리를 재현”한 사례를 만날 수 있다.
다섯 번째 묶음 ‘조경과 건축의 대화’는 건축과의 유기적인 협업을 통해 탄생한 조경 작업을 살펴본다. 제주 오설록(2011, 2023)의 <티뮤지엄>, <티테라스>, <티스톤>, <이니스프리> 건축물 사이 조성한 제주 특유의 지형을 살린 개인 주택인 <모헌>(2011)의 중정 정원에 담긴 깊은 숲의 풍경, 남해 <사우스케이프>(2013)의 건물 사이 바다를 향한 시야를 가로막던 돌 언덕을 마치 원래 그러했던 것 같은 형태로 깎아 연출한 방식 등 땅의 조건을 읽고 이를 중심으로 경관이 조성되는 과정 속에서 조경가와 건축가의 내밀한 상생작용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섯 번째 묶음 ‘하천 풍경과 생태의 회복’은 강이 흐르는 곳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습지를 보호하고 도심 속 물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작업을 다룬다. 정영선은 <여의도샛강생태공원>(1997, 2007), <선유도공원>(2001), <파주출판단지>(2012, 2014) 등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 기반 시설에 수공간을 삽입했다. 습지를 복원하고 하천 환경을 개선해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생명체들의 보금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 소개된다.
일곱 번째 묶음 ‘식물, 삶의 토양’은 다양한 식생을 수집하고 연구하며 교육하는 수목원과 식물원, 자연의 치유적 속성이 강조된 명상과 사색의 장소들을 조명한다. 식물을 가까이하는 삶을 통해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방식을 배울 수 있는 곳들이다. 광릉수목원으로 불리던 한국 최초의 <국립수목원>(1987)의 설계 청사진과 남해의 독특한 기후대의 식생을 담은 <완도식물원>(1991)의 조감도, 미국 뉴욕주 북부의 허드슨강 상류에 자리한 원불교 명상원인 <원다르마센터>(2011)를 구상한 수채 그림, 대지와 식생 현황도 등이 공개된다.
‘신작 정원 공개’ 기대…연계 학술행사 ‘정영선 읽기’
서울관의 야외 종친부마당과 전시마당에는 이번 전시를 위한 새로운 정원이 조성된다. 석산인 인왕산의 아름다움을 미술관 내·외부에 재현하고 계절감을 더하는 한국 고유의 자생식물을 식재하여 관람객에게 휴식처를 제공함과 동시에 조경가의 작품을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실내 전시에 소개되는 500여 점의 조경 디자인 기록 자료의 다차원적인 연출을 위해 조경의 ‘시간성’에 주목한 정다운 감독의 영상과 사진작가 정지현, 양해남, 김용관, 신경섭 등의 경관 사진도 함께 소개된다.
또한 전시 기간에는 다양한 행사들이 함께 열린다. ▲정영선의 대표작 <선유도공원>(2002)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기록한 영상 ‘선유도의 사계’가 이달 10일부터 28일까지 상영되며 ▲5월 17일에는 14시 영화감독 정다운의 조경가 정영선에 대한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 상영 및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마련된다. ▲ 7월 3일에는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를 주제로 학술행사도 개최된다. 이날 행사는 ‘조경가 정영선을 읽다’, ‘정영선의 작업을 읽다’, ‘정영선과의 대화’로 구성되며, 조경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 배정한 서울대학교 교수, 김아연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배형민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와 박승진 디자인 스튜디오 loci 소장, 전은정 조경포레 소장, 이호영 HLD 소장, 조용준 CA 소장, 백규리 현대엔지니어링 조경건축 매니저 등이 참여할 예정이다.
한편, 이번 전시에는 배우 한예리가 오디오가이드에 목소리를 재능 기부했다. 차분하면서도 울림 있는 목소리의 한예리는 작품에 담긴 의미를 부드럽게 전달했다. 녹음을 마친 후 “반세기에 걸친 작가의 대표작이 우리 모두의 일상 속에서 아름답게 숨쉬고 있어 놀랐다”며 전시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한국을 대표하는 조경가 정영선이 평생 일군 작품세계 중 엄선한 60여 개의 작업과 서울관에 특화된 2개의 신작 정원을 선보이는 특별한 전시”라며, “그의 조경 작품에서 나타나는 ‘꾸미지 않은 듯한 꾸밈’이 있기까지의 각고의 분투와 설득, 구현 과정의 이야기를 통해 정영선의 조경 철학을 깊이 있게 만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